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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31
1월10일[연중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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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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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IFcpV3tOPY
[수원교구 조봉익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중견사제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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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망과 미움 대신 감사와 찬양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 표현에 따르면,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답니다. 그래서 그간의 정황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답니다.
그 부인의 사정! 이라는 표현을 묵상하면서 속으로 좀 웃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은 다름 아닌 사위 시몬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멀쩡하던 사위 시몬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란 사람에게 잔뜩 매료되어,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어 버린 딸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올랐던 것입니다.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가출하다시피한 사위 시몬, 그런 상황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결국 열병을 앓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의 마음 속을 환히 꿰뚫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그런 마음 상태를 어찌 모르셨겠습니까? 미안한 마음, 송구한 마음을 담아 장모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마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장모님! 죄송합니다. 널리 이해해주세요.” 그러면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니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주님 뜻에 맞게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노고와 땀방울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자상함과 부드러움 앞에 부인의 굳게 닫혀있는 영혼의 물꼬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꽉 막혀있던 흐름이 열리니 그간의 분노와 걱정, 원망과 화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이제 일말의 미움이나 적개심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예수님 일행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친히 아파 드러 누워있는 시몬 장모의 침상으로 다가오십니다. 말씀 한마디로 가능한 일일터인데, 황공하게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누워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거룩한 호의입니까?
그 찰라같은 순간에 시몬 장모는 열이 가시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딸이 뒷전이 된 것에 대한 원망도, 사위를 강탈당한 것에 대한 미운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현존 앞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도 친히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자상하고 친절하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 앞에 우리가 앓고 있는 모든 영적·육적 질병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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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UdjDQrCF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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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패턴으로 분류한 인간의 세 부류>
세상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를 쉽게 꺾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사람이 우유부단하게 되는 이유는 선과 악의 중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세븐’(1995)에 브래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연쇄 살인범을 쫓는 두 명의 형사로 출연합니다. 이 살인자는 일곱 가지 대죄(탐욕, 시기, 나태, 분노, 폭식, 교만, 색욕)를 작전 방식으로 사용하여 정교하고 상징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어둡고 분위기 있는 배경과 강렬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라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브래드 피트는 연쇄 살인범을 사살합니다. 그것이 범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쇄 살인범 존은 일곱 가지 대죄를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그의 궁극적인 계획은 형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지막 두 가지 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존은 브래드 피트가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누리는 평범한 삶에 대한 질투를 인정함으로써 질투의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분노에 빠지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바로 임신한 그의 아내의 머리를 보여줌으로써. 마지막 순간에 브레드 피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갈등합니다. 그는 법 집행관의 의무와 복수에 대한 압도적인 열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그의 파트너 모건 프리먼이 그를 진정시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와 슬픔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분노의 화신이 되어 살인자를 사살하고 일곱 가지 대죄를 모두 대표하는 살인자의 뒤틀린 비전을 완성합니다.
이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가끔 그러한 상황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상황에서 좋지 못한 선택을 합니다.
그러면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좋을까요? 어떤 사람이 무엇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리옷 유다도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히틀러도 뭔가 확신을 하고 독일을 선동하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차라리 이런 이들보다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낫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아주 큰 악행은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확신은 ‘영’에서 옵니다. 영이 믿음을 줍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세상에 악을 행하게 만드는 확신은 악령에 의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통쾌한 복수극이라고 보일 수 있겠지만,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다 좋은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의롭고 금자 씨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목사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너나 잘하세요!” 누구도 그녀의 확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13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진정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런 확신은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새벽에 혼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을 가차 없이 떠나십니다.
기도는 분명 ‘확신’을 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기도하면 항상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하게 합니다.
