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서거-4] 노무현 영정에 백범 선생이 투영되는 까닭
요즘 내 생각들 2009/05/26 17:04 정운현올해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지 60주기입니다. 백범 서거 당일, 경교장 마당에 엎드려 통곡하는 민중들. 이 사진은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가 서거 당일 경교장 2층 백범 집무실에서 찍은 것으로, 사진 하단에 안두희가 쏜 총알의 탄흔이 선연히 보인다. 24일 오후 장대비를 맞으며 봉하마을 빈소에서 조문하는 추모객들.(출처-오마이뉴스) 24일 밤 임시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 앞에서 촛불을 든 한 추모객이 서울광장을 원천봉쇄한 경찰들 앞에 서있다(출처-오마이뉴스) 경찰이 덕수궁 앞 분향소 주변과 서울광장을 여전히 차벽으로 에워싼 채 '조문 방해'를 하고 있어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출처-오마이뉴스)
다가오는 6월 26일이 60주기 기일입니다.
(* 다같이 이날 효창원 백범 묘소에 참배 갑시다. 같이 가실분?)
그러고 보니 최근 백범 관련 뉴스들이 더러 있었네요.
얼마 전 서울시는 경교장을 완전 복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지난 17일에는 백범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선생이 타계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블로그에서 [기획-백범 60주기]를 연재중입니다.)
요며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관련 글을 몇 줄 쓰면서,
어제 문득 노 전 대통령 영정에 백범 선생이 겹쳐지더군요.
근래 두 분에게 집중하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지만,
제게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아래의 사진 한 장 때문인데요,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1. 경교장-봉하마을의 '통곡의 조문'
1949년 6월 26일 오전 11시경, 안두희가 백범 면회를 왔습니다.
선우진 비서는 앞서온 손님이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손님이 나오자 선우 비서는 안두희를 2층으로 데려가 백범에게 안내했습니다.
그리고는 선우 비서는 백범의 점심을 챙기러 지하식당에 잠시 내려갔습니다.
12시 40분경, 위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뛰어 올라갔더니
백범은 안두희의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습니다.
당시 백범의 피격, 서거는 순식간에 발생했으며,
현장에서 즉사한 탓에 외부로 시신을 이송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백범이 서거했다는 소문이 어떻게 퍼져 나갔는지,
경교장 앞마당에는 어느새 시민들이 모여들어 엎드려 통곡하였습니다.
이건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한낱 '전설'이 아닙니다.
서거 당일 경교장으로 달려간 한 외신기자가 찍은 위의 사진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모습도 비슷해 보입니다.
봉하마을이나 덕수궁 앞 분향소엔 연일 ‘통곡’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장대비를 다 맞아가면서 한 ‘눈물의 조문’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건 누가 이리 하라고 시켜서 되는 일은 절대 아니지요.
제 마음에서 우러나고, 제 마음에서 동의해야 가능한 것이지요.
이들의 눈물 속에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회한 같은 것도 뒤섞여 있다고 봅니다.
2. '판박이' 같은 경찰의 조문 방해
백범 서거 때나 이번 경우에나 비슷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경찰의 ‘조문 방해’입니다.
백범 서거 당시 경찰은 시민들의 경교장 조문을 극심하게 방해했습니다.
심지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문객들의 차량을 중도에서 막기도 했습니다.
또 효창원에서 열린 장례식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대다수 한국인들은 지도자를 잃은 상심에 눈물로 추모를 하는데,
이들의 조문을 방해하는 걸로 봐, 그 경찰들은 한국인이 아닌 모양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 경찰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불과 1년 전에는 국가원수였고, 국민 대다수가 그의 비극적 죽음을 슬퍼하는데,
고작 이들이 하는 행위라는 게 주권자인 시민들의 조문 방해라니요.
서울에서 천리 떨어진 봉하마을이야 그들이 손을 쓸 수 없었겠지요.
만만한 덕수궁 대한문 앞 임시 분향소를 전경차로 둘러싸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순수한 분향조차 방해하였다는 보도를 곳곳에서 봤습니다.
한 경찰 간부는 “전경차로 둘러싸니 포근하다는 사람도 있더라” 했다는군요.
정직하지 못한, 도덕적이지 못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백범 서거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극도로 민심을 두려워하여 그랬습니다.
그래서 백범 빈소 조문을 통제했고, 경찰들은 그 '개노릇'을 한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지금 상황이 그 때와 비슷한 거 아닙니까?(반론 펼 분은 펴보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시민들의 순수한 조문을 이리도 방해할 리가 있습니까?
서울시민 수 천, 수 만명이 늦은 밤 덕수궁 담벼락 밑에서 조문을 기다리고 있었건만,
오세훈 서울시장은커녕 이들에게 차 한잔 권하는 시청공무원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놓고도 이들이 시민의 세금으로 월급받는 서울시청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국민들도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비리에 대해서는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검찰수사가 적정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회초리 세 대 맞을 짓을 한 사람에게 곤장 100대를 치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노통’에 대한 검찰수사가 정당하고, 적정했다면 조문행렬이 왜 이리도 길까요?
그들이 전부 '노빠'가 아닐 진대 ‘촛불집회’로 이어질 가능성을 왜 미리 겁냅니까?
수사가 적정했다면 오히려 법치주의를 바로 세웠다며 검찰에 박수가 쏟아졌겠죠?
(* 집에 와서 9시 뉴스를 보니 덕수궁 분향소 쪽 경찰차는 철수했고, 서울광장 쪽은 그대로랍니다)
3. 국민적 존경, 사랑 받는 '서민출신' 지도자
백범 김구 주석과 노무현 대통령.
두 분은 우선 둥글둥글한 외모가 많이 닮았습니다.
또 전형적인 서민의 풍모인데요, 실지로 모두 서민 출신이기도 합니다.
긴 설명 할 것 없이 아래 사진을 보고 비교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백범은 1876년 황해도 해주의 몰락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노무현은 1946년 경남 김해(진영)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백범은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일본군 중위를 때려죽이고 감옥을 갔고,
인권변호사 노무현은 대우조선사태 때 ‘제3자 개입’으로 감옥을 갔다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다 감옥가지 않았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백범은 이후 고향에서 교육 사업을 하다가 1919년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여
해방 후 환국할 때까지 70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 바쳤습니다.
중국 땅에서 모친, 아내, 장남을 잃었고, 그 역시 동지의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노무현은 ‘상고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불과 7개월 만에 판사를 그만두고
이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동현장과 시국사건을 도맡아 변호하였습니다.
정치인에 되어서는 손해를 봐가면서도 낡은 정치 타파를 위해 온힘을 쏟았습니다.
김구 선생의 호 백범(白凡)은 그 스스로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를 따서 지었다면,
노무현의 별호(別號)인 ‘노짱’과 ‘바보 노무현’은 지지자들로부터 선물받은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평범한 서민 가문에서 태어나 일생을 민중들과 함께 뒹굴며 살았습니다.
두 사람 각각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최고책임자를 지냈는데요,
역대 국정 최고책임자들 가운데 이 두 사람이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건
바로 그들의 ‘희생적 삶’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범 선생의 60주기를 앞두고 선생의 애국적 삶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지난 23일 비운의 삶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첫댓글 두분서계시는모습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