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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윤회 통해 생명 존엄을 노래하다 | ||||||||||||||||||||||||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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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출생의 문정희는 진명여고 재학시절에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고, 여고생으로서는 최초로 시집 『꽃숨』을 발간했다. 1969년, 동국대 국문과 4학년 재학 중 서정주와 박목월의 추천으로 《월간문학》에 「불면」,「하늘」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동국대 문예창작과와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천상병시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문정희시집』 『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아우내의 새』『찔레』『우리는 왜 흐르는가』 『그리운 나의 집』『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제 몸 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등이 있다. 문정희는 초기 시에서 삶, 현실, 소망을 직접적이고도 감각적인 시어로 정확히 포착하여 묘사하지만 후기 시에 와서는 생명력 회복과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여성의 현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역사의식을 열어 보임으로써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가장 인간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사랑과 고독은 시인의 뜨거운 시혼의 원동력이다. 고독은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는 사랑의 안팎에서 생겨나는 정서이다. “모든 순간을 활활 타오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더 고독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의 고독한 감정은 단순하게 표현되지만 절실하고 강렬하다. 그대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온몸이 깨어져도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시적 화자의 고독한 상황이 당당하고도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다. “혼자 흘러와/혼자 무너지는/종소리”와 같은 고독을 “그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는 반문에는 처절한 고독이 느껴진다. 여기에서의 ‘고독’은 전통 서정시에서 표현되는 고독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고독에는 아직도 낭만과 함께 기대하는 그리움의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내재된 상처와 비감과 ‘고독’을 투시할 수 있도록 언어로 돕는 것이 시라고 말하는 시인의 어조가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인간은 언어로 존재하며, 그 중의 가장 위대한 꽃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문정희는 활발하고 당당한 시적 사유로 여성적 생명의식과 열정, 그리고 자유를 주로 노래한다. 그의 부드럽고 섬세함과 서정성은 현실에까지 이어져, 단순한 사회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삶의 근원인 ‘사랑’이라는 화두 찾기에 골몰하는 그는 깊게 관찰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다. 그 절창이 「다알리아」이다. 사랑이 익으면 시인은 꽃을 꽃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다알리아의 붉은 색을 보고 사랑의 끝없는 열정에 대해 사색한다. 그 열정은 곧 붉음으로 가시화되며 곧바로 사랑에 대한 내적 정서로 표출된다. “막무가내로 탄다”는 시적 표현은 그래서 공허하지 않고 돋을새김 되어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처럼 시인은 자연물과 교감하며 밝고 아름다운 서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살아 있는 몸을 통해 지각되고 체험된다. 이렇게 지각이 이루어지는 장, 곧 살아있는 몸을 메를로퐁티는 “현상의 장”이라 한다. 세계가 드러나는 장으로서 살아 있는 몸이야말로 주체성과 객관성이 근원적으로 점착되어 있다. 그래서 메를로퐁티는 주체들은 몸을 통해 서로 만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몸과 그 몸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일상적 삶을 쉽고 친근한 언어로 노래하고 있는 문정희의 몸의 시학은 동백꽃 같이 불타오르던 사랑도, 우리들의 삶도, 결국은 소멸하리라는 시 「동백」에서 한결 잘 묘사된다.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문정희의 시세계가 구가하는 사랑에는 낭만적인 사랑, 지고지순의 사랑과 함께 혈연적인 사랑, 거기에서 모성회귀를 통한 원형회복의 강렬한 자아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한국 전통 서정시에서 볼 수 있는 정한의 사랑과 그리움을 탈피하여 그의 사랑은 적극적이고 때로는 도전적으로 그려진다. 그 대표적인 시가 「전보」이다. 나는 너에게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는 구절이 말해 주듯이, 기다리는 사랑, 짙은 그리움을 지닌 여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저돌적으로 다가서는 힘과 실천이 따르는 남성적 사랑이 그려지고 있다.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축전이 되고 싶다”라는 간단명료한 직설적인 표현으로 일격에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미지의 화려한 변용이 약화되어 있지만 메시지의 강렬성을 보인다. 사랑의 내용이 비극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축하하며 격려하는 놀랍고, 감사한 내용으로 충만한 것이다. 