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하느님 앞에 서기 전에 문득 뜬금없이 과거 일이 기억나곤 한다. 좋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모두 다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그래서 아픈 일이다. 아무도 모르는 데 나 혼자 얼굴이 화끈거린다. 되돌아가서 바로 잡아놓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다. 그때는 옳고 멋지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잘못됐고 부끄럽다.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이 세상 사람 중 나만 아는 비밀이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게 다 드러나 있다. 하느님이 천사를 시켜 그런 것들을 기억나게 하신다고 믿는다. 내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하신다.
같은 기억이 반복된다. 그중 어떤 것은 이제 보고 씁쓸하게 가소롭게 웃는다. 아파야 할 만큼 아프고 괴로워야 할 만큼 괴로웠나 보다. 치유와 해방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완치되기까지 의사에게 여러 번 치료받는 거처럼 또 단단히 묶인 올가미를 푸는 거처럼 그런 과정을 통해 죄의 상처가 실제로 치유되는 거 같다. 그러니 이 거추장스러운 육체를 벗는 날, 내 속내가 남김없이 다 드러나는 날, 지극히 선하고 참된 하느님 앞에 서는 날은 얼마나 대단할까. 돼지가 드디어 고개가 젖혀져서 저렇게 푸르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이 있는 줄 모르고 땅의 먹을 것만 찾아다녔던 날을 후회하게 되는 건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다.
살면서 고소 고발 법정 싸움 안 하는 것도 복이라고 했다. 그래서 법정에까지 가기 전에 서로 합의하고 끝내고자 하는 거다. 하느님 앞에 그런 모습으로, 하늘을 보게 된 돼지의 마음으로 그렇게 서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너무 놀라고 괴로워서 죽어 그 자리에서 없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 아마 지옥이 그런 걸 거다. 그런데 그 후회 괴로움은 지옥이 아니라 연옥 형벌이고 단련이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한다(루카 12,59).’ 그러니 지금 여기서, 거기까지 가지 전에, 세상에서 사는 동안, 비록 죄짓게 하는 육체이고 늘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내가 뭔가 할 수 있을 때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을 뵙고 놀라지 않게 될 거다.
탈종교화라고 해서 삶의 의미, 사는 이유, 인생의 끝에 대한 물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그 답은 하느님이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외아들을 희생시키는 아버지가 우리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 앞에 서면 믿음도 희망도 없어지는 판에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남는 건 사랑뿐이다. 가장 작은 이들을 돌보고 섬기는 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다. 그런데 연민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믿음이 없어도 자선하고 봉사할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은 자선과 봉사가 아니라 그들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거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사이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가장 작은 이들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계신다. 그래서 주님은 돈의 가치도 없는 20원짜리 빵으로 내게 오시나 보다.
예수님, 성인들의 삶 앞에서 부끄러워지고 순교자들 앞에서 숙연해집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 서면 어찌 될지 상상하는 거조차 두렵습니다. 그런 일이 없게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친해지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고 작은 이들과 더 친해지고 그 안에서 주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가 계시는 영원한 세상을 더 그리워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