1956년에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 정글로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전부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요? 복수를 계획했을까요? 그들은 분명 기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 선교사 중 일부, 특히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어린 딸 발레리와 함께 화오라니족과 함께 살기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한 짐 엘리엇과 함께 죽은 네이트 새인트의 여동생 레이첼 세인트(Rachel Saint)도 오빠가 하려던 선교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그 부족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많은 선교사와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선택을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분명 기도로 응답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혼자 생각만으로는 어둠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는 ‘복음을 전하려는 확신’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기도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혹은 분심만 하다 끝났는지를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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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식당에서 조기구이를 먹었습니다. 큰 가시는 조심해서 버리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가시 하나가 걸렸습니다. 껌을 씹고, 양치질해서 없어졌지만, 순간 당황했습니다.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냉담하는 분들이 무슨 큰 이유가 있어서, 큰 사건이 있어서 냉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냉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한 주 미사에 빠졌는데 그다음부터 주일 미사에 빠지는 분도 있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오는 분이 사정이 생겨서 한 주 같이 오지 못했는데 그다음부터 주일 미사에 빠지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악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고, 선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여라.” 오늘 독서에서 엘리는 사무엘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든 이렇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엘리의 말을 들은 사무엘은 이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교육(敎育)이라는 말은 가르치고 육성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찾아온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2명의 제자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치고 육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느님 나라의 지식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희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표징을 보여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겸손하셨고,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육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전하면서 본인들은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였지만 본인들은 십자가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교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말하면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데 율법과 계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시고, 눈먼 이는 눈을 뜨게 해주시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십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재촉하십니다.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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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몬의 장모와 비슷한 상태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옆에 와 계신다. 아파서 누워있는 우리의 침대 옆에 이미 와 계시다. 그분께서 와 계신데도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분은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시몬의 장모는 침대에 누워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고, 그분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자비로우신 의사께서 그 침대 곁으로 가셨다.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셨던 그분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당신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주셨다. 당신 손으로 그 여인을 고쳐 주셨다.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어 우리를 깨끗이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항상 기도하셨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다. 우리도 늘 기도하면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38절)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구석구석에 빛을 비춘다. 그분의 구원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해당하며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 빛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하는 빛이기에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면 그 빛을 우리도 전하는 도구가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랑과 감사로 응답을 드리지 않는다면 비극적인 잘못이 되어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기억되고 사랑받으시고 찬미와 감사를 받아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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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주도적인 구실을 한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사람들은 시몬의 장모를 위하여 예수님께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한 모든 이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말씀도 함께 살펴볼까요?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 전까지,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그를 부르기만 하십니다. ‘듣는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비로소 우리와 대화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살아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하여 예수님께 ‘이야기’하고,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은 이웃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떠한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내 이야기만 늘어놓는 기도, 이웃을 향한 마음은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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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병마(病魔)>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29-34)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마귀들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시키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30절의 ‘사람들’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예수님과 함께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고, 또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마르 1,23-28)
예수님께서 안식일 예배 후에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표현만 보면,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예수님께서는 ‘수동적으로’ 고쳐 주신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회당에서의 상황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마귀를 쫓아내셨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반응을 보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은(마르 1,25), 누가 간청하지도 않은 일, 즉 당신이 먼저 보시고 하신 일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이 섞여 있는데, 그 두 가지 일은 실제로는 하나의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병마(病魔)’를 쫓아내신 일입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도 마귀를 쫓아내신 일에 포함됩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4,39) ‘열’을 일으키는 마귀를 꾸짖어서 쫓아내심으로써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그것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즉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쫓겨난 다음에도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하는 짓을 하지 못하게 막으신 것입니다. <사실상 마귀들의 모든 활동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마귀들이 당신에 대해서 아는 척하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존재이기 때문에,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일에 대해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은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고, 마귀를 잘 쫓아내시는 분이라는 소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병 고치는 실력’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몇 명 정도는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을 고친 다음에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은,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시고 그냥 카파르나움에 머물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시라고 