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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묵상글 (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 구원과 헌신의 관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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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구원과 헌신의 관계 <연중 24주 금요일-2020>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을과 고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음을 얘기하는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여인들도 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얘기는 주님께서 당시 소외와 차별을 받는
사람인 여인도 다른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영하시고,
복음 선포단의 일원 또는 제자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셨음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들과는 다른 루카 복음의 특징임은 이 정도로 갈음하고,
오늘은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를 좀 더 집중하여 보고자 합니다.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관계입니다.
물론 여인들은 주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계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의 관계만이 아니라 구원의 관계라는 얘기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여인은 많고도 많으며,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여인은 많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런 여인과 구원받은 여인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 생각에 구원받은 여인은 불행에서 건져진 여인이고 그래서
사랑받아 행복한 여인일 뿐 아니라 구원받아 행복한 여인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의 불행과 비 구원은 그저 인간적인
불행과 비 구원, 그러니까 가난이나 병고나 실연의 고통 정도가 아닌
악령에 의해 인간이 영적으로 파괴된, 그런 불행과 비 구원이었지요.
사실 영의 파괴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전인적인 파괴이지요.
완전히 영에 제압당하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꼭 구원자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명의도 심리학자도 정신과 의사도
이들을 위한 구원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성을 담당할 때 한 형제가 이런 상태였는데 반찬 하나도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하고 영이 시키는대로 먹어야 했고,
식당 자리도 마음대로 앉지 못하고 시키는대로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했으며,
영의 어두운 기운이 그 형제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짓누를 정도였는데
저의 어떤 말도 의사들의 어떤 치유도 먹혀들지 않아
참으로 무력감을 느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들도 분명 이러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 구원받았을 때
그 행복함과 주님께 대한 고마움은 그저 여인으로서 사랑을 드리는
그 이상의 것을 하게 하였고 가족들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기에
주님을 따라나섰을 뿐 아니라 가진 재산도 바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주님의 구원에 대한 여인들의 보답은 헌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여인들의 관계는 구원과 헌신의 관계이고,
그래서 자기 욕심 때문에 주님을 따르던 다른 제자들이 도망쳤을 때도
이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을 따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죽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면서 악령에 사로잡힌 적이 없으니 나는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의 헌신을 보면서 나는 마냥 행복하다고 해도
되는지 성찰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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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쁜 소식”이요, “하늘나라”의 선포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가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열 두 제자과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이었습니다”(루카 8,3).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를 선망하고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 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구원자를 따라다니었으니,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자신의 뜻마저도 바쳤다는 것이요,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너머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우리에게 ‘제자 되는 길’을 여섯 개의 동사를 통해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첫째>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그들은 그저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그토록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고”, <넷째>로 그분을 따라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 복음을 “전했으며”, <여섯째>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주님!
제가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미 저를 그렇하시 때문입니다.
제자이기에 당신을 따를 것이며,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께 시중들고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있기에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며,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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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혜를 돌판에 새겨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걸맞은 응답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를 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카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카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서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티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 되었다 해도, 그 가산이 늘었다 해도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죽을 때면 아무것도 지니고 갈 수 없으며, 영화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시편49).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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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아직까지는 입국하기 위해서는 ‘코로나테스트’를 했었습니다. 검사결과 음성이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지만, 양성이 나오면 음성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었던 동창 신부님은 코로나테스트를 받은 후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해야 할일이 많은데 양성이 나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은 음성이 나와서 다른 동창신부님들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였습니다. 미국은 ‘코로나테스트’를 입국의 조건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With Corona’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입국의 조건으로, 비행기 탑승의 조건으로 ‘코로나테스트’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혹시 코로나 증상이 있더라도 입국해서 치료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입국해서 격리하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집에 오는 가족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빨리 와서 치료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정부의 결정으로 혹시 코로나 증상이 있더라도 입국해서 치료를 받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세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여자들도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형제님이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질문을 받으면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고백 했던 것처럼 신앙 안에서, 신앙의 신비로 우리 모두는 죽지만 언젠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또 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메마른 땅에 봄이 오면 파란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땅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활은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걱정과 근심에서 용기와 담대함으로 일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일어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일어서는 것이 부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도, 빌라도도 모두 그대로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도, 바리사이도 그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두려워서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는 박해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 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일어서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나의 삶이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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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옥타비우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의 뜻인 ‘존엄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장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76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 아우구스테움을 짓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유골을 영원히 안장하기 위해 지은 영광스러운 능입니다. 자기를 비롯하여 후손들까지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능이 폐허가 되고 도굴까지 당할 것을 또 그 능이 포도밭이 되고, 르네상스 정원, 투우장, 화약 창고, 콘서트홀로 계속 바뀌게 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위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과연 영원할까요? 끊임없는 격동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자리에 계실 뿐입니다.
과거 유다인들은 율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부녀자들과 함께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부녀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교 활동에서 식생활과 기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일들을 시중 들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필수 요원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고 복음을 전해줍니다.
당시의 유다 공동체는 부녀자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율법을 익히는데 부적당한 사람으로 여겨 공동체 모임에 참석할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는 부녀자들이 그 창설자 중의 중요한 요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 난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는 율법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이며 사랑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율법 중심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또 예수님과 함께했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녀자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 율법 중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중심,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직접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 중심의 삶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나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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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자정이 되면 내일은 매우 깨끗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매우 완벽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와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 내일은 우리가 어제에서 뭔가를 배웠기에 희망한다(존 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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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6.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섬김의 여정
-순교 영성, 파스카 영성, 섬김의 영성-
새벽 잠깨는 순간 감사의 감정이 가득했습니다. 새삼 육신의 기능에 감격했습니다. 제가 잠든 순간에도 몸은 잠들지 않고 계속 살아서 부지런히 기능을 다했던 것이며, 그러기에 제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그러하십니다. 묵묵히 침묵중에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부지런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이런 감격을 노래한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 121장 전문을 인용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
네 발이 휘둘림을 아니 버려두시리라.
