다음 이야기는 제가 삶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마지막 일자리
경비원 생활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2015. 12. 6)
몸에 이상이 와 조영 술 (스탠트: 혈관 넓히는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도
나중에는 관상동맥 우회 술까지 받고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나온 후
삶에 지친 제 모습을 회고하며 썼었던 글입니다.
어느덧 16년의 세월이 지났군요.
그후로 쇠뭉치였기에 그런 건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인명은 재천이다
人命(인명)은 在天(재천)이라 했던가?
어느 노랫말처럼 “세상에 올 땐 내 마음대로 온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와 겨우 70평생 살아가는데 참으로 힘들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生老病死(생노병사)에 허덕이는 것이 곧 苦海(고해)가 아니던가?
조물주에게 묻고 싶다.
“사람이 태어나서 결국 사망하는 때까지를 일생이라 한다면
生死(생사)만 점지하지 왜 老病(노 병)까지 점지했느냐?“ 고.
“인생 칠십 고래희” 라고도 하지.
칠십까지 사는 것이 드문 일이라면 구태여 70까지 살게 해 놓고
왜 이다지도 힘든 老病(노 병)을 안겨주어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안타깝다.
돌아보니 일생 살아오면서
“그 때는 행복했노라”고 얘기를 할 만한 시기가 없었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마당 귀퉁이 두엄자리 옆이 내가 떨어진 자리 였다지.
그래서 초등학교 때까지도 場 永(마당쇠)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유년 시절 삼시 세끼 밥도 먹기 힘들어 큰댁에서 쌀밥 먹으려 끼니마다 가서 먹었던 일,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운동화 한 켤레 못 신고, 교복 한 번 못 입었었고.
그래서 졸업할 때 친구 김 성 수의 교복 상의만 얻어 입고 졸업 사진을 찍었었고,
해서 위는 교복이고 아래는 검은 핫바지 차림의 내 모습이
유일하게 남은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이 아니던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되어 1년 쉬는 사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배고픔이나 달래려고 고향에 있던 군부대에서 전령으로 살다가
그마저 부대가 이동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솔방울 따서 팔아
겨우 중학교에 갔지만, 하루에 80 리 길을 걸어서 3년을 지각, 조퇴, 결석 한 번 안 하고 다닌 덕에
“쇠뭉치” 라는 별명도 얻었지 안했던가!
결국 ‘쇠뭉치, 라는 닉네임 덕택으로 어지간한 어려움 다 겪으면서도 참을 수 있었던 힘을 얻고 살아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또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운명이었나 병원 신세 지내다가 살아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싶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무작정 상경하여
겨우 가정교사 자리 행운으로 얻어 이듬해 대학교에 갔고,
5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정교사로 공부할 때,
지금과는 달리 가정교사 자리도 하늘에 별 따기가 아니었던가?
그 줄마저 놓칠세라 매달려 공부하다가 지쳐 쓰러지기까지 했었지.
오죽하면 1학년 심리학 시험에서
“욕구불만 충족 법<FRUSTRATION 극복 법>에 대하여 논하라“ 는 시험에서,
"잠이나 실컷 자보고 싶다"는 취지로 썼더니
담당 교수 님 얼마나 감동(?)하셨던지 재시험 보기로 유명하신 그 성 백선 교수님이
98점이나 주셨던 기억이 있구나....
늦은 나이에 배우다 보니 1학년 때 영장이 나왔지만
천운으로 잡은 배움의 기회를 놓지 못해 졸업 후로 미뤘더니,
4학년 여름 기피자로 잡혀가 형무소 생활 열흘 만에
담당 검사님 사정을 듣고 풀어 주어 졸업과 동시 자원 입대 하였더니,
아 이 벌(?)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남보다 4년 후에 군대에 갔더니 4개월의 그 긴 교육,
전반기 6주, 후반기 4주, 전방(前方)교육 6주라니 16주가 아니던가.
그나마 LMG 사수로 만 8주 교육을 받는 동안, 내 키보다도 긴 총을 메고 훈련 받을 때
매일 어깨에 피 흐르던 일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힘든 추억이구나.
겨우 얻은 직장은 어떤가?
1968년 입사하여 1994년 그 회사를 그만 둔 26년 동안
사주(社主)가 5번, 모신 사장님만 18분이셨으니
그 때마다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겨우 살아 남았지만 그 고통이야 또 어쨌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결혼,
결혼을 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해 결국 깨어지고,
재혼해서 사는 동안 샌드위치로 겪은 그 고통은 또 무어라 설명할 건가?
안 병욱 교수님의 인생론에 보면 사람은 3가지 만남 속에 산다 했지.
나는 누구와 살며, 무엇을 하고 살며, 어떻게 사는가? (인생관)
그러고 보니 나는 이 3가지 삶(만남)에서 제대로 산 게 없구나.
아! 돌아보니 한 평생 살아온 삶 참으로 고해였구나.
그런데 그 많은 고해의 삶으로도 모자랐던가? 살아도 살아도 힘든 삶뿐이네,
하지만 살아야 했기에 68세의 나이로 간 쓸개 다 떼어놓고 근무하여야 한다는 일자리 얻어 다녔더니
1주일 만에 코피가 터지니 이를 어쩌랴. 그래도 참고 견뎠더니 그것이 무리였던가?
8개월 만에 심혈관에 이상이 와 결국 조영 술을 받았고, 그러나 놓을 수 없어 수술한 몸으로 나갔더니
열흘 만에 또 조영 술을 받아야 했다.
어쩌랴?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것, 결국 일을 그만 두고 1개월 가량 쉬다가 다시 다른 데로 나갔다.
그것이 결국 나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일을 한지 1년 만에 이번에는 관상동맥 우회 술을 해야 했다.
앞에서 받은 두 번의 조영 술도 수술이던가?
관상동맥 우회 술 정말 생과 사의 갈림을 알리는 수술이었다.
그래서 목에서 배까지 깊이 파인 수술 자국이 아직도 훈장처럼 남아 있고....
결국 두 번이나 갔던 서울대병원에 가서 세 번째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왔지만
입원 기간 중 한 많은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많은 생각이 났었다.
어차피 한 번 태어나서 가는 것, 수술 안 받고 갑자기 가버리면 그것도 괜찮다 싶기도 했고,
죽지 않고 잘못 되어 자식들만 힘들게 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아버님 어머님이 7년씩이나 고혈압과 치매로 사시면서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셨던 가를 보았기 때문이었지.
어쨌든 살아온 것이 더 얻은 삶이라 여기고 욕심 없이 살아가야지.
그래서 뇌어 본다. “인명은 재천인가 보다”고.
이제 흔히들 말하듯 살아온 세월에 비해서는 아주 짧은 삶을 더 살다 가겠지.
작은 소망에 만족하고 가족과 더불어 조용히 살아가야 하나 싶구나.
2008. 4. 27. (이 글을 남긴 날자)
<끝>
첫댓글 맞습니다 인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라 했지요. 그 부름에 대하여 1.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2 언제 죽을 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오직 그 부름은 하늘에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