붙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없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 선포’ 라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그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물론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도 복음 선포에 속하는 일이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준 일이긴 한데, 그 일 자체가 예수님 활동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중병에 걸렸을 때, 주님이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치유’는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그것으로 멈춘다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루카 17,17) 치유의 은총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간에, 우리는 ‘몸의 치유’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고, ‘영혼의 구원’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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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의 하루 일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하루일과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낮 동안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나와서 시몬이 집에 갑니다. 가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줍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자 많은 병든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줍니다. 다음날 새벽에는 외딴곳에 가서 기도를 드립니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그 기도의 힘으로 많은 활동을 하시는 모습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참 열정으로 살아가셨구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지닌 열정적인 모습과 삶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하는 공생활이 불과 3년밖에 안 되기에 그렇게 삶에 애착을 갖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고 치유해주는 그 모습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이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다른 이웃 고을에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지금보다는 불타는 이 열망이 사그라지지 않을까?… 좀 더 사제 생활의 연륜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여유로움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더 나이를 먹으면, 지금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서 이러저런 활동보다 성당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엊그제 신학교 영성 면담 신부님과 전화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참 어리석은 망상이었음을…… 그저 저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신학교 때처럼…… 진정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야고보야, 기도도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거란다. 나이가 많이 들면, 좀 더 기도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고, 더 예수님을 향하여 살아가리라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단다. 물론 젊을 때가 더 유혹도 많고, 시련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젊을 때 기도하고, 열심히 해야지, 막상 늙어 버리면 기도하기가 쉽지 않단다. 기도 역시 힘이 있어야 30분, 1시간, 또는 그 이상 할 수 있지, 늙어 힘이 없으면, 기도하기보다는 더 많이, 더 자주 쉬고만 싶어진단다. 그래서 야고보도, 젊을 때 기도를 많이 하거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내일, 미래는 지금, 오늘의 모여 이루어진 결실입니다. 때문에, 오늘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내일, 미래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늘, 지금 일을 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결코 미래에 먼 훗날에 일할 수 없고, 공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 늘 많은 욕망에 안절부절못함에도… 늘 기도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힘들어 하면서도, 이를 이겨내기 위해 더 자주 많이 기도하기보다는… 그저 단순히 먼 훗날에, 좀 더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면 사그라지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라는 그릇되고 안일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지금 하지 않는 것은 결코 내일, 먼 훗날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문에, 지금, 현재의 삶에 좀 힘들어한다 해도,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좀 더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행하는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성인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좋은 말씀이 있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일이 두렵지 않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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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으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도 다급했기에 잠자리조차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엇박자를 일으키는 일이 여기에서도 엿보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놀라운 치유를 체험했으니 감사하는 마음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을 것이고,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는 말씀을 들려주는 그분 곁에 머물면서 오래오래 그 좋은 말씀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전해 주러 예수님을 찾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여행이 너무 힘드니 좀 쉬었다 갑시다.’ ‘사람들의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뭐 이런 게 아닐까요?
복음의 문맥을 보면 원인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일찍부터 외딴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몰려드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에 단잠을 깨자마자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일어나자마자 일단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합시다.
그래야 허둥대며 세속적인 관심사에 휩쓸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먼저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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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1,34)
요즘은 여러 과일도 그렇지만 채소도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시절時節을 앞서갑니다. 그로 인해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때가 되면, 저는 묵고 삭은 김장 김치보다 봄동 겉절이를 더 좋아하기에, 봄동 겉절이가 나오는 날은 제 눈과 혀가 분주합니다. 그리고 마음 또한 호사를 누립니다. 그런데 이 봄동에 관해서 어느 스님이 참 맛깔스럽게 표현했더군요. 그 스님은 산사에 살면서 저처럼 봄동을 좋아하셨나 봅니다.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봄동은 늦게 파종한 배추로, 보통 배추와 달리 속을 채우지 못하고 겉모양이나 맛도 배추와 다르기에, 봄동은 배추이면서도 배추가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했더군요. 또한 그 이름부터 역설과 반전이 있습니다. 봄동에서 봄은 순수한 우리말이고, 冬은 한자어로 겨울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이 짧은 단어 안에 다름을 아울러 품고 있으며, 서로를 거두어 주기에 오고 감이 함께 어우러진 채소의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자연이나 세상의 이치가 봄동 안에 내포되어 있지 않나요?
아마도 오늘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숨음과 드러남’, ‘은둔과 노출’이 절묘하게 표현된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 일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활동을 통해 기도로 은둔하고 숨으시며, 기도를 통해 활동으로 노출하고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다름이 조화로운 삶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예수님은 본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일상을 무비카메라로 담은 듯 그 흐름이 참으로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진솔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수하신 뒤, 베드로와 안드레아 집으로 돌아오시어 쉬려고 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먼저 낫게 해 주어야 했으며, 치유 받은 그녀의 도움으로 늦게 음식을 잡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게 삶인지 모릅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저녁에는 다시 몰려온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치유해 주고 마귀 들려 힘겨워하는 이들 역시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어쩌면 온종일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머물면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 지치게 하는지 아십니까? 아무튼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는 질병과 악령과 죄에서 해방을 위한 구원 활동이었습니다. 그렇게 온종일 일하시느라 심신이 피곤하실 예수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제자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홀로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1,35참조)
