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나도사랑을했으면
1400년 성탄절...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
아나톨리아의 고지대 평원은... 병사와 식량의 주공급원이었다....
이제 외국 동맹군과 용병들 외에는 달리 의존할 데가 없었다.
내전이 한창이던 1347년에 들이닥친 흑사병으로 최소한 제국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비잔티움 학자들...대부분은...로마 교회와의 통합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340년경 테메트리오스 키도네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에 매료되었고, 따라서 이탈리아 학문도 무시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지적으로 깊은 교류를 원했고, 소망은 점차이루어졌다.
1396년의 니코폴리스 십자군(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5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자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가 주도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바에지드 1세는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에서 이 십자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마누엘은 교회통합을 반대했다. 그는 나름대로 진정한 종교적 확신이 있었고 그의 백성들이 절대 교회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누엘의 장남 요안네스 8세는 서방의 원조 없이 제국은 구조될 수 없다는 확신하에 선왕의 충고를 무시하고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라틴 사제들의 기량이 그리스 사제들보다 월등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라틴 사절단은 하나의 팀으로 훈련을 쌓은 고도의 숙련된 논쟁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잔티움이 아닌 다른 정교회 국가의 지배자는 분명 교회통합을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동방정교회의 다른 나라 총대주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거대한 반도(아나톨리아)는 로마 제국 시절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그많던 인구가 줄어든 것은 로마 제국의 쇠퇴, 그와 함께 찾아온 역병과 말라리아의 창궐, 그리고 7세기와 8세기의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 때문이었다. 제국이 안정을 되찾은 것은 9세기가 되어서였다. 잘 짜여진 방위체제가 적의 급습 위험을 줄여주었다.
국경지역의 방어는 그곳의 호족, 곧 적군의 땅을 침입하거나 적군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일로 평생을 보낸 아크리타이(akritai, 비잔티움 시대의 국경 전투대)에게 맡겨졌다.
11세기 중반에는 그 힘이 제국 정부를 뒤흔들 정도였다. 한편 중앙정부는 아르메니아 국경의 북쪽까지 지배권을 가지려는 생각으로, 광대한 지역을 정식으로 편입시켰다. 그 결과 비잔티움의 세리(稅吏)와 성직자들은 국경호족과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원한이 결국 제국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
(셀주크투르크는) 국경호족들에게 계속 기습을 하도록 부추겼다. 비잔티움은 아르메니아 최후의 독립 공국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에 맞섰다. 하지만 제국 수비대는 기습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들을 상대해줄 아르리타이도 없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071년 8월 19일 금요일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졌다(유명한 만지케르트 전투를 말한다. 여기서 이긴 셀주크투르크는 아나톨리아 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로마노스는 용맹스러웠으나 지략이 부족했다. 용병들 또한 믿을 게 못되었다. 그의 군대는 궤멸당했고, 로마노스는 생포되었다.
무슬림 국경호족들에게는 이슬람의 전사라는 뜻을 가진 가지라는 호칭을 주었다.
셀주크 왕조가 쇠퇴하면서 국경의 가지 족장들은 차츰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니케아 황제들이 아크리타이를 부활하여 국경 수비를 강화...비잔티움 제국의 1261년의 콘스탄티노플 수복(라틴 제국으로부터 수복)은 감격스러웠던 만큼이나 불리한 점도 있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잔티움은 유럽에 깊이 연루되어, 발칸 제국(諸國)뿐만 아니라 라틴 제국 몰락의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서방 국가들의 위협도 함께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아시아 주둔 군대는 철수했다. 해군의 긴축재정으로 해안 경비도 약화되었다. 지불할 것들이 새로 생겨나면서 제국 전역의 세금도 치솟았다. 아크리타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고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341년에는 요안네스 칸타쿠제노스와 어린 왕 요안네스 5세 섭정들 사이에 내전까지 일어났다. 요안네스 5세의 지지자들이 마니사와 아이딘에서 용병을 고용하자, 요안네스 칸타쿠제노스는 1344년에 딸 테오도라를 오르한과 혼인시켜 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술탄은 답례로 6000명의 전투병을 트라케로 파병했다. 칸타쿠제노스(요안네스 6세)는 왕위를 차지한 다으에도 오스만군을 계속 불러들여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이용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들 투르크군은 대부분 트라케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1355년 요안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실권하자 오르한은 극서을 유럽 침략의 구실로 이용했다. 1356년에는그의 아들 쉴레이만을 지휘관으로 한 투르크족 군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다. 그 군대는 그로부터 채 1년도 못 돼 코를루와 디디모테이코스(Didymoteichos,디디모티쿰Didymoticum)를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플 점령을 위해 내륙을 압박했다....1362년...투르크족은 서트라케의 지배자 되었다.
