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자박의 현실정치와 인류 파멸의 정치
현대 유럽 국가체제의 대표 두 혁명가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주저하는 혁명가 ‘나폴레옹 3세’는 대중 관계에 맞추려는 정책 추세에 대변했고, 보수주의 혁명가인 ‘비스마르크’는 권력의 분석과 동일시하는 추세를 반영했다. 능력보다 야심이 더 큰 게, 나폴레옹 3세의 비극이고, 국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능력이 큰 것이 비스마르크의 비극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전략적으로 마비된 상황을 프랑스에 유산으로 남겼다. 비스마르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위대함을 독일에 유산으로 남겼다.
힘과 국익의 계산에 기반한 외교정책인 현실정치로 독일이 통일되었다. 통일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10년마다 더욱 강력해졌고, 유럽 외교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지리적 요인으로 해결하기엔 불가능한 딜레마가 있었다. 독일은 유럽의 중앙에 있어서, 자신을 포위한 연합체에 직면한 위험이 있었다. 즉 프랑스와 독일 간에는 원한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는 적개심이 커졌다. 독일은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무게중심을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옮겨달라고 오스트리아에 요구하고 관철했다. 독일에서 축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을 제외하면 뻗어나갈 곳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이 상식이 있다면 발칸반도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거나 러시아를 영원히 적으로 돌리지 않도록 조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빈’은 상식적이지 못했다.
‘빈’ 회의가 개최되었던 시기에 러시아는 확실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러시아의 가장 독특한 특징을 꼽으라면 모순이다. 러시아는 항상 전쟁하고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도 자신이 항상 위협받고 있다고 여겼다. 러시아는 다언어 국가가 될수록 다양한 민족들을 주변국들로부터 고립시켜야 했기 때문에 더 취약해졌다고 느꼈다. 미국인들처럼 러시아인들도 자신을 예외적인 나라라고 간주했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명백한 운명”을 설명하는 방식과 유사했다.
1881년 새로운 차르 ‘알렉산드로 3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등극했다. 그는 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처럼 보수주의 이념에 제약받지 않았고, 아버지 ‘알렉산드로 2세’처럼 늙은 독일 황제에 대한 애정도 없었다. 나태하고 독재적인 ‘알렉산드로 3세’는 비스마르크를 불신하고 그의 황후는 덴마크 출신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빼앗아 간 비스마르크를 용서할 수 없었다. 1890년이 되자 세력균형이라는 개념은 잠재력이 종말에 다다랐다. 세력균형은 보편적인 제국에 대한, 중세시대의 열망의 잿더미 속에서 수많은 국가가 등장함에 따라 필요해진 개념이다. 18세기에 국가 이성의 필연적인 결과는 지배적인 국가의 등장과 유럽 제국의 부활을 막는 게 주된 기능인 빈번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세력균형이 보존한 것은 국가들의 자유였지 유럽의 평화가 아니었다.
독일의 ‘빌헬름 1세’가 1888년 사망한 뒤 아들인 ‘프리드리히’는 고작 98일 통치하다가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빌헬름 2세’는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군주로 미흡하여 불안감을 주었고, 그는 기형적인 팔을 갖고 태어났다. 젊은 황제는 늙은 거목인 ‘비스마르크’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그를 해임해 버렸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로 3세’는 왕족 생활을 원하는 귀족적 관념과 자주 충돌하여 정책 결정이 복잡해졌다. 외교적 중요시기에 수도를 비운 채 4달이나 요트를 타고 왕비의 친정인 덴마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1917년까지 통치했던 ‘니콜라이 2세’는 일본에, 재난에 가까운 전쟁에 패했고, 독일과도 필연적인 전쟁을 하는 동맹에 얽매이게 된다. 1910년 무렵 러시아는 민족주의자, 심지어 테러주의자,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전면전 위험을 걱정하지 않는 분파주의자들로 득실거리는 세르비아와 손을 잡았다.
1908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둘러싼 국제 위기가 발생한다. 이 지역은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 이슬람이 자리를 잡고,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모슬렘이 살고 있던,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의 중간 지대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가였던 적도 없었고 자치 정부도 없던 곳이다. 러일전쟁으로 약함을 러시아가 증명되자 오스트리아는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르비아’를 한 방 먹이려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다. 그러자 이 지역이 가마솥처럼 달궈진다.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망각했다.
1914년이 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한편으로 하고 삼국협상을 하는 다른 편이 극도로 대립한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로 3세는 지금 전개되는 상황이 엄청난 판돈이 걸려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벨기에가 침공당하면 영국이 반드시 참전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나 독일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듯했다. 독일이 승리하면 러시아 경제가 파멸할 것이고, 러시아가 승리하면 독일 경제가 고갈된다. 어느 쪽이 승리해도 전쟁 배상금을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없다.
합스부르크 황가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1908년 병합한 대가를 자신의 목숨으로 지불했다. 젊은 테러리스트는 첫 번째 암살 시도에 실패하고 대신 차량 운전사가 부상했다. 총독 관저에 도착한 황태자는 관리의 태만을 질책하고, 아내를 동행하고 부상자가 있는 병원을 방문하기 위해 새로운 운전기사로 교체하여 병원으로 가던 중 길을 잘 모르는 운전기사가 후진하던 중, 길가 카페에서 독주를 마시면 분노하던 암살자 앞에 차가 멈추었다. 천우신조로 황태자 등장하자 암살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돌발적으로 시작된 도화선은 오스트리아가 불을 붙이는 상황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났을 때, 2,000만 명이 죽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소멸했다. 전쟁에 참전한 4개 왕조-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가 타도되었다. 영국 왕실만 명맥을 유지했다.
1918년 11월 1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독일과 연합국 간 휴전협정이 서명되었다고 선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형적인 왕실 간 전쟁으로 시작했다. 서류가 대사관에서 대사관으로 전달되었고, 실제 전투로 이어지는 모든 중요한 단계마다 전보가 각국 군주들에게 배포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선포되자 유럽 각국 수도의 길거리가 환호하는 군중으로 뒤덮이면서 전쟁은 더 이상 각국 대사관 간의 충돌이 아니라 군중들의 투쟁으로 바뀌었다. 전쟁 발발한 지 2년이 지나자, 각국은 균형상태라는 관념과 전혀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 전쟁의 초기에 두드러졌던 열정은 유럽 대중들이 그들의 정부가 대학살을 초래했지, 평화한 승리를 달성할 능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그라졌다. 그 결과 신성동맹 시절에 단결하면서 유럽의 평화를 유지했던 동방의 왕실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도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사라졌다. 러시아 제국도 ‘볼셰비키’들에서 접수되었고 소련 혁명 이후 20년간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독일은 패전, 혁명, 인플레이션, 경제 공황, 그리고 독재정치를 잇달아 겪으면서 뒤틀렸다. 프랑스와 영국은 적국들이 약화하였지만,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다. 이들은 전쟁 이전보다 오히려 적국을 지정학적으로 더 강하게 만든 평화의 대가로 자신들의 청년 세대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희생시켰다.
유럽이 자초했던 엄청난 대실패가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기도 전에, 그때까지 유럽의 협조로 불렸던 체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끝내고자 새로운 참가자가 무대에 등장했다. 폐허와 3년 동안 지속했던 살육에 대한 환멸 속에서 미국이 자신감과 권력, 그리고 완전히 지쳐버린 유럽 동맹국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주의를 들고 국제무대에 등장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01.14.
HENRY KISSINGER – DIPLOMACY-2
헨리 키신저 지음
김성훈 옮김
김앤김북스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