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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나도사랑을했으면
신라는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지만(735), 철원,개성 일대까지만 신라 영토로 관리로 관리되고 있었다. 그 후 신라는 패강진을 설치하면서(772) 예성강 이북으로 일부 진출했지만, 신라 말까지 예성강에서 대동강까지는 방치 상태에 있었다.
928년 태조는 청천강 이남의 요충지인 안북부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청천강 선으로 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후발해가 멸망하고)934) 정안국이 건국되면서 후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을 이끌고 온다.
발해인은 압록강으로버투 청천강 이북 지역에 정착했고, 청천강 이남 지역의 축성이 활발한 시기에 내투했기 때문에 이 지역 축성 사업에 참여하면서 청천강 이남 지역에도 정착했다. 발해 유민의 정착으로 서북방지역이 안정되어 고려는 930년 후백제와의 고창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1차전시 거란이 안융진을 공격했을 때 이를 막아낸 중랑장 대도수는 후발해 세자 대광현의 아들이었고, 2차전 때 보주(의주)에서 전사한 대장군 대회덕도 발해 유민이었다. 거란은 2차전 후 획득한 발해 포로들을 끌고와 동경 요양부 영주와 귀주에 배치한다.
송이 거란으로 가는 요충지인 익진관益津關에 축성을 시도하자 거란군이 출병하여 저지하는 충돌이 있었다.(963) 3년후 송은 북한을 공격했고 이에 송과 거란은 다시 충동하게 된다(979). 이 전투에서 거란은 대패하여 익왕 적열등 다수의 장수가 전사호 병사의 피해도 막심했다. 송은 여세를 몰아 계속 공격하여 북한을 멸망시켰다(979). 북한을 멸망시킨 송은 곧바로 거란을 공격했다. 초기 전투에서는 송이 우세했으나, 거란의 반격으로 송 태종이 겨우 몸만 빠져나올 정도로 대패한다.
거란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동경유수 야율말지 관할의 병마를 사열했다(983). 그러나 이 때의 원정은 요동 지역의 여진 정벌로 끝났다(984.4).같은해 고려의 성종은 이겸의를 보내 압록강 연안에 관성을 쌓도록 했지만, 압록강 연안에 거주한 여진의 공격으로 실패한다. 여진은 이겸의를 잡아갔고 고려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984) 거란의 요동 침공과 고려의 압록강 관방 설치로 요동 지역의 여진은 거란과 고려가 연합하여 침공한다고 여겼다.이에 여진은 급히 송에 고려가 거란 침공에 가담하여 협공했다는 목계를 보냈다(984.5). 송은 이듬해 한국화를 보내 고려가 거란에 밀약하여 여진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면 송의 거란 원정에 군사 협조를 할 것을 종용했다(985.4). 고려는 송에 사대하는 관계이지만 송의 요구대로 거란 원정에 동참할수 없었다. 이에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 고려가 거란 침공에 가담했다는 것은 여진의 무고일 뿐 현실적으로 거란과의 통교는 요하와 압록강이 가록막혀 있어 불가능하다고 항변하면서 송의 거란 협공 제의를 거부한다. 송이 고려에 군사 협조를 종용할 무렵, 거란은 야율사진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다시 고려 원정을 준비한다(985.7). 그러나 이때의 원정도 여진 정벌에 그쳤다.(985.8). 앞서의 여진 정벌 때보다 대규모이고 본격적인 이 원정에서 거란은 요동 지역에 있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이듬해 개선했다(986.1). 정안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거란은 압록강 연안에 진툴할수 있었다.한편 거란이 요동 정벌에 주력하면서 남방 경계가 약화되자, 송이 거란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기주 탁주 고안 신성을 함락했다(986.3). 며칠후 환주와 삭주가 송에 투항하면서 거란의 변방 방어선이 무너졌다. 그러나 7월로 접어들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거란은 환주를 탈환했어, 이어서 송의 장군 양계업을 삭주에서 격파했다.
991년, 거란은 생여진의 남방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 북안에 진출하여 위구 진화 내원의 3개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주둔시킨다.
압록강 결빙시간 12.20~4.3(3개월 13일)
대동강 결빙기간 12.15~3.23(3개월 8일)
고려 중앙군
중군:우천군(1천), 천무군(1천), 간천군(1천)
좌강:지천군(1만),마군(1만) 우강:보천군(1만),마군(1만)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
2군은 3천명 규모로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구성된 왕의 친위부대이다.
6위의 총 병력(4만 2천명)
좌우위,신호위,홍위위 :보승과 정용(마군)으로 구성 (3만 2천명) 이들은 평상시 수도 개경을 방비하고, 방수라 하여 1년 단위로 변방 수비에복무한다. 또 전쟁이 예상되면 출정군으로 편성되기도 한다.
