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첫날
2-돈화 본당
북간도는 교통 수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차 노선에 따라 본당들이 설립되어 갔다. 그리고 본당과 본당간의 거리는 반경 50Km 내지 100Km가 보통이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의 교구 정도 되는 셈이다. 때로는 200Km 이상 되는 곳도 있다. 오늘날에도 비슷하다. 추수할 곳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
베네딕도회 선교사, 데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1923년 3월 처음으로 돈화를 방문하여 한국인 본당 설립을 목적으로 나흘간 머물렀다. 그런데 그때 한 노인(중국인)이 그에게 말했다.
...저희는 어머니가 먹을 것을 줄 수 없는 아이처럼 가련합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다시 이교도들 세상속에 있습니다. 신앙의 가르침 안으로 깊이 빠져 들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신부님이 없기 때문에 이교도 세계에 다시 쉽게 빠져 버렸습니다......(분도통사 957쪽)
돈화 본당은 1900년경 부유한 중국 신자의 통큰 봉헌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1914년 세계제1차 전쟁 발발로 선교사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길림교구 주교(파리외방전교회 소속)는 오지에 파견 신부(프랑스 신부)를 교구로 불러 드렸다. 이때부터 돈화 본당은 공소로 전락하면서 신자공동체 역시 급속히 와해되어 갔다. 교구는 본당 관리자를 선정하여 재산권 일체를 위임하였으나 사후 관리는 전무했다. 교구와 본당 간 교류가 단절되자 문제가 생겨났다. 관리자가 본당을 사유화한 사건이다. 돈화 본당은 성당과 사제관, 그리고 부속학교 건물이 있었다. 본당 관리자는 일차적으로 사유권을 주장하면서 본당 신자들의 출입을 금지 시켰다. 사회가 안정되자 길림교구는 돈화 본당 주임신부를 다시 파견하였으나, 관리자는 새로 임명된 주임 신부마저 완강히 거부하면서 문제는 심각해저 갔다. 1922년 8월 15일, 마적들의 습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성당과 부속 건물은 안전했다. 마적들은 제의를 입고 돈화시를 활보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적들은 교회의 설득으로 제의를 돌려주었다. 미사 도구는 안전했다. 늘 마적들의 표적이 되었던 교회는 비밀 장소를 만들어 보관한 덕분이었다.
돈화 본당은 베네딕도 선교사들에 의해 복구되어 갔다. 외교적인 노력으로 교회 문서를 재구성한 것이다. 남은 숙제는 와해된 신자 공동체 부활이었다. 1923년, 테오도로 브레허 신부는 학교를 개교하고 전교 회장을 채용하였다. 이어서 본당 관리인도 채용하였다. 전교회장은 1923년과 24년에 각각 20명의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본당 관리인은 주임신부가 부재중인 틈을 이용하여 지난번 관리인처럼 문제를 일으켰다. 자신 주머니 채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926년, 리보리오 모르겐슈바이스는 사제 서품 받은 지 11개월 만에 돈화 본당을 맡았다(주교관내 거주하면서 겸직). 본당 내 두 교사들이 그의 사목을 도왔다. 그들과 함께 흐트러진 신자들을 찾아 가는 모습을 살펴보자. 돈화에서35리 떨어진 곳에 신자가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가는 모습이다.
...길도 없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숲 속에서 몇 시간 헤매자 작은 농가가 있는 빈터가 나타났다. “파이프 담배로 달래 온 굶주림도 이제는 못 버티겠다. 리보리오 신부와 동행인은 열한시간 동안 걸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주민들이 옥수수 알갱이들을 물에 넣어 소금과 양념 없이 푹 끓인 것을 방문자에게 나누어 주고 신자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마침내 칠흑 같은 숲에서 움막 하나가 나타나고 이 움막에 신자 네 명을 포함해 열여섯 명이 살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세시경 “원시림에서 최초의 미사”가 봉헌되었다. 리보리오 모르겐슈바이스 신부는 힘겨운 여정으로 신자 70명을 숲에서 찾았다. 1931년 만주사변은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렸다.
... 수 많은 중국인이 옛 고향 중국 본토로 다시 돌아가 보호받으며 살고자 했다. 다른 이들은 도시나 안전한 취락지로 이주했다. 도시 밖에 살던 한국인들도 대부분 남쪽(남쪽-장춘 또는 심양 방향, 북쪽-도문, 훈춘등 한국 국경 부분)으로 돌아갔고, 도시에 남은 신자들은 60명 뿐이었다.
돈화는 만주국의 수도, 장춘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일본군은 장춘 시내 외곽에 중요 군사시설을 설치해 갔다. 돈화는 비행장이 들어섰다. 돈화가 일본의 신흥 군사 도시로 급부상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들었다. 신흥도시, 돈화는 전과 전혀 다른 구성원들로 채워져 갔다. 늘 깊은 산중에서 농사를 고집하던 한국인들의 생활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도시 성장에 따라 신자 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성장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도,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현지 봉사자의 적극적인 참여, 바로 그것이었다.