희생이나 기다림이 아닌, 지금 이곳의 사랑과 그 확신에 찬 행동의 사랑은 그의 탁 트인 시학이고, 서정성의 진솔함이며 당당한 감정의 표현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객기와 혈기의 중심에서 보던 삶과 사랑, 세상과 사람은 한결 관조적인 거리두기와 객관적인 시각으로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젊음의 혈기자체를 은유적 방법이나 상징의 기법으로 승화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에 당당해 보이던 문정희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깊은 인생의 성찰을 통한 넉넉한 거리와 평정심을 회복한다. 그것은 찔레꽃의 이미지를 통해 지난날의 아픈 사랑을 회상하면서 사랑의 아픔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찔레」에서 잘 묘출되고 있다. 꿈결처럼 사랑하던 그 사람 먼 여행에서 돌아와 그대 사랑하는 동안 아픔이 출렁거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슬퍼하지 말고 찔레꽃의 가시는 사랑의 아픔을 상징한다. 비록 가시를 품고 있지만 찔레꽃은 봄날 흰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먼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이 홀가분하게 과거를 털어 낼 수 있듯이, 홀가분해져서 사랑의 고뇌와 아픔까지 포함한 “무성한”, 즉 성숙한 사랑이 바로 찔레꽃이다. 조금만 더 다가섰더라면, 즉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투정과 욕망,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는 혈기의 한 고비를 넘기고, 아픔조차 예쁘고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꽃 속에 매달고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은 추억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죽음이나 이별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다. 시인은 상실의 심정이 얼마나 참혹하고 처절한가를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시어를 통하여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문 한번 열지 않고
시는 재치나 감각만으로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다. 시는 삶의 결이 삭고, 우아한 삶의 방법이 보편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면의 치열한 정신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기를 닦으며」는 식기를 닦는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여성으로서 겪는 삶의 고뇌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식기를 닦는다 이 식기를 내가 이렇게 그러나 훗날 어느 두터운 무덤 있어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설움이 아주 절실하게 드러나 있다. 즉 핵심이 되는 일상적인 행위는 식기를 닦는 것, 즉 설거지이다. 설거지는 의미 없이 되풀이 되는 무의미한 일상적인 행위의 전형이다. “천 번을 닦아도 식기인 식기”는 설거지라는 일상적 행위가 갖는 무의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시구이다. 절대 “백자”가 될 리 없는 식기를 닦으며 화자는 젊은 자신이 “닳히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닳히”는 대상에는 젊음 자신의 재능, 열망, 가능성 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내면의 불길을 억누른 채 설거지를 하며 생을 보내는 여성의 모순과 절망이 녹아 있다. 자유와 생명에 대해 치열한 의식은 시인이 시대를 살아가며 빛나는 자유의 혼을 품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 문정희에게 역시 중요한 것은 자유와 생명의 본질이었다. 그는 영원한 비상을 상징하는 날개가 필요했고, 유관순을 통해 그 해답을 얻었다. 그 결과물이 시집 『아우내의 새』(1986)이다. 저항적 삶을 살다간 유관순을 통해 자유를 향한 생명의식을 통찰하고 있다. 풀꽃 하나가 조그만 솜털 손목으로 풀꽃 하나, 그 목숨 바스라져 꺼지지 않는 큰 별로 “풀꽃 하나”인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유관순은 이렇듯 시 속에서, 현재 이화여고 교정에 시비로 우뚝 서 있다. 무엇보다도 후배들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어둡고 서러운 가슴에 별로” 떠 있다. 김수영의 “풀”이 이 땅의 민중이라고 할 때 “풀꽃” 또한 이 땅의 서러운 민중일 수 있다. 16세 무명소녀가 가혹한 형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저항하여 끝내 목숨을 잃은 상징성을 “'풀꽃”에 두고 풀꽃 하나가 세상을 붙들 수 있다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때 유관순은 하나의 풀꽃에 지나지 않은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이 민족 자긍심과 조국수호의 큰 의미로 다가올 때 쓰러지는 나라를 붙들었다는 시적 상상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풀꽃 하나가 모든 자연이고, 생태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자연이고 생태임을 죽음을 통해 일깨워 주는 중요한 시적 매개물이다. 이처럼 근대성을 뛰어 넘는 담론으로서 생태주의는 생명 일반이 겪는 교감과 상호관련의 자연적 시간의식을 지향한다. 다시 말해, 부정적 근대성이 자행한 자아정체성의 상실이나 생태계 파괴에 대한 저지이자 회복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시간의 순환은 바로 그러한 영성과 생명성회복의 뜻이 담지하고 있다. 모든 자연현상이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순환적 시간관이 문정희 시에도 잘 극화되고 있다. 풀벌레나 차라리 씀바귀라도 될 일이다.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서 봄에서 가을로, 낮에서 밤으로 시간은 둥근 원을 그리며 언제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러한 순환구조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신비를 낳는다. 콩의 삶은 봄이 되면 “무심한 밭두렁”에서 “새끼들만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여름을 거쳐 가을이 되면 콩은 누렇게 영글어 간다. 뜨거운 태양 아래 “순결한 비린내”가 가시고 나면 사람들은 콩을 베어다가 마당에서 도리깨로 두드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런 콩알이 마당 여기저기에 뒹군다. 모진 고통을 겪고 자식을 잉태한 다음 어머니는 다시 자연의 품속으로 되돌아간다. “야무진 가을 아이들”도 때가 되면 “흙을 다스리는 여자”가 되고,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여기에는 대지인 자연과 여성을 생명의 모태라는 동일선상에서 인식하려는 생태적 관점이 기반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순환적 시간관은 「돌」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침내 산이 돌을 낳고 돌이 다시 산으로 화하는 윤회적 상상력으로 변주되고 있다. 돌은 비로소 어머니인
