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인생은 승무원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지만 그 또한 업보를 다 없애고 열반에 들어가면 끝난다. 나는 언제 죽는지, 이 세상은 언제 끝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도 모른다. 그날이 이날이라고 말하는 이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그러니까 그날이 언제일지 궁금해하는 건 시간 낭비 정력 낭비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살아갈 뿐이고 부르시면 바로 떠난다.
예수님도 십자가형을 받지 않으셨어도 우리처럼 언젠가는 돌아가셨을 거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다정하게 부르시며 십자가의 불의한 죽음을 받아들이시기까지 완전히 그분의 뜻을 따르셨다. 예수님의 삶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삶을 가리킨다. 그 삶이 어떤 건지 몰라서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희고 긴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 찬란한 빛, 끝없이 긴 계단 그리고 어둠, 울부짖음, 뜨거운 불 등 모두 우리 상상이다.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다. 돼지는 신체 구조상 평생 하늘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가 하늘을 보게 되는 거처럼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상은 여기와 완전히 달라서 지금 상상하는 것 중에 실제 그것과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거다.
예수님은 그날이 도둑처럼 올 거라고 하시며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는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인생을 집사의 삶에 비유하셨다. 비행기에서 지켜보면 승무원의 삶은 겉모양만 보기 좋지, 그들의 노동 강도는 대단하다. 어린이를 달래고 진상 손님을 대하고 비상시 안전한 탈출을 돕는 것까지, 그리고 식사 음료 준비에서 계속 이어지는 승객의 호출에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 많은 승객이 비행기에 타서 내릴 때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내도록 최선을 다한다. 예수님은 그게 우리 인생이라고 하신다. 이웃을 돌보는 게 우리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이다.
수도자들은 그런 승무원의 삶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들의 삶은 봉사다. 보수도 받지 않는 순수한 봉사를 지향한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들에게도 보수가 주어지지만 단지 그들을 스쳐 간다. 하느님께 모든 걸 맡겼으니 하느님은 그들의 삶을 책임지신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는다. 아니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 잘 섬길지 고민한다. 수도자들의 그런 삶은 다른 성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표지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는 알림이다. 돈은 필요한 것일 뿐이지 결코 쫓아가고 따라갈 건 아니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 먹고 입는 게 필요하단 걸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다 알고 계신다(마태 6,32). 그분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도 화려하게 입히신다(마태 6,28). 몇 푼짜리 참새라고 떨어지거나 말거나 아무렇게나 하시는 분이 아니다(마태 10,29). 그런 걱정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하는 쓸데없는 수고다. 수정되는 순간 내 생명 날 수는 이미 정해졌고, 그보다 짧아지면 짧아졌지 늘릴 수는 없다.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 집사 생활을 할 건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 나중에 주인을 만나면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예수님,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거처럼 일하고, 내일 당장 떠날 수 있는 마음이 되게 수련합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생활을 하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겉옷의 안감 색은 녹색입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으니 그 은총을 제게도 전해주셔서 참 좋으신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게 해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