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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주님을 섬기는 방법 로마서 12:11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시에 주의 종들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주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행 13:36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다윗의 인생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일생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인생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기뻐하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인생을 통해서 성공적인 인생이 어떤 인생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섬기는 인생입니다. 섬기되 자기 뜻을 따라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인생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주님을 섬겨야 함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주를 섬겨라. 게으르지 말고 주를 섬겨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가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주를 섬길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배로 섬기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네이버 영어 사전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십시오. 가장 먼저 worship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service입니다. service가 무슨 뜻입니까? ‘봉사’, ‘섬기다’입니다. 우리는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왜 예배가 중요합니까?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➀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요 4:23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➁예배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시 99:9입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영광을 그분에게 돌려야 하는 이유는 그분은 최고로 영화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➂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시 132:7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예배할 때 그분의 발등상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만나고 싶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과의 만남을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자로 서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비례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첫 사랑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니 처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을 사모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힘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면 조금씩 교회에 오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조금씩 예배를 등한히 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주님과 멀어지는 사람들도 있고 많은 경우는 습관적인 예배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뜨거운 예배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➃예배는 하나님과 주고 받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시간과 몸과 찬양과 기도와 물질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에 응답하셔서 우리에게 말씀과 은혜와 응답과 치유와 회복과 능력과 축복을 주십니다. 예배는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받는 것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세상을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려면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요 4:23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예배가 되어야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감동이 있습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예배 1시간 전에는 내려와서 기도하려고 노력합니다. 설교 준비가 미흡해서 좀 늦게 기도를 시작할 때도 많지만 제 기본적인 중심은 그렇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성령님이 역사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교회 가운데 불 같이 바람 같이 임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일을 위하여 10일 동안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약속대로 임하셨지만 교회는 기도로 준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임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간절히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20세기 초,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10살 정도인 남자아이가 1달러를 손에 꼭 쥐고 거리에 있는 상점마다 들어가 이렇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 가게 주인들은 정신이 이상한 아이라고 매몰차게 내쫓기도 했다. 해가 점점 지고 저녁이 되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69번째 가게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좀 파시나요?” 가게 주인은 60이 넘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하나님은 사서 무엇 하려고 그러니?”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처음 본 아이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사연을 노인에게 털어놨다. 아이의 부모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삼촌이 돌봐주고 있는데, 얼마 전 삼촌마저 건축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현재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삼촌을 치료하던 의사가 아이에게 “삼촌을 구해줄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이라는 것이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천진한 아이는 의사에게 “제가 하나님을 사 와서 삼촌에게 먹일게요. 그러면 꼭 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아이의 말을 들은 노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돈은 얼마나 갖고 있니?” 아이는 대답했다. “1달러요.”, “마침 잘 됐구나. 하나님은 딱 1달러거든.” 노인은 아이의 돈을 받아 선반에 있던 “하나님의 키스”라는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여기 있단다. 얘야, 이 ‘하나님’을 마시면 삼촌이 금방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아이는 기뻐하며 음료수를 품에 안고 쏜살같이 병원으로 뛰어갔다.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는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삼촌! 제가 하나님을 사 왔어요! 이제 곧 나으실 거예요!”
다음 날, 세계 최고의 의료전문가들이 전용기를 타고 이 작은 도시에 몰려왔다. 그리고 아이의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와 삼촌의 상태를 진찰했다. 아이의 삼촌은 정말로 병이 금방 낫게 되었다. 삼촌은 퇴원할 때 천문학적인 병원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라 쓰러질 뻔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어떤 억만장자 노인이 이미 비용을 전부 냈다고 말했다. 삼촌을 진찰한 의료진도 이 노인이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삼촌은 나중에야 아이가 마지막으로 들른 가게의 주인이 억만장자 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노인은 할 일이 없을 때 가게에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감격한 삼촌은 아이와 함께 노인의 가게로 찾아갔다. 하지만 노인은 여행을 떠난 상태였다. 가게 점원은 이들에게 이번 도움을 마음에 크게 담아주지 말라는 말과 함께 노인이 쓴 편지를 전했다.
삼촌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열어봤다. “젊은이,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네. 사실 모든 비용은 자네의 조카가 다 낸 것이니 말일세. 자네에게 이런 기특한 조카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행운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네. 자네를 위해서 1달러를 쥐고 온 거리를 누비며 하나님을 찾아다녔으니 말이야…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자네를 살린 건 그분이니 말일세!”