비잔티움으로 귀국한 후인 1373년에는 술탄의 강요로 그를 지배자로 인정하고, 연공을 바칠 것과 요구할 때마다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 마누엘까지 무라드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세르비아는 1355년 스테판 두샨이 사망한 뒤 왕국이 둘로 갈라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발칸 반도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불가리아는 1330년 벨부즈 전투에서 세르비아에 패한 상처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불가리아는 투르크족의 진군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남세르비아의 왕 부카신이 1371년 트라케 쪽으로 파견한 대군(7만)에 불가리아는 1개 부대만 보내주었을 뿐이다. 부카신은 투르크족을 견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장군이었다. 마리차 강변의 키르멘에서 세르비아군과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투르크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당한 것이다....이제는 세르비아의 전 왕국을 장악하고 있던 북세르비아의 왕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도 술탄의 가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칸 제후국들에게 파견대를 보내줄것을 지시했다. 자존심 강한 세르비아인들은 그런 요구를 받자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에 라자르 국왕은 술탄과의 주군 - 봉신 관계까지 끊어버렸다. 그러나 투르크군이 신속한 공격으로 니시를 빼앗자 또다시 술탄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럭저럭 하는 사이 라자르 왕은 침략자에 대한 범발칸동맹을 획책하여, 138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플리차 강변 전투에서 술탄 군대를 격파했다. 무라드는 즉각 복수전에 돌입했다. 먼저 불가리아로 신속하게 진격해 그 지역의 두 왕, 니르노보의 이반 시슈만과 비딘의 스라키미르에게 대부분의 땅을 빼앗았다. 그러고 나서 남세르비아로 건너가자, 그곳의 속국 군주 키우스텐딜의 콘스탄틴은 술탄에게 향응까지 베풀며 군대를 제공했다. 무라드는 그들을 이끌고 다시ㅏ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라자르 왕이 기다리고 있는 '검은 새들의 벌판', 즉 코스보(Kosovo) 벌판으로 향했다....투르크군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전투에 임했다. 그에 반해 기독교군은, 최초의 강력한 공격이 저지당하자,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병졸들 사이에서는 변절의 속삭임까지 흘러나왔다. 해질녘이 되자 투르크군의 승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라자르 왕은 포로로 잡혀 무라드가 죽은 천막 안에서 살해되었다.
바예지드는 도나우 강 경계를 따라 지배권을 확립한 뒤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탈리아 해상국들이 대함대를 조직중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굉장할 거라는 소문과는 달리 비잔티움에 당도한 서방측 원군은 부시코 장군이 인솔해온 한 줌의 병력이 전부였다. 그들은 1년간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며 자신들 이름으로 된 성과는 내지 못했다....제국의 수도를 한 번 공격하기로 했다.
1395년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티무르는 시바스까지 뚫고 들어가 주민들을 학살했다. 학살된 자 중에는 그곳 총독으로 있던 바예지드의 아들도 끼여 있었다....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포위를 고 군대를 아나톨리아로 이동시켰다. 티무르의 군대는 이미 시바스에 닿아 있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402년 7월 25일 앙카라에서 벌어졌다....자기 위치를 꿋꿋이 지킨 부대는 스테판 휘하의 세르비아군밖에 없었다. 그는 술탄의 장남 쉴레이만과 쉴레이만의 형제 한 명을 구해내기까지 했다.
마누엘은 아들 요안네스 8셀의 힘에 눌려 있었다.
