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바다나 산과 들로 나가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천렵(川獵)이라고 하며, 주로 남자의 피서법(避暑法) 중 하나였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4월령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선비들은 시를 읊으며 흥을 돋우고 농군들은 농악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여흥을 즐겼다. 원래 천렵은 고대 수렵사회(水獵社會)와 어렵사회(魚獵社會)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찌는 듯한 찜통더위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게다. 옛 선비들이라 해서 직접 물에 들어가고픈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신분과 체면 때문에 맨몸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흐르는 차가운 물에 발이라도 담가 그 시린 기운을 즐기며 더위를 식혔을 법하다.
바로 이게 탁족(濯足)으로 당시 선비들의 최고 피서법이었다. 특히 천렵(川獵) 시 어죽(魚粥)을 끓여 놓고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는 탁족(濯足)을 즐겼다.
고려 때의 학자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탁족부(濯足賦)’에서 “나물 먹고 배불러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얇은 오사모를 뒤로 재껴 쓰고, 용죽장 손에 집고 돌 위에 앉아서 두 다리 드러내어 발을 담근다. 그 시원한 물을 입에 머금고 쭉 뿜어내면 불같은 더위가 저만치 도망을 가고 먼지 묻은 갓끈도 씻어낸다. 휘파람 불며 돌아와 시냇바람 설렁설렁하면 여덟 자 대자리에 나무베개를 베고 눕는다”라며 탁족(濯足)의 시원함을 노래했다.
한편 조선 순조 때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일반 서민의 풍속(風俗)을 적은 책이라고 볼 때, 탁족(濯足)놀이는 궁중(宮中)이나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퍼진 풍속(風俗)이었던 것 같다.
계곡은 물론 동네 개울가나 강가를 찾아가 돌을 주워다가 부엌을 만들고 그 위에 솥을 걸어 놓고 서너 명이 물가로 나가 쪽대꾼과 몰이꾼, 들통꾼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데 어른들의 천렵에 따라온 어린아이들은 몰이꾼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몰이꾼이 바위와 풀가를 헤집고 다니며 고기를 몰아주면 쪽대꾼은 쪽대를 펼쳐 몰아준 고기를 떠 들통꾼의 양동이에 잡은 고기를 붇는다.
이렇게 잡은 붕어, 쉬리, 메기 등 민물고기의 배를 따 푹 삶아 소쿠리에 받쳐 국자로 문질러 걸죽한 어탕국물을 내 쌀 넣고 된장 고추장 풀고 끓이다가 수제비 떠 넣고 풋마늘, 매운고추, 정구지, 파를 넣고 끓여 소금이나 장으로 간을 하면 여름철 보양식으로 이만한 게 없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엔 죽십리(粥十利)라 하여 아침에 죽을 먹으면 이로운 열 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혈색을 좋게 하고 기운을 돋우며 수명을 늘리고 심신을 안락하게 하며 말을 잘하게 하고 통증을 없애며 음식을 잘 내리게 하고 말소리가 맑아지며 배고픔을 달래주고 갈증을 없앤다”라고 돼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붕어죽(鯽魚粥)이 기록돼 있으며,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붕어죽 만드는 법이 기록돼 있다. “큰 붕어를 창자를 빼내고 비늘째 푹 삶아 꺼내어 대나무체에 내려 살을 발라내고 뼈와 껍질은 버리고 원 즙에다 맵쌀을 넣어 죽을 쑨다. 후추와 생강을 넣어 먹는다”라고 돼 있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정조지편에 붕어죽, 홍합죽, 백합죽, 조선 말기의 요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삼합미죽(북도의 해삼, 동해의 홍합, 쇠고기), 향토음식 편에서는 제주도의 옥돔죽, 고등어죽, 게죽, 전복죽, 강원도의 담치죽(담치, 섭조개), 함경도의 섭죽(섭조개죽), 여수의 홍합죽 등이 소개돼 있다.
어죽(魚粥)으로 끓여 먹을 수 있는 민물고기로는 붕어 잉어 가물치 메기 꺽지 등이 있다. 생선은 가자미죽 게죽 낙지죽 대구죽 붕어죽 비웃죽 생굴죽 섭죽 옥돔죽 우렁죽 전복죽 조기죽 추어죽 홍합죽 등 다양하다.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