생태주의에서 시는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모든 대립을 넘어서서 모두가 함께 생명을 생명으로서만 소중히 여기는 인연공동체 사상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즉 모든 생명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현상 속에 어우러져 있다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정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들이 서로 동등한 생존권을 갖고 있다는 생명 중심의 사유를 바탕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역설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자연 그 자체를 파괴상태로 몰고 간다는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인간의 의식 속에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불평등 관계를 반성케 하고 있다. 모든 동식물이 고유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과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는 평등의식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평등의식은 자연을 노예와 도구로 여기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하는 평등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시인이 인간과 자연은 함께 살아가야 하며 죽음도 함께 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도 여기에 있다. 자연물과 상호교감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서정을 만들어내는 문정희의 참다운 존재 방식은 이렇게 묘출된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시인의 시선에 가득 새떼가 날아오르고 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는 점에서 시간과 순환이라는 세계를 은유한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라는 첫 행부터가 시인의 거시적인 안목과 불교적 상상력을 느끼게 한다. 강물만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상징인 피도 흘러서 하늘로 올라가고, 자연물의 상징인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지상의 많은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화하여 결국은 하늘로 가고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나아가 시인은 소중하고 눈부신 시간들은 “번쩍이는 길이 되어” 흘러가고, “빛으로 포효하며” 오른다고 했다. 시인이 새떼의 날아오름을 보며 얻은 깨달음의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새떼가 비상하는 순간적인 광경에서 존재의 참다운 존재 방식을 읽어내는 시인의 예리한 직관력이 도드라져 보인다. 문정희는 사물에 대한 통찰이나 인식의 깊이를 추구하는데 천착한다. 어느 날 그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쓴 경북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돌부처를 만나 완성에로 나아가려 애쓰는 도정을 보게 된다. 즉 돌로 회귀하는 석불을 통해 본래 ‘비어있는 것’과 ‘가득 차 있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다가서지 마라 정지용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첫 행 “다가서지 마라”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완성의 시간에 티끌이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금지령을 담고 있다. 부처의 감옥에서 자연에로의 회귀, 그보다 더 숭고한 완성과 깨달음은 없을 것이다. 시인은 “눈과 코가 이미 돌아간 석불”은 완성을 꾀하고 있는데, 시 속에서의 완성은 눈과 코가 바르게 새겨진 “부처”가 아님을 통찰한다. 즉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눈과 코가 돌아가고, 돌부처로의 귀환은 완성이 아니라 또 다른 완성을 위한 조건이다. 즉 “석불”이 부처이기를 그만 두고 비바람에 눈과 코가 돌아간 “돌”이 되었을 때 참다운 실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도 말고, 완성이라는 말도 저 멀리 비켜서라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직관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비어있는 것’으로의 회귀를 통해 진정한 ‘완성’을 이룰 수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요컨대 안으로 가는 길도 앞으로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함을 역설하는 문정희는 자연과 인간, 즉 생태와 몸과 언어의 다양성을 파악하고 극복하며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우주질서와 교감하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담지되어 있다. 이는 모든 상처를 껴안아 치유하는 모성(대지)의 여성성(자연성)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시혼의 원동력은 나이테가 늘어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을 간직하는 나무처럼 “울창”하고 투명하게 새로운 자신을 찾아 가는 그의 활발하고 당당한 시적 태도에 있다. 백원기/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