술탄의 베오그라드 공격(1440년) 공격이 무산되자 무라드 적들의 사기는 올라갔다. 피렌체 공의회의 성공으로 마음이 흡족해진 교황은 십자군을 조직했다. 헝가리의 울라슬로 1세(재위 1440~1444년) 왕도 열성적으로 그것을 환영했다. 세르비아 왕도 헝가리를 돕겠다고 나섰다. 술탄에게 선전포고를 한 사람은 스칸더르베그 라는 별칭을 가진 알바니아의 족장 제르지 카스티리오티(Gjergi Kastrioti, 카스트리오타Kastriota라도도 한다)였다. 카라만 족장도 부추김을 받아 아시아에서 술탄을 공격했다. 무라드가 카라만족을 제재하는라 정신이 없는 동안 동맹군을 거느린 헝가리군은 서출 왕족인 트란실바니아의 전사야노슈 휴냐디의 지휘 아래, 도나우 강을 건너 세르비아 땅에서 투르크군을 축축했다. 무라드 2세는 전력을 다해 유럽으로 돌아와 도나우 강 상류 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굳이 전투를 하려고는 들지 않았다. 울라슬로 왕도 비슷한 감정인 듯했다. 헝가리 군대는 교황의 특사 율리아노 체사리니가 지휘하는 교황의 서방 군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울라슬로 왕은 그보다 좀더 많은 것을 기대했다. 그와 무라드는 144
4년 6월 세게드(세게딘)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특히 무라드는 코란에, 울라슬로는 성서에 대고 10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 기간에는 어느 쪽도 도나우 강을 건너려 해서는 안 되었다. 휴전에 불만을 가진 후냐디는 그곳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라드 2세는 이제 그리도 고대하던 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경에서 군을 철수하고 자신의 양위 계획을 발표하기가 무섭게 헝가리 왕 울라슬로가 도나우 강을 거너 불가리아를 지나 진군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체사리니 추기경이 이교도와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자, 이때를 놓칠 새라 진군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조약 위반은 투르크족에 못지않게 기독교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요안네스 8세 황제는 워조 제의를 거부했다. 세르비아의 브란코비치도 군대를 철수하고, 스칸더르베그의 동맹군 가담을 가로막았다. 후냐디는 마지못해 원정대를 뒤쫓아갔다. 하지만 그의 전략적 권고를 추기경은 묵살했다. 아타톨리아에서 은퇴를 대비해 신변을 정리하고 있던 무라드 2세는 군대를 이끌고 급히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1444년 11월 11일 바르나에서 기독교군 병력의 3배나 되는 병력으로 그들을 덮쳤다. 기독교군은 궤멸당했다. 울라슬로 왕과 추기경은 전사했다. 그 승리로 술탄은 도나우 강에 이르는 지역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1448년에는 후냐디(그때는 섭정이었다)가 헝가리, 왈라키아, 보헤미아, 독일 용병대를 이끌고 공격을 재개해왔다. 후냐디는 코소보 벌판에서 스칸더르베그와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스칸더르베그는 알바니아군과 만나기도 전에 투르크 대군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후냐디 자신도 독일과 보헤미아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쳤을 정도였다.
1446년에는 술탄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콘스탄티노스는 그 동안 요새로 복구시켜놓은 헥사밀리온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무라드는 중포를 가지고 왔고, 그것으로 2주간 줄기차게 공격을 퍼붓자 마침내 성벽은 무너졌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가까스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콘스탄티노스 군대 중, 특히 알바니아인 용병대는 충성심도 용기도 없었으며 현격한 전력 차이를 드러냈다. 술탄은 헥시밀리온 성벽을 또다시 파괴하고, 파트라스와 클라렌자로 진군하면서 가는 곳마다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런 후 그곳 전제군주들로부터 제후국과 연공 약속을 새로이 받아낸 뒤 군대를 철수했다.
귈베하르라는 이름의 노예 여성이 (왕자) 메메드의 아들 바예지드를 낳았다.
서방 기독교계는 베네치아와 부다페스트에서 들려오는 온화한 술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니코폴리스와 바르나에서 치욕을 당한 이후, 투르크족과 다시 싸우겠다고 나서는 서방 국가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레반트(Levant,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 아나톨리아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쪽에 관시믈 보이는 군주는, 오직 1443년에 나폴리 왕관을 차지한 아라곤의 알폰소 5세(재위 1416~1458년) 밖에 없었다.
...교황청조차 신임 술탄에 대해선 안심해도 좋다는 희망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교황에게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황제가 서명한 동서 교회통합의 시행을 여전히거부하고 있는 도시(콘스탄티노플)에 원조해주고 싶은 마음 또한 별로 들지 않았다.
술탄이 루멜리 히사를 완공하자(즉 콘스탄티노플 점령 준비), 콘스탄티노스는 곧바로 서신을 통해 교회통합을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해왔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문에서는 교황의 이름이 받들어 모셔졌고,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동서 교회통합의 율령이 발표되었다....그리스인들은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성당으로 들어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교회통합을 받아들인 사제들에게만 예배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술탄 함대의 규모...콘스탄티토플에 있었던 이탈리아 선원들이 남긴 자료를 보면, 3단 갤리선 6척, 2단 갤리선 10척, 노가 딸린 갤리선 약 15척, 푸스케(무게가 가벼운 긴 배) 약 75척, 파란다리아 20척, 그리고 통신이 주목적이었던 외돛배와 소형 범선이 여러 척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대 지휘관에는 불가리아 태생의 배교자(이슬라교로 개종한 기독교도) 쉴레이만 발토글구(Sulayman Baltoghlu)가 힘명되었다. 노잡이와 선원은 죄수와 노예들도 간간히 섞여있기는 했으나 대개는 후한 임근에 이끌려 자원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술탄은 육군보다는 함대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리라는 생각에서 지휘관들 임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투르크측 자료에 따르면, 정규군 약8만 명에, 비정규군 바시 바조우크 2만명, 비전투 종군자 수천 명 정도로 나타난다.