우리는 이 간증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아이의 간절함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아이였습니다만 1달러를 들고 간절함으로 69곳의 가게를 들리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잠 8:17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2. 주의 일로 주를 섬기라.
사람은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면 그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어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관심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됩니다. 상대의 표정, 상대의 말, 상대의 옷차림, 상대가 하는 일 등 상대와 관련된 모든 것까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일에 관심이 두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라면 내가 헌신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내가 필요하다면 나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고전 3:9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지체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셨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내려오셨답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출 3:9-10입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셨는데 모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레시아 안에 있는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동역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제가 내일 만날 황선교사님이 말레시아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저의 동참을 원하여 저는 내일 말레시아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 하실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우리는 말레시아에도 가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르셨다면 목회자로 일하는 것이고, 선교사로 부르셨다면 선교사로 일하는 것이고, 평신도 사역자로 부르셨다면 평신도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섬기는 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몸으로 섬겨야 합니다. 중보기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중보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재정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재정으로 섬기는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한국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레시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말레시아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의 크기를 따지며 충성의 정도를 정하지 않습니다. 일의 크기를 떠나서 하나님의 일이라면 무조건 충성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나 주일학교 교사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의 정도는 같아야 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설교자는 설교하는 일에 100의 충성을 해야 하고 교사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에 50의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100의 충성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교사도 찬양단도 심지어 교회 청소도 100의 충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통해서 주님을 섬깁니다.
3. 주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주를 섬기라.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머리를 사랑하는데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연애를 하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상대의 머리는 사랑하는데 상대의 몸은 사랑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는 비전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비전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여러분의 교회 사랑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많은 분들의 무관심 때문에 저는 솔직히 지난 주에 외로웠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이전하느냐 아니면 여기서 버티면서 벌금을 내느냐 하는 중대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그린벨트가 풀리느냐 안 풀리느냐 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교회 뒤 도로가 내년 12월에 완공 되는데 그러면 우리 교회의 땅이 자투리 그린벨트가 됩니다. 전체 땅이 1만평이 안 되면 자동으로 그린벨트 해제가 되고 1만평이 넘으면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지역은 현재 지어져 있는 집을 포함 시키면 1만평이 조금 넘고 지어진 집을 빼면 1만평이 조금 안 됩니다. 왜 이런 애매한 상태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담임목사인 저는 여러분에게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럴 때 더 기도하고 이럴 때 더 예배에 힘을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비전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속한 비전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럴 때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작정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럴 때 금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럴 때 교회를 위하여 눈물로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이 지금은 우리 교회에서 그런 사람을 찾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럴 때 시험에 드는 사람은 자살골을 넣는 사람입니다. 이럴 때 마음 불편해하고 이럴 때 서운해 하고 이럴 때 불평하는 사람은 자살골을 넣는 사람입니다. 이럴 때는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생각하고 달라도 이때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자세로 교회를 섬기십시오. 이때 더 기도하시고 이 때 더 예배에 힘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4.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섬기므로 주를 섬기라.
성경에 보면 주님이 자신과 동일시 하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섬기는 것을 주님 섬기는 것처럼 여기십니다.
1) 주의 백성들을 섬기라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주의 백성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9:4-5을 보겠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셨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의 백성들과 자신을 하나로 여기십니다.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음이 바울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바울과 믿음 안에서 하나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살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도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믿는 신자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2) 주의 종을 섬기라
마 10:40을 보겠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너희는 주의 파송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나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파송을 받은 주의 종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자신과 주의 종을 동일시하시기 때문에 주의 종을 대적하는 것은 곧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출 16:8입니다.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먹을 것 때문에 애굽을 그리워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종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을 원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확신이 있습니다. 나는 주님과 하나다. 주님은 나와 주님을 하나로 보신다. 이 확신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여러분에게 주의 종을 잘 섬기라는 말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 사람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라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있을 일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때 모든 사람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게 됩니다. 한 편은 양들이고 한 편은 염소들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양 편에 선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깜짝 놀란 양편에 선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주님의 대답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대답이 마 25:40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은 주님의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백성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주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백성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우리 주변의 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약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다 돌아볼 수는 없습니다. 가난 구제는 임금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구를 돌아봐야 합니까? 그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는 경우에는 우리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십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