금오위는:개경 치안을 담당. 7천명 규모. 보승과 역령(노역부대)로 구성
천우외:왕의 행차나를 호위하거나 행사에서 활동하는 의장대.역령과 해령(수상水上에서 왕을 보위)으로 구성.
감문위:도성과 궁궐을 방비. 1천명 규모.
상령常領:육지에서 왕을 보위하는 부대
대:25명 오:50명(2대로 구성) ?:200명(4오로 구성) 영:천 명(5 ?로 구성)
다시
응양군:천명
용호군:2천명
좌우위:보승 만명, 정령 3천
신호위:보승 5천 정령 2천
흥위위:보승 7천 정령 5천
금오위 보승 6천 역령 1천
천우위 상령 1천 해령 1천
감문위 1천
총 45령 4만 5천명
지방에 편성된 군대를 주현군이라고 한다. 이중 양계(북계,동계)에 설치된 주현군은 나도 지역의 군대와 구별하여 흔히 주진군이라 한다. 주현군의 기원은 정종이 거란 침입에 대비해 각지 호족들이 보유한 병력을 바탕으로 조직한 30만 명의 광군으로 본다.
남도 주현군의 병력은 보승 8601명, 정용 19754명, 일품군 19882명으로 모두 48237명이었다.
주현군이 언제 제도적으로 편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고려의 지방 제도가 정비된 1018년으로 추정할 뿐이다.
고려의 양계는 평상시에는 주진군과 방수군으로 방비했고 대규모 전쟁이 예상되면 전국적으로 동원하여 편성된 출정군을 파견했다. 북계에 배치된 군대의 규모는 10만명에서 11만 명으로 추정된다.
태주 - 박주 방어선
개주 -안주 방어선
흥화진성은 130~170m의 고지군을 따라 능선상에 축조되었고 동,남,서쪽은 삽교천이 흘러 자연 해자를 이루고 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다.
곽주성은 해발 412m의 능한산에 자리하고 있다. 북,동쪽 성벽은 자연 절벽을 이용하고 있으며, 서,남쪽은 경사진 능선을 따라 축성했다.
거란 병제에 의하면 도통을 임명하지 않은 원정군은 6만 명을 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래서 동경유수 소손녕이 지휘한 1차 원정군도 6만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거란군의 원정은 통상 9월에서 12월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곡식 수확을 마치고 저장에 들어가는 9월부터 출병해야 현지에서 식량 확보가 용이했고 12월에는 회군해야 다시 방목을 준비할 수 있었다.
거란의 병제
전투를 담당하는 정군 1명과 보급을 담당하는 타초곡가정 1명, 물품 관리와 운반을 담당하는 수영포가정 1명 이렇게 3명이 1개조를 이루어 3필의 말과 함께 단위 전력을 구성한다. 또한 사람마다 철갑 8벌, 말 고삐, 말의 철갑, 활 4개와 화살 400개, 기타 창과 도끼 등 무기와 말먹이를 포함해서 동원한다.
어장친군:황제의 친위부대로 규모느 5만명 정도 인것으로 추정된다.
궁위기군:황제의 호위 부대이다. 정정, 번한전정,기군 세부류가 있다. 병력규모는 장정이 16만명, 번한전정이 24만 8천명으로 여기서 기군 10만 1천명을 내개 된다.
도통을 임명한 원정의 부대 규모는 15만 명 이상이다. 도통을 임명하여 원정한 사례는 985년 여진정벌, 제3차에서 6차까지의 고려 원정이다.
도통을 임명하지 않고 특정 지방관에게 명하여 원정토록 하는 경우는 기병 6만 명 정도를 보냈다.
거란군은 행군시 호가군과 선봉군으로 구성된다. 호가군은 또 원탐난자군과 연락부대로 구성된다. 호가군은 어가를 호위하는 군대라는 의미인데 정예한 병사 3만명으로 구성되었다. 선봉군은 호가군 앞에서 선봉 역활을 하는 군대로 병사 3천명으로 구성되었다. 원탐난자군은 정찰부대로 10여명 정도로 선발된다.
선봉군의 각 로路 즉 본대의 전후좌우 사면에 배치된다.
대:5백~7백명
도:5천~7천명(10대)
명:5만~7만(10도)
동경요양부가 관할하는 향정이 한때 4만 1천 4백명이었었다.
고려의 총지휘부는 안북부에 있었다.
여진을 통해 거란의 침공 소식을 저한 고려는 서둘러 전쟁을 준비한다. 고려 성종이 직접 서경에 행차하고 안북부까지 가고자 했다. 이때 고려는 주현군을 제외하고 출정한 병력 규모는 3만~6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이 군사들을 주방어선인 청천강 일대와 청천강 이북의 가주~봉산군까지 추진 배치했다.
