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민심서 애민(愛民) 제3조 진궁(振窮)
2. 과년(過年)하도록 혼인을 못 하는 자는 관에서 성혼시키도록 해야 한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명을 내렸다.
“여자 17세에 시집가지 않고 남자 20세에 장가들지 않으면 그 부모에게 죄가 있다.” - 〈월어(越語)(주1)〉에 나온다. -
한 혜제(漢惠帝) 6년에 영을 내렸다.
“민간의 여자로 나이 30이 되도록 시집보내지 않으면 벌로 5산(算) - 1산(算)은 120전이다. - 을 물린다.”
옛날에는 30세에 아내를 갖고, 20세에 시집간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나이를 넘어서는 안 되는 큰 한계이다. 그러나 남자는 25세로 큰 한계를 정할 것이요, 여기에 구애할 필요는 없다.
임연(任延)(주2)이 구진 태수(九眞太守)가 되었는데, 그곳의 백성들은 시집가고 장가드는 풍속이 없었다. 여자들에게는 일정한 상대가 없어서 아이를 낳아도 성을 알 길이 없었다. 임연은 남자의 나이 20에서 50까지, 여자의 나이 15에서 40까지 모두 나이에 따라서 서로 배필로 삼아 주고 그 중에서 가난하여 예로써 맞이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장리(長吏)들로 하여금 자기 봉록을 덜어서 도와주도록 하니 동시에 결혼한 자가 2천 집이나 되었고, 이 해에 풍우가 순조로워 농사가 큰 풍년이 들었다. - 《후한서(後漢書)》 -
유중영(柳仲郢)(주3)이 벼슬살이할 때 장리(贓吏)(주4)는 용서하지 않았으되, 경내에 어버이 없고 가난한 벼슬하던 집안의 딸로서 시집갈 나이가 된 이가 있으면, 모두 사윗감을 골라 자기 봉급을 덜어서 혼수를 마련하여 시집보내 주었다.
공규(孔戣)(주5)가 광주 자사(廣州刺史)로 있을 적에, 시집 갈 나이가 된 여자들에게는 돈을 주어 혼기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내한(內翰) 심문통(沈文通)(주6)이 항주(杭州)를 다스릴 적에,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사람이나 부모 없는 처녀로서 시집갈 수 없는 자에게는 공사전(公使錢)(주7)으로 수백 명이나 시집보내 주었다.
조 청헌공(趙淸獻公)(주8)이 벼슬살이할 때, 부모 없는 처녀 20여 명을 시집보내 주었다.
왕질(王質)(주9)이 형남(荊南)을 임시로 맡았을 때에, 고을 백성 가운데 혼인에 관한 송사가 있었는데, 호소하기를,
“가난하여 혼사 비용이 없어서 기한을 미룬 것입니다.”
하므로, 그 비용이 얼마인가를 묻고는 봉급에서 나누어 주어 혼사를 치르도록 하였다.
함녕(咸寧) 사람 옹태(雍泰)(주10)공이 양회(兩淮) 지방의 순염 어사(巡鹽御史)로 있을 때, 소금 굽는 사람으로 가난한 홀아비가 거의 2천 명이나 되었는데, 2년 동안에 모두 처자를 갖게 해주었다. 그가 떠난 뒤에 회주(淮州) 사람들이 노래로 읊기를,
손의 전대 속에는 벼루조차 없건만 / 客邊檢橐渾無硯
바닷가 남은 백성 처자식 있도다 / 海上遺民盡有家
하고, 또 읊었다.
4천 남녀의 원 풀어 주고 / 了却四千男女願
춘풍에 닻줄 풀고 조정에 들어간다 / 春風解纜去朝天
양계종(楊繼宗)(주11)이 수주 지사(秀州知事)로 있을 적에, 어느 부자 백성의 사윗감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여, 혼인을 그만둘 것을 고하여 왔다. 양계종은 부자 백성에게 금 2백 근을 내게 하고 따로 다른 사위 고를 것을 허락하였다. 얼마 후에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것을 네 사위에게 주어 가업(家業)을 이루게 하였으니, 네 딸은 이제 시집갈 곳을 얻게 되었다.”