대포는 수바르츠(Bethold Schwartz)라는 독일인 탁발 수도사가 화약의 추진력으로 포탄이 날아가는 기구를 제작한 이래(1354년)
1377년 베네치아인들은 제노바와 전쟁을 벌이며 해전에서 그 대포를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배에는 육중한 전쟁 무기를 실을 수 없었고, 설사 실을 수 있었다 해도 배 안에서 쏘는 포탄은 약간의 타격만 입힐 뿐 배 한 척 침몰시키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약했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1453년 2월 19일 동방에서 날아온 가장 최근의 소식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각각 400명의 병사와 함께 2척의 군용 수송선을 콘스탄티노플로 즉시 보낸다는 것과,당시 재설비중이던 15척의 갤리선도 준비되는 대로 곧 보내겠다는 사항을 의결했다. 그후 닷새 뒤 베네치아 원로원은 이 소함대의 경비 충당을 위해 레반트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에게 특별세를 징수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교황, 서방 황제들, 헝가리 왕과 아라곤 왕에게도 당장 원조를 하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서신을 전달했다. 하지만 3월 2일까지도 원로원은 여전히 편성에 대한 논의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알비소 롱고(Alviso Longo)를 지휘관으로 하고, 총지휘는 해군 총사령관 자코모 로레단(Giacomo Loredan)에게 맡긴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주일 뒤, 최대한도로 빠르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또 다른 결의안이 원로원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월 초, 다섯 척의 갤리선을 동방으로 보내겠다는 교황의 의지가 담긴 서신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4월 10일자로 된 베네치아의 답장에는, 추기경들의 이러한 결정에 만족해하면서도 교황의 갤리선 임대료가 아직 체불중이라는 사실도 함께 적혀 있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들어온 최신 정보에 따르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인력보다는 오히려 식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늦은 줄도 모르고, 배는 3월 31일까지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해야 된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세찬 북풍 때문에 해협 통과가 더욱 어려워질 거라는 얘기였다. 마침내 베네치아 함대의 출발일은 4월 17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마침내 베네치아 함대가 출발했을 때는 콘스탄티노플이 이미 2주간이나 포위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탄의 가신인 왈라키아 군주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 도움없이는 결코 그에게 대들려고 하지 않았다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장비를 갖추고 골든 혼에 남아 있던 선박 수는 모두 합해 26척이었다. 자신들의 거류지 성벽 밑에 정박하고 있돈 페라의 제노바인 상선과 소형 선박들은 제외한 숫자였다....이들 대부분은 노 없이 돛에만 의존하는 갑판이 높은 배들이었다. 투르크군의 대함대와 비교하면 아주 보잘것 없는 소함대였다. 육군의 병력차는 더욱 두드러졌다.
8만 명에 육박하는 정규군과 엄청난 비정규군 부대를 보유한 술탄의 군대에 맞서 약 22.5킬로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위대한 도시는 7000명의 병력으로 싸워야 했다.
메소테이키온(Mesoteichion) 성벽은 가장 취약한 곳으로 늘 여겨져 온 곳이었다.
1422년 술탄 무라드가이 도시를 공격했을 때 비잔티움인들은 외벽 방어에 집중했고, 투르크군은 그것을 뚫지 못했다. 황제는 병력의 열세를 감안해 이버에도 그것을 적절한 전략으로 생각했다.
4월 5일...황제는 최정예 그리스군과 함께... 메소테이키온 성벽에 자리잡았다. 그의 오른쪽, 카리시오스 문과 밀리안드리온 성벽에는 주스티니아니가 자리했다. 그러나 술탄의 공격이 메소테이키온에 집중될 것이 확실해지자, 주스티니아니와 그의 제노바 벼사들은 밑으로 내려와 황제와 합류했다.
4월 6일 공격 개시
(교황이 세를 내어 보낸 제노바의 갤리선은) 우수한 항해술을 입증해 보였다.
페라의 제노바인들이...중립을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했고,...
덕은 높았으나 백치나 다름없는 왕(헨리 6세)
첫댓글 제가 제목에 뭔뭐 중에서 라고 한것들 있쟎아요..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올린것 세어보면 꽤 되죠..이런것..사실 모두 제가 다 읽고 올리는 것입니다..그중에는 시간이 촉박해 한쪽씩 보면서 중요한 부분만 찾아 올린것도 있지만 요즘엔 다 볼려고 노력합니다. 책은 주로 립도서관에서 빌리는데.제가 회원으로 가입한 곳은 동대문..강동..종로..그리고 ..몇군데..그렇게 해서 한달에 읽는 책 권수는 몇십권..아...너무 노골적으로 제 자랑을 하는것 같군요..그냥 이 꼬리말 삭제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