거란의 이동로는 조두,통원보, 봉황성을 거쳐 보주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했을걱으로 추정된다.
이 이동로는 약230km에 달하며 이동로의 90%이상은 산맥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할지론이 대두된 배경은 당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의 영토로 공인한 사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희는 거란이 대동강 이북이 아닌 청천강 이북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음을 논거로 할지론을 비판했다.
청천강 이남 지역은 태조때 개척된 곳이다. 당시 고려와 거란은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은 고려의 영토 개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거란이 암묵적으로 청천강 이남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청천강 이북은 지역에 대한 개척은 광종이 거란과 단교 상태에서 여진을 축출하면서 이루어졌다. 요동 정벌로 여진을 복속시킨 거란의 입장에서 여진을 축출하면서 이루어진 고려의 청천강 이북 개척은 자신의 연고지에 대한 침탈로 간주할 수 있었다.
거란은 남경통군도감을 다시 설치했고(994.3) 송의 화친 요구를 거철하면서 5여 년에 걸쳐 전쟁 준비를 했다. 거란 성종은 송에 대한 정벌을 단행(999.9~1000.1),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란이 송에 본격적인 공세를 펼친것은 1004년이다.
전연의 맹으로 송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다음해에 거란은 고려,여진,송과 통하는 길목인 압록강 하구의 보주 지역에 각장을 설치하여(1005) 동방 진출을 준비했다.
한편 이시기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올립한 정변이 일어났다(1009).1010년에는 고려의 동계 지역의 한 장수가 화주에서 동여진인 95명을 몰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여진을 통해 강조의 정변이 거란 성종에게 알려졌다. 이에 거란 성종은 대역을 범한 강조에 대한 징벌로 고려 원정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동여진은 거란 성종이 고려 정벌을 천명하자 좋은 말 만필을 바치면서 고려 침공에 동참하게 된다.
거란의 2차 원정군의 규모는 40만 명이었다. 고려도 30만 명의 군사를 이끌로 통주에 주둔하게 한다. 이로써 고려는 평시의 주진군과 방수군 10만 명을 합하여 약 40만 명에 가까운 규모의 군대를 평성하게 된다.
2차전시 거란대군은 강동 6주인 흥화진, 통주, 곽주 등에서 고려군과 싸우게 된다.
통주와 곽주길목은 횡적인 능선과 하천, 애로 지역 또는 고개를 동시에 극보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대의 기동력을 어렵게 한다.
평주와 개경에 이르는 긴구간의 협이 있어 기동이 어렵다. 이중 예성강에서 개경 사이의 협곡은 200~300m의 고지 사이에 위치하며 좌우 능선이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능선이고, 협곡 중간에 300m 이상의 고개가 있었다.
흥화진 전투는 11월 17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흥화진성을 함락하지 않자 거란 성종은 11월 23일 배후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무로대 일대에 20만 명을 잔류시키고 흥화진을 우회하여 통주방향으로 진출했다.
11월 18일 별도의 거란군이 귀주인근까지 진출하게 된다. 고려측에서는 통주에서 출병한 최사위 등이 거란군과 싸웠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북계 동로를 이용한 거란군의 남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로을 이용한 거란군의 진출은 저지 된것으로 보인다.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는 통주전투는 삼수채 전투와 통주성 전투로 구분된다.
삼수채 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전투로 흥화진에서 남진한 거란군과 고려의 강조군이 청강의 3개 지류가 합쳐지는 합수목 일대에서 치루어졌다. 11월 25일에 강조군은 통주성을 나와 삼수채 지역에서 하천과 산을 이용하여 진을 배치했다. 한 부대는 강조읭 니솔아래 3개의 하천 지류가 모이는 통주 서쪽에 주둔토록 했고, 또 한 부대는 근처의 산에, 나머지 한 부대는 성을 등지고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를 이요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 초반의 우세에 자만한 강조가 전장에서 장기를 두는등 지휘를 소홀히 하고 있을 때, 거란의 야율분노가 삼수채를 기습 공격하여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를 생포하고 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거란군은 통주성을 우회하여 12월 6일 곽주성을 공략했다.
곽주에서는 두 차례 전투가 있었다. 하나는 12월 6일 거란군이 곽주성을 공략하여 함락시킨 전투이다. 다른 하나는 서경에서 전투가 한참 벌어지던 12월 17일 고려의 양규가 흥화진과 통주의 군사를 이끌고 곽주성을 공격하여 열흘만에 재탈환한 전투이다.
12월초, 거란군이 통주성을 우회하여 곽주로 전진할 때 고려군은 곽주의 서쪽 완항령에 매목해 있다가 거란군을 기습했다.
