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 대백과사전에서
높이 7.3m.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석탑이 경주시 구황동(과거의 구황리)에 자리하고 있어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에,
1937년경 낭산(狼山) 동쪽 기슭에서 수집한 명문(銘文)이 있는 와당편(瓦當片)이 있다.
이것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소장하였던 것으로, 평와편(平瓦片) 뒷면에는 ‘皇福寺(황복사)’라 음각되어 있다.
이 평와편은 비록 발견지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종래의 막연하였던 황복사지설(皇福寺址說)에 유력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역시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는 전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덟 장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 위에 구성되었고,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이 각각 8매로 짜여졌는데,
각 면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2주의 탱주(撑柱: 받침기둥)가 모각되었으며,
갑석 상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이 있어, 그 위의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8매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 우주와 2주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4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은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 처마 밑에 덧얹어 건 짤막한 서까래)이 있으며,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굄대가 있어, 그 위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각 층의 옥신에는 각 면에 우주가 있다.
각 옥개석의 받침은 5단씩이고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러한 양식은 신라석탑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낙수면이 평평하고 4면의 합각이 예리하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발전도 경쾌하여 단아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건축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결구하였던 초기의 석탑과는 달리 단일석으로 쌓아올렸으며,
기단부의 탱주도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거북기단석의 파괴를 누가 한것일까?
등위의 석조물은 ?
거북의 4개의 다리는?
왜구들이 그렜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주 불손한 서양의 고약한 물이들은 놈들의 짓일거라고~~~
모아놓은 석조물들의 량이 대단하다
또 아직도 주위에는 발굴이 덜된 석물들의 흔적이 여러군데서 보인다!!
사찰의 규모가 대략 짐작이 간다
첫댓글 아름다운 사찰의 흔적 모습에 아침부터 눈이 번쩍 뜨입니다.
황복사는 솔직히 그동안 못들어 본 사찰 같아요. 파괴되기 전에는 어마어마한 사찰 같기도 하네요.
안동지역에도 예날에는 엄청난 사찰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겨우 흔적 정도만 보이네요.
그 안동역사부지에 있는 석탑, 법흥동 7층 석탑도 그렇고 화회마을 양진당 이 있는 곳도 원래는 절터였다는 소리도 있고
상원사 종도 원래 안동 지역 사찰에 것을 상원사로 옮겼다네요.
이렇게 된것은 조선시대 승유억불 정책으로 거의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화회마을, 법흥동 99칸 고성이씨 종택 등 전부다 원래는 절터였는데 유교 산물로 존재하고 있네요...
세월이 그렇게 되게 한것을 우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