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송된 무명을 다시 납부하다 (還納退木) . 옛날 전라도 담양에 시씨(柴氏) 성을 가진 아전이 있었는데, 그는 대동색(大同色)1)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1)대동색(大同色) : 조정에 바칠 쌀이나 무명을 관리하는 아전.
담양은 해마다 조정에 바치는 세금으로 베를 바치게 되어 있어, 이 아전의 임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 어느 해 이 아전은 상납할 무명 20동(同)을 싣고 서울로 향하는데, 출발에 임박하여 관장이 붓 세자루와 종이 세 묶음을 편지와 함께 주면서 당부하는 것이었다.
"이 편지와 물품은 가는 길에 서울 남촌(南村) 김생원 댁에 전하도록 하라. 차질 없이 전해야 하느니라." 관장의 당부를 받은 아전은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 그리고 먼저 무명을 바치기 위해 선혜청(宣蕙廳)으로 가서 싣고 온 면화를 마치니, 등급이 차하(次下)로 매겨져 가져온 면화를 모두 퇴송당하고 말았다. . 이렇게 되면 다시 품질이 좋은 것으로 대체시켜야 하니, 고을로서는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곧 아전은 이 사실을 급히 담양 관장에게 보고하게 한 다음, 김생원 댁을 찾아 나섰다. . 시골에서 가져온 용돈 꾸러미를 허리에 차고는 남대문으로 들어와 김생원 댁에 이르러 보니, 대문은 찌그러져 있고 벽은 금이 가고 구멍이 나 있어, . 어떤 총각과 깊은 사랑에 빠져 속살을 맞댔던 그 관계를 궁상맞은 모습을 형언하기 어려웠다.
김생원은 부귀를 멀리 하고 도덕이 높아 지방의 관장들이 물품을 상납하면 곧 퇴송하고 절교하기 때문에, 담양관장도 그것을 알아 붓과 종이를 갖다 드리라 한 것이었다. . 아전이 들어가서 편지와 가져온 물품을 올린 다음 뜰에 서서 쳐다보니, 김생원의 얼굴에는 뼈만 앙상하여 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 밖으로 나온 아전은 그 모습이 가엾어 어정거리고 있으니, 마침 생원 댁 종이 대문을 나오면서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전이 그 까닭을 물어 보았다. "무슨 일로 그렇게 땅이 꺼지도록 한탄을 하는고?" "들어 보십시오. . 오늘로 벌써 이틀을 굶었는데, 내일 아침 또한 굶게 되었으니 한탄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렇다면 생원 어른은 식사를 하시는지?" "아닙니다. . 우리 집은 먹으면 다 같이 먹고, 굶으면 주인어른께서도 함께 굶는답니다."
이 말에 아전은 허리에 차고 있던 돈 꾸러미를 풀어 주면서, "이것은 내 노자이니 몇 푼 되지는 않네. . 비록 적지만 생원어른 조반을 준비해 드리게." 라고 말하며 건네 주었다. . 그러자 주인어른께서 명분 없는 물건은 어떤 것도 받지 못하게 했다며 거절하기애, 뇌물이 아니니 괜찮다고 하면서 주어 보냈다.
종이 그 돈으로 아침 식사를 장만하여 올리니, 생원이 돈의 출처를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리자, . 김생원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그 진심이 가상스럽다고 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 이튿날 아침에도 아전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돈 두 꾸러미를 가지고 가서 그 종에게 주며,
가져온 돈이 적어 이것뿐이니 잠시나마 생원의 굶주림을 덜어 드리라고 했다.
종이 들어가 이 사실을 고하니, 생원은 그 아전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물었다. "너는 무슨 뜻으로 나에게 돈을 주는 것이냐?" . "예, 어르신 끼니를 굶는 것이 하도 딱해 보여 소인의 용돈으로 가져온 것을 드린 것이며, 다른 의미는 없사옵니다." . "그렇다면 무슨 일로 서울에 왔느냐?" "예, 대동목(大同木)을 바치러 상경하였사옵니다." "그렇다면 대동목은 무사히 모두 납부가 되었느냐?" "아니올시다,
면화의 등급이 낮아서 모두 퇴송되었사옵니다." "퇴송이라...." 생원은 곧 벽에 붙은 헌 종이를 약간 찢더니, 글자 몇 자를 적어 주면서 일렀다. "너는 황산대감 댁으로 가서 이것을 갖다 드려 보거라." . 아전이 그 쪽지를 황산대감 댁에 갖다 드리자, 대감은 아전을 내려다보고 웃으면서 묻는 것이었다. . "너는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본시 그 생원을 알고 있었느냐?" "아니옵니다, 전혀 알지 못하옵나니다."
"이 양반은 평생 누구에게 부탁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연유로 너를 통해서만 이런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된 걸고?" 이에 아전은 그간의 일을 자세히 설명드리니, . 황산대감은 크게 칭찬하고는 선혜청 서리를 불러 명했다. "지금 이후로 담양 고을에서 상납하는 무명은 질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 받아들이고, . 지체없이 척문(尺文)2)을 발부해 주도록 하라." 2)척문(尺文) : 한 자 정도의 판자에 쓴 납부증명서.
그러자 선혜청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며칠 전 퇴송한 면화를 모두 받아들이고 척문을 발부해 주는 것이었다. . 이렇게 되니 퇴송된 면화를 다시 바꾸어 바치려면 적어도 5,6백 냥의 추가 비용이 들어야 하는데, 담양 고을로서는 큰 행운인 셈이었다. . 곧 아전은 김생원 댁에 가서 인사를 드리니 생원이 말했다. "내 너의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네 인성(人性)이 남에게 덕을 베푸는 것이라 그 마음을 받은 것이니라."
이러면서 답장을 써 주기에 받아 가지고 담양으로 돌아오니 관장은 생원의 편지를 보고,, "너의 그 의로운 정신이 아니었다면, 어찌 생원이 그런 부탁을 해주었겠느냐? . 만약 그대로 면화가 퇴송되어 내려왔다면 우리 고을이 피폐해질 뻔했도다, . 너의 공적이 매우 크도다." 라고 말하며 무한히 칭찬했다. 그리고 관장은 전라감사에게 보고하여,
이 아전의 자손은 대대로 담양 고을 대동색에 임명하고, 어떤 실책이 있어도 면직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을 동헌 들보에 새겨 두라고 명령했다. . 그리하여 이 아전의 후손이 잘살아서 뒷날 담양에는 시성(柴姓)이 많이 배출됬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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