돈화의 두 번째 본당 신부(1936년 10월)는 라이문도 아커만이었다. 그는 교사이며 청년회장인 장토마스와 동정녀 추마리아의 헌신적인 봉사로 돈화의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실 라이문도 아커만 신부는 의란 지역(부금,1923년-흑룡강성)에서 사목했던 관계로 한국말을 전혀 몰랐다. 추 마리아 동정녀는 한국말에 능숙한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당은 신자들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본당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당과 부속 건물이 오랜 시간 속에 낡고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지어야 하는지 아니면 대대적인 보수해야 하는지 걱정스러웠다. 데오도로 주교는 보수를 택하였다. 모원인 원산대목구의 수사님들의 솜씨를 믿기 때문이다. 과연 수사님들의 건축 실력은 대단했다. 아주 적은 돈으로 돈화 본당은 새롭게 재구성 되어갔다. 뿐만아니라 본당내 밴드부를 만들어 함께 즐기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로워 졌다. 건물뿐만 아니라 구성원들도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데오도로 주교는 1937년 10월 24일에 거행된 축복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성당을 보수하는 경비는 절감했다. 성당을 수리하지 않았다면 아예 새러 지어야만 했다 견진성사와 축복식은 굉장한 잔치였다. 나 보다 더 기뻐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처움부터 돈화 선교에 지독했던 가시밭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견진자들은 아주 훌륭히 준비하여, 교리 문답 암송할 때 중국식 발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견진자들은 놀랄 정도로 훌륭하게 대답하여 나는 대단히 흡족했다. 성당은 꽉 찼다. 수사들의 연주, 성가, 강론, 신자들의 기쁨이 본당 위로 넘쳤 흘렀다. 견진성사와 학교 축복식에 이어 일본 영사, 군인, 관료들과의 피할 수 없는 식사가 있었다. 이런 모든 일은 신앙적, 선교적 교회의 사회적 부활을 축하하는 행사였고, 교회가 민족안에 뿌리 내릴 것을 약속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문살에 창호지를 붙혀 팽팽하게 한 성당 창문으로 몰려 든 만주 전통 의상을 입은 구경꾼들의 모습이 작은 사진에 보인다. 축하 미사를 드리는 동안 신자들은 폭죽을 터뜨렸다. 폭죽소리가 얼만 요란한지, 성찬 전례 중 성혈을 흘릴 뻔했다. .... 수 백명의 한국인 신자도 한국인 성당을 원하고 있다. ....임시로 만주 어린이와 한국인 어린이는 새로 축성된 학교에 함께 등교한다. 물론 수업은 나누어 진행한다. 그러나 한쪽이 상대방의 장소를 빼앗은 격이 되었고 본당 신부는 교실하나를 사제관으로 사용한다. 교실은 얇은 벽 하나로 분리된다. 한 교실에서 큰 소리로 수업하면 다른 교실에서 더 크게 소리 지른다. 이런 고함소리를 본당신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듣는다. 본당신부에게도 안정을 취할 사제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두 가지 언어로 수업과 강론을 준비할 수 있다.....
성당 보수는 임시 처방이었다. 한중 두 공동체는 각각의 독립된 성당을 원하였지만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재 보수된 성당 건물 일부가 또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서둘러 새 성전 건립을 시작한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독일로부터 송금이 차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 신축은 계속되었다. 개인적으로 미국의 신자들과 친분이 있는 수사님 덕분이었다. 돈화 본당 신축 중에 아주 특별한 사항은 성당 가까이에 있는 일본 경찰 서장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가끔 성당 신축 현장에 나타나 감독 역할까지 해 냈다. 성당 신축금, 그리고 적극적인 행정적인 지원이 합쳐지자 돈화 본당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재건축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내부 시설도 예술적 가치와 전례적 품격을 동시에 갖추어 나갔다. 획기적인 일은 제대가 신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건축을 설계한 알뷔노 슈미트 신부는 후에 한국에서 전개한 건축 개념을 이때 발견한 것이다. 1942년10월 성당 봉헌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돈화 본당 성전 봉헌식은 연길 지목구가 치른 행사로 마지막이 되었다. 봉헌식 이후 성당의 마무리 공사는 계속 되었다. 너무 서두른 탓으로 부실 공사를 초래했다. 성당은 습기로 여러 군데 손상되기 시작했다. 그곳을 고치려 해도 자재(페인트)가 없었다. 경찰서장이 전근 가는 바람에 도움 받을 곳도 없었다. 주일마다 한중 두 공동체를 돌보는 일은 주임신부, 라이문도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에서 본당까지 오려면 한 시간 이상 걸렸다. 한국인들은 분가를 간절히 원했다. 유 라파엘 회장과 동생 가브리엘이 사제관으로 사용될 집과 인근 부지를 희사했다. 라소 페추 수사와 아밀라리오 굼프 수사가 신속하게 집을 수리하여 보좌 신부를 맞이하였지만 길림의 일본 당국이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한 지붕 아래 두 신부가 한중 신자를 분담하여 본당을 운영해 갔다. 두 공동체는 특별한 다툼없이 서로 양보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학생들끼리 다투어도 이들은 태연하게 받아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