너를 지켜주시는 님 졸지 않으시리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 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 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시리라.”
얼마나 좋은 시편이요, 얼마나 좋은 하느님인지요! 그렇게 많이 노래했어도 이렇게 한밤중 감동해보기는 처음입니다. 시편 그대로의 하느님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은 몸의 기능입니다. 그러니 어찌 부지런히 섬기며 착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메모해뒀던 깨달음도 생각났습니다.
“아, 죄를 짓지 말자! 육신이 병으로 무너지는 것보다 영혼의 죄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약을 먹으면서 은총으로 사는 이몸, 죄를 짓지 말자.”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인생 가을철에 들어 선 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하느님 마련해 주신 계절중의 계절이 가을입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든 분들, 정말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신망애信望愛 삶의 영적 열매는 잘 익어갑니까?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잘 익어가는 가을의 열매 향기는 더 그윽하고 깊어 마음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요즘 가을철 배수확 때가 다가오니 배밭 산책중 익어가는 은은한 배열매 향기가 마음을 참 편안하고 넉넉하게 합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까치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이렇게 까마귀, 까치와 나눠도 수도원 살림에 지장이 없을지, 하느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살펴보려 합니다.
1/10의 십일조는 피조물 형제에게 봉헌한다 생각했는데 농장 책임 수사님의 말은 30%를 넘어설 것이라 하니 1/10 십일조가 아니라, 3/10 십삼조 이상이 되도 수도원 살림에 지장이 없을지 결과를 ‘예의 주시(銳意 注視)’하게 됩니다. 배밭 곳곳에 까마귀와 까치들의 쪼아 먹다 떨어진 흰봉투의 배들이 즐비합니다.
멀쩡하게 잘 익었다 싶어 잘 들여다 보면 손상입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배가 참 크고 둥글게 맛좋게 익어 수확하게 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이런 성공적 인생보다는 파(破) 배같은 실패 인생이 많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솔로몬처럼 부패한 성인은 없다고 합니다.
회개(메타노니아)-친교(코이노니아)-섬김(디아코니아) 인생 여정중 우리 가을 인생 영성의 궁극의 마지막 열매는 섬김입니다. 잘 익어가는 섬김의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부패인생을 막아주는 끊임없는 회개가 동시에 이뤄져야 함을 봅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섬김의 여정이요 이래야 섬김의 열매 풍성한 가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 종과 섬김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종과 섬김의 영성에 투신하는 것이니 결국 파스카 영성과 종과 섬김의 영성은 둘이자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섬김의 여정에 섬김의 직무, 섬김의 훈련, 섬김의 권위, 섬김의 영성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참 영성의 최종 잣대가 사랑의 섬김, 겸손한 섬김, 한결같은 섬김입니다. 베네디도 성인도 당신 제자들인 수도승들에게 주신 규칙서에도 섬김이란 말마디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수도승의 삶은 온통 섬김의 삶으로 규정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깁니다.
그대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복음인 섬김의 삶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이웃을 섬김은 바로 주님을 섬김으로 직결됩니다. 그리하여 당신 수도승의 공동체를 섬김의 학교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교를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극단의 광적狂的 상태를 경계하는 중용의 대가, 분별의 지혜를 지닌 현자가 바로 성 베네딕도입니다. 섬김을 핵심 덕목으로 제시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섬김의 학교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정말 섬김의 학교,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섬김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기도와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이듯 섬김에서도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섬김의 공동체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고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
참으로 디아코니아 섬김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필히 전제되는 바 메타노니아 회개의 공동체요, 코이노니아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온통 바오로 사도의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열렬한 믿음의 고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죄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 영성’은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파스카 영성’과 ‘섬김의 영성’에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순교자들입니다. 평생 파스카의 삶에 섬김의 영성을 살다가 순교한 성인들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3세기 동시대, 친구 관계의 두 순교 성인을 기념합니다.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입니다. 두분의 영적 우정도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가 고르넬리오에게 보낸 아름답고 품위있는 깊은 우정의 편지를 일부 나눕니다.
“나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 형제께 문안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귀하께서 신앙을 용맹히 또 영광스럽게 증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하께서 보여준 영예로운 신앙 고백의 소식을 큰 기쁨으로 접수하고 우리 자신마저도 그 공로와 그 영예의 동참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또 한마음 한뜻을 이룬다면, 동료 사제가 칭송받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칭송받는 듯 즐거워하지 않을 사제가 있겠습니까? 또 형제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하지 않을 형제가 있겠습니까?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은 당신의 섭리로써 시련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우리에게 훈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우애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시련에 대해 필요한 권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상호 사랑으로 서로 도와주며 인내하도록 모든 백성과 함께 단식과 밤샘기도 안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우리를 용감히 서있게 하고 인내하도록 도와 주는 천상의 무기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두 영적 친구 순교자 사이의 아름답고 깊은 우정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주님의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을 충실히 한결같이 섬겼던 두 순교성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순교적 삶에, 파스카의 삶에, 섬김의 삶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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