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은혜는 여기까지만 ‘어제는 그의 차례, 오늘은 네 차례(mihi heri, et tibi hodie).’ 장례 미사 때 관을 덮는 포에 크게 쓰여 있는 라틴어 문구다. 집회서 38장 21절에서 22절의 말씀을 요약한 경구(警句) 같은 거다.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너는 죽은 이를 돕지 못하고 너 자신만 상하게 할 뿐이다.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그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 38-21-22).”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말씀이 위협처럼 느껴지는 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한다. 삶이 수학 공식이나 물리 법칙처럼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 목적이 정해진 게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지금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진리인 하느님께로 가는 순례 중이다. 비록 선한 사람은 잘 되고, 악한 사람은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바람이 너무 자주 무너져서 선하신 하느님이 계시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이 또한 내가 지나가야 할 순례길의 하나이다. 전쟁과 재난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받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현실 안에서도 참 좋으신 하느님을 믿고 사람이 되셨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른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현세의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믿었다. 태어나면서 앞을 못 보는 이를 두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쭸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그러나 예수님 생각은 달랐다. 회개하지 않으면 현세에서 벌을 받고 회개하면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 그런 봉변을 당한 게 아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렇게 끝나게 된다(루카 13,3.5.).
선한 이들이 고통받고 악한 이들이 더 잘 사는 거 같은 이 현실을 설명할 재주가 없다. 정의로운 하느님은 왜 잠자코 계시는지 답답하다. 어느 가수가 소리 높여 노래했던 거처럼 이 땅으로 내려와서 조율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질서한 이 땅을 조율하는 대신 기회를 주신다.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무화과나무 주위를 파고 거름을 주신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는 그분도 그 나무를 잘라버리실 거다(루카 13,9). 회개는 땅의 것이고, 그를 위해 은혜가 한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은혜는 딱 여기까지다. 그 강을 건너면 회개할 기회도 영원할 것 같은 은혜도 주어지지 않는다.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나의 차례다.
예수님, 한 유명 여배우가 밤새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나고 죽는 건 우연 같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이상 하느님을 알고 찾아가는 건 필연입니다. 저를 포기하지 마시고 여기서 사는 동안, 아니 마지막 순간에도 기회를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혼란과 시련 그리고 무관심 속에서 제 신앙을 지켜주시고 아드님이 가시는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