하고 그날로 성혼하도록 하였다.
동강(東岡) 이곤(李昆)(주12)이 감숙(甘肅) 지방을 순무(巡撫)하는데, 그 지방이 오랑캐와 가까워서 혼인에 재물을 논하는 일이 많았다. 군인들로서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한 자를 이곤이 각 위(衛)에서 천여 명이나 조사해 내어 헤아려 은(銀)과 포목(布木)을 주어 도와주었다. 후에 공이 돌아가게 되자, 전송하는 자들이 처자들을 데리고 길에 엎드려 울었는데, 모두가 옛날 짝지어 준 사람들이었다.
이시현(李時顯)(주13)이 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 있을 적에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가는 사람이 있으면 관에서 혼수를 마련해 주어 때를 잃지 않게 해 주었다.
[역주]
[주-D001] 월어(越語)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의 편명. 상(上)ㆍ하(下)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주-D002] 임연(任延) : 후한(後漢) 때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장손(長孫)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이 뛰어나 ‘임성동(任聖童)’이라 일컬어졌다. 광무제(光武帝) 초기에 구진 태수(九眞太守)가 되어 많은 선정을 베풀어 구진 사람들에 의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고, 그 후에도 무위 태수(武威太守)ㆍ영천 태수(潁川太守)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任延》
[주-D003] 유중영(柳仲郢) :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유몽(諭蒙)이다. 벼슬이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고 하동현남(河東縣男)에 봉해졌으며, 의종(懿宗) 때에 천평절도사(天平節度使)를 지냈다. 《唐書 卷163 柳仲郢列傳》
[주-D004] 장리(贓吏) :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취득한 관리, 또는 뇌물을 받은 관리를 가리킨다.
[주-D005] 공규(孔戣) :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군엄(君嚴), 시호는 정(貞)이다. 일찍이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로 있으면서 크게 선정을 베풀었고, 뒤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치사하였다. 《唐書 卷163 孔戣傳》
[주-D006] 심문통(沈文通) : 송(宋)나라 전당(錢塘) 사람으로 이름은 구(遘), 호는 서계(西溪), 문통(文通)은 그의 자이다. 인종(仁宗) 때 진사에 합격한 후, 강녕부 통판(江寧府通判)ㆍ집현교리(集賢校理) 등 요직을 역임하고, 월주(越州)ㆍ항주(杭州) 등의 지주(知州)를 지내면서 크게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중외에 매우 자자하였으며,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저서에 《서계집(西溪集)》이 있다. 《宋史 卷331 沈遘列傳》 내한(內翰)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별칭으로 심구(沈遘)가 한림학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07] 공사전(公使錢) : 공비(公費)와 같은 말인데, 《송사(宋史)》 〈심구열전(沈遘列傳)〉에 의하면 ‘공전(公錢)’으로 되어 있다.
[주-D008] 조 청헌공(趙淸獻公) : 송나라 구주(衢州) 서안(西安) 사람으로 이름은 변(抃), 자는 열도(閱道), 호는 지비자(知非子), 청헌(淸獻)은 그의 시호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인종(仁宗)ㆍ신종(神宗) 대에 걸쳐 여러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다. 강직하기로 유명하였고, 특히 여러 지방의 지주(知州)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의 전찬(傳贊)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들의 딸 10여 명과 다른 처녀 20여 명을 시집보내 주었다고 하였다. 저서에는 《조청헌집(趙淸獻集)》이 있다. 《宋史 卷315 趙抃列傳》
[주-D009] 왕질(王質) : 송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야(子野)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집현교리(集賢校理) 등을 거쳐 여러 지방관을 지내면서 치적을 올렸고, 특히 강릉부섭사(江陵府攝事 강릉부는 곧 형남(荊南)인 형주(荊州)이다)로 있을 때는, 사전(私錢)을 털어 그 지방의 가난한 백성의 혼비(婚費)를 대 주기까지 하였다. 《宋史 卷269 王質列傳》 《昨非菴日纂 宦澤》 참조.