12월 6일 거란군은 곽주에 도착했다.
곽주성은 거란군에게 덤령당했다. 거란군은 군사 6천여명을 잔류시켜 성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거란군은 청천강을 넘어 안북부를 공략하고, 이후 서경까지 파죽지세로 남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16일 흥화진에 있던 양규는 군사 7백 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명을 규합했다. 12월 17일, 양규는 거란군의 선두가 서경을 공략하고 있는 동안 곽주를 공격하여 거란 주둔군을 격멸하고 성안의 남녀 7천여명을 통주로 옮겼다.
12월 9일 거란군의 선봉은 서경 인근까지 진출하여 중흥사탑을 불태웠다. 이에 고려 현종은 '고려 국왕의 거란에 대한 입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한다.
12월 10일 거란군의 주력 부대는 숙주를 함락시킨다.
12월 11일 서경성의 항복을 받아 오라는 거란 성종의 명을 받은 거란측 사자와 2백여명의 군사들이 강경대응하기로 결심한 서경성 고려군에 의해 격파 되고 강화 교섭은 무산된다.
12월 12일 서경 외각의 임원역에서 거란군 3천명을 벤다.
12월 13일 다시 거란군을 대파하고 패주하는 거란 군사를 추격한다. 그러나 마탄에서 역습을 당해 대패했고 마침내 서경성은 포위당한다.
12월 15일 서경성의 강민첨등이 흔들린 민심을 수습하고 성의 방비를 강화한다.
12월 17일 , 공격을 계속하던 거란군은 서경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우회하여 남진을 계속하였다.
12월 18일 거란군이 개경으로 진출하자 고려 현종은 피난을 결정하고 개경을 출발한다.
12월 30일 현종이 양주에 도달하자 하공신이 강조가 거란에 이미 생포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화친을 청할것을 건의한다.
10111년 1월 1일 거란군은 개경에 입성하여 약탈과 방화를 했다.
1월 3일 고려는 거란 진영에 하공신을 보내 거란군이 철수하면 고려 국왕이 친조하겠다는 강화 조건을 제시한다.이를 받아들인 거란 성종은 하공신 일행을 인질로 잡고 1월 11일에 회군한다.
1013년 3월부터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여 그해 7월과 다음해 2월에도 재차 사신을 보낸다.
1015년 4월 거란은 야율행평을 보내 강동 6주의 환수를 요구했으나 고려는 야율행평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1015년 11월 고려는 곽원을 송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군사 원조는 얻지 못하고 거란과의 화해를 종용하는 조서를 받는데 그친다.
4차전을 전후로 고려는 거란의 강동 6주 반환 요구와 무력 침공에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다. 1016년 1월 9일, 거란 사신 10여명이 압록강에 도달했으나 고려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해부터 거란 연호 대신 송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6차전시강감찬은 30만의 우세한 병력으로 지형을 활용하여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을 대파한다.
1018년 12월 고려는 20만 8천여명의 출정군을 영주일대에 배치하였다. 이로써고려는 북계의 주진군을 포함하여 약 30만 명에 달하는 방어군을 평성했다.
거란의 3~6차 전쟁시 마다 동원된 거란군의 수는 약 15만명 이었을 것이다.
고려가 강동 6주를 차지하자 함흥에서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의 동여진은 거란과의 연결이 차단되어 고려에 적극즉으로 귀순해왔다.
거란은 압록강 도하 지역인 보주에 내원성을 설치한 후 금에 망하여 고려에 이전될때까지 이 지역을 관할했다.
거란은 6차례에 걸친 고려와의 전쟁후 대외 팽창을 중지하고 농업 국가로 전환한다.
첫댓글 이 역사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의심되는 것은 양측에 동원된 병력 숫자입니다. 특히 농경체제였던 고려가 상비군 1 명을 유지 하려면 1 년 양곡만 두섬이 드는데요 . 의복과 무기는 물론 양곡 생산과 운반과 도정 등이 가능하려면 1 인당 약 6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고 30 만 곱하기 6 명은 180 만이라는 후방 인력이 필요합니다 . 약탈에 가까운 조세를 부담한다 하여도 [당시에 양곡을 징수하여도 운반비로 소모되는 지역이 많았기에] 불가능한 경우지요 . 수 백년이 지난 임란 이후 조선의 사정은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만주 출병시 1 만 징병을 위해 군 현 당 수 백명이 차출됐고 이는 보행이 가능한 모든 남자를 징병하다시피
제가보기에는 여기서 말하는 인원은 후방의 보급군까지 모두 아우르는걸로 보입니다. 보통 삼국지연의에서도 말하는 병력에도 그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0만 정도라 해도 일개 도시의 인구 반절정도이니 어마어마하지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