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할 수 없는 것’의 재현
‘숭고(sublime)’라는 개념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리오타르는 숭고라는 개념을 칸트의 미학이론에서 빌려왔지만, 그 개념을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로 확장시켰다.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Leçons sur l'analytique du sublime)라는 책에서 칸트의 숭고 개념을 매우 치밀하게 분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미학에서도 숭고라는 개념은 칸트가 가장 먼저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롱기누스(Dionysius Cassius Longinos, 217~273)나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에게 숭고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이미 미학의 핵심 범주로 다루어졌다. 다만 칸트에 이르러 숭고라는 개념은 더 체계화되었으며 그 의미가 명확해졌다. 롱기누스나 버크에게 숭고라는 개념은 우리가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이외의 또 다른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숭고함은 아름다움과 달리 위대함 혹은 거대함과 관련된 감정을 나타낸다. 가령 어마어마하게 큰 폭포를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아름다움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다. 이는 엄청나게 크거나 위력적인 것에 대한 감정이다.
칸트는 이렇게 압도적으로 큰 것과 위력적인 것에 대한 숭고의 감정을 종교적인 감정과 연관 짓는다. 그에 따르면 숭고의 느낌을 일으킬 만큼 크거나 위대하다는 것은 수적으로나 역학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오히려 거꾸로 어떤 대상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압도할 때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칸트가 보기에 숭고의 실체는 그 대상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을 결코 완전히 파악하거나 헤아릴 수 없다는 불가능함, 즉 나의 무능력에 있다. 우리가 숭고를 느끼는 대상은 우리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며, 이는 곧 나의 무능력에 대한 자각이다. 칸트가 숭고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자연 속에는 우리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위대함이 있다는 사실과 이를 통하여 얻은, 인간이 하나의 불완전하고 왜소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종교적 자각이다.
물론 리오타르가 칸트의 숭고론에서 관심을 갖는 부분은 종교적인 측면과 거리가 멀다. 리오타르의 관심사는 숭고를 통해서 인간의 왜소함을 깨닫고 도덕적 혹은 종교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칸트의 교훈적인 철학이 아니다. 리오타르의 관심은 숭고미가 지닌 독특한 메커니즘에 있다. 그것은 숭고의 메커니즘이 결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는 일종의 역설(패러독스)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서 숭고미를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자연을 우리가 결코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리오타르에게 숭고미의 본질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데서 오는 역설적 체험이다. 우리가 곧잘 자연에 대해서 숭고미를 느끼는 것도 자연은 우리가 재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기에 가능하다. 숭고미란 이렇게 근본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고자 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칸트와 달리 리오타르에게 숭고미의 범위는 무한히 확장된다. 그에게 재현할 수 없는 대상은 근본적으로 숭고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숭고의 대상은 자연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 세계 전체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심지어 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완전하게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숭고한 대상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모든 것 혹은 지금 이 순간에 나타나는 사건 자체일 것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세계야말로 재현할 수 없으며 가장 숭고하다.
따라서 이러한 숭고한 순간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화도 불가능한 이미지일 것이다.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작품 〈숭고는 지금이다〉(The sublime is now, 1950~1951)는 이를 잘 구현한다. 어떤 사물도 재현하지 않는 형상을 나타내는 수직선 이외에 빨간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화면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적 체험이지만 어떤 재현적인 체험도 아니다.
리오타르에게 숭고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현실 자체가 숭고한 것이며 어떠한 담론에 의해서도 현실은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가 보기에 거대 담론은 자신이 세계 자체를 재현하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숭고한 현실을 은폐한다. 말하자면 거대 담론 그 자체가 현실을 은폐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그렇기에 숭고의 체험이란 이러한 허구적 거대 담론의 위선을 드러내고 거짓된 통합을 해체시키는 기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어떠한 재현이나 주장도 그 자체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단편적이고도 불완전한 부분 주장일 뿐이다. 숭고란 이렇게 거대 담론의 제왕적 지위를 해체하고 많은 소소한 담론들을 분쟁의 상태에 빠뜨리는 기능을 한다.
리오타르는 바로 이러한 숭고의 본성을 잘 드러내는 매체를 언어나 담론이 아닌 이미지에서 찾는다. 재현할 수 없는 숭고의 대상을 말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한정 지어서 규정한다는 뜻이다. 가령 어떤 숭고한 대상을 선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을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으로 한정 짓는 동시에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숭고함이란 이런 규정마저 넘어선다. 숭고함을 언어로 규정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일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말해서 숭고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이미지는 숭고를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와 달리 이미지가 갖는 근본적인 특성 때문이다. 가령 어떤 선한 이미지를 만든다고 치자. 그 이미지가 과연 선한 특성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선한 이미지를 위해서 선한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선한 얼굴에는 결코 선하지 않은 요소들, 턱선, 날카로운 콧방울, 파인 볼 등이 개입하게 된다. 아무리 선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도 그 이미지를 위선적이고 사악한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 선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흰색으로 화면을 채운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상태를 선함이 아니라 해석하지 않고 비어 있음이나 착란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리오타르는 이렇게 대상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으며 수많은 이질적인 것을 포함하는 이미지야말로 역설적으로 숭고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미지 자체는 근본적으로 어느 한 가지 특성으로 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으므로, 수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 분쟁을 낳는다. 이렇게 볼 때 말이 아닌 이미지야말로 숭고를 구현하는 모델이다. 리오타르는 담론의 이상적인 형태도 이렇듯 근본적으로 이미지의 특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재현할 수 없는 것’의 재현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