[주-D010] 옹태(雍泰) : 명(明)나라 함녕(咸寧) 사람으로 자는 세륭(世隆), 시호는 단혜(端惠)이다. 헌종(憲宗) 연간에 진사에 합격한 후, 오현지현(吳縣知縣)을 거쳐 양회(兩淮)의 순염 어사(巡鹽御史)로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고,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쳐 남경 호부상서(南京戶部尙書)에 이르렀다. 《明史 卷186 雍泰列傳》 《昨非菴日纂 宦澤》 참조.
[주-D011] 양계종(楊繼宗) : 명나라 양성(陽城) 사람으로 자는 승방(承芳),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영종(英宗) 때 진사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헌종(憲宗) 초기에 수주부 지사(秀州府知事)로 있으면서 사학(社學)을 일으켜 문교(文敎)를 크게 진흥시키는 등 여러 가지로 많은 치적을 올렸고, 효종(孝宗) 때에 첨도어사(僉都御史)ㆍ순무운남(巡撫雲南) 등을 역임하였다. 청렴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明史 卷159 楊繼宗列傳》
[주-D012] 이곤(李昆) : 명나라 고밀(高密) 사람으로 자는 승유(承裕)이다. 효종(孝宗) 초기에 진사급제한 후, 예부 주사(禮部主事) 등을 거쳐 무종(武宗) 때에 섬서좌포정사(陝西左布政使)ㆍ우부도어사 순무감숙(右副都御史巡撫甘肅)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고, 세종(世宗) 때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극간(極諫)으로 유명했다. 《明史 卷185 李昆列傳》
[주-D013] 이시현(李時顯) : 1622~? 자는 사영(士榮),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일찍이 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 있으면서 크게 치적을 올렸고, 뒤에 성주(星州)ㆍ공주(公州)의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過歲不婚娶者。官宜成之。
越王句踐令曰。女子十七不嫁。丈夫二十不娶。其父母有罪。出越語。
〇漢惠帝六年。令曰。民女子三十不嫁。罰五算。一算之錢百二十。
〇古者。三十而有室。二十而嫁。斯蓋不得過之大限。然男子宜以二十五爲大限。不必拘也。
任延爲九眞守。民無嫁娶之俗。女無適對。生不識姓。延使男年二十至五十。女年十五至四十。皆年齒相配。其貧無禮聘。令長吏省俸助之。同時相娶二千家。是歲風雨順節。穀稼豐衍。後漢書。
柳仲郢在官。不貸贓吏。境內有孤貧。衣纓家女及筓者。皆爲選壻。出俸金。爲資裝嫁之。
孔戣爲廣州刺史。女子可嫁者。與之錢財。令無失時。
沈內翰文通治杭州。有貧不能葬及女子孤無以嫁者。以公使錢。嫁數百人。
〇趙淸獻公在官。爲人嫁孤女二十餘人。
王質權知荊南。府民有訟婚者。訴曰。貧無貲故後期。問其用幾何。以俸錢與之。使婚。
咸寧雍公泰巡鹽兩淮。見竈丁貧而鰥者。幾二千人。比及二年。具與完室。旣去。淮人詠曰。客邊檢橐渾無硯。海上遺民盡有家。又曰。了却四千兒女願。春風解纜去朝天。
楊繼宗知秀州。富民有患壻貧告停婚者。繼宗責富民。輸二百金。聽別擇壻。旣語之曰。我以此付爾壻立家。爾女得所矣。令卽日成婚。
東岡李昆撫甘肅。地邊夷。婚多論財。軍貧未娶者。公査各衛。得千餘人。量給銀布助之。後公還。送者携妻孥伏道而泣。皆昔之獲配者。
李時顯爲鴻山縣監。有貧不能嫁者。官爲具資。使毋失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