사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는 성직자-수도자들이 흔히 쉽게 놓쳐버릴 수 있는 면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쇄신의 문제」라는 문서에서, 『사도적 활동과 복지 활동이 수도 생활의 본질에 속하는 사도적 활동 수도회에 있어서도, 이 활동은 수도 생활의 첫째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이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쁜 사도직으로 인해, 쉽게 활동이란 미명으로 기도를 소홀히 하고, 기도를 방치하는 불균형을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복음에 나타난 모습은 교회 안에 복음 선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흔히 수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수도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가 더 중요하다. Doing 이전에 Being이 우선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봄동처럼 활동과 기도는 함께 어울림 곧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 무엇을 말하고 보여 줄 수 있겠으며, 더더욱 선포자의 말에 무슨 권위가 있겠으며 새로운 가르침이 나오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활동과 기도의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복음 시작 부분부터 마지막 부분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아침부터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은 거두절미하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디 계시냐, 고 아우성칩니다. 그때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서, 모두 다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찾아다녔나 봅니다. 그래서 그분을 보자마자 대뜸, 제자들은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1,37)라고 말씀드리는데, 그 어감은 제자들이 무척 고무되고 흥분된 마음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의 태도는 제자들과 달리 담대하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1,38) 왜 이리도 급하게 서둘러 그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고 홀연히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시어 떠나셨을까요? 물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해야 하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이미 그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알고 계셨기에, 인간적인 인기나 영광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셨다고 봅니다. 이미 나자렛 고향 사람들과 비슷한 그들의 의향을 꿰뚫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통치를 알려주고 보여 주고자 노력하였지만, 그들은 단지 외적인 표징만을 보았을 뿐 표징 너머에 있는 더 거룩한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미련 없이 기꺼이 모든 것을 접고 마무리해서 홀연히 다른 마을로 길을 잡으시고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일상은 드러남과 감춤, 은둔과 노출, 기도와 활동을 아우르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파견에 충실하신 분이셨기에 존재에서부터 그토록 아름답고 열정적인 활동을 하실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1,38)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요. ‘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영혼의 아름다운 뒷모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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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폭이 1m인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바깥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걷는 것을 그 누구도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1m 폭의 길 양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전 펜스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도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맙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도 걸을 수 없는 길로 만듭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을 가지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모를 경우를 생각하며 불안과 걱정 안에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4층 높이의 계단에서 지하 1층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운데가 뚫려있는 회전형 계단으로, 자그마치 5층 높이로 거의 15m 정도가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합니다. 혹시 초능력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취된 상태에서 실수로 계단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취한 상태여서 몸에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떨어져서 찰과상 입는 정도로 그쳤다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의식이 있어서 온 힘을 줬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불안과 걱정도 온 힘을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주님께 모두 맡기는 믿음을 통해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기쁘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을까요? 이 불안과 걱정으로 자기 상태를 더 나쁘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원망이 더 많았을 것이고, 다른 이를 향한 사랑보다는 자기를 배려하지 못한다면서 미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걱정과 불안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바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잊지 않고 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치유와 구마의 권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그분과 일치하는 기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더 열심히 기도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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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벗 그리고 나>
마르코 1,29-39 (시몬의 병든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하느님 벗 그리고 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34ㄱ)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나를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나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나를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벗을 만납니다
나를 만나는 벗을
나를 만납니다
벗을 만나는 나를
벗을 만나는 것이
나를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이
벗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에게 벗을 맡기시는 하느님을
벗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벗을
나를 만납니다
내게 벗을 맡기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벗을 만나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벗을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벗을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요
벗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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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능력에는 그만한 수고와 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생과 노력 없이 능력을 지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가지고 마귀를 쫓아내며 앓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이 또한 그만한 정성을 쏟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힘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입니다.
토마스 키킹 신부는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한 후 하느님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하느님께 알리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의무입니다.
열병으로 누워있는 나에게 따뜻한 이웃이 있는가? 아니면 나는 열병으로 누워있는 이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으로 가셨을까요? 외딴곳은 광야입니다. 고요함이 있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달콤하고 안락한 잠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늘 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6,6).
이른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며 하루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도는 나의 원의를 이루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쳐왔으면서도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이루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1,35) 하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한곳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셨기에 당신이 할 소명을 확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노자는 “고요함이 없는 활동은 다만 어지러운 난장판”이라고 했습니다.
혹 늘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기도하지 않고 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수 없습니다.”(유광수 신부)
우리가 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고요 속에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전히 바쁜 일상이지만 오늘은 성경을 읽고, 성체 조배를 하며 고요함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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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과 질서>
-기도와 일-
어제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시기 이벤트도 끝나고 평범한 일상의 시작입니다. 우선 성무일도 찾기가 쉽고 단순해서 좋습니다. 제의 색깔도 한결같음을 뜻하는 초록색입니다. 새삼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새벽 잠깨어 휴게실에 들렸다 게시판을 보니 연합회 수도형제의 부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두 분다 독일 수도원에 속한 분으로 한분은 1937년생으로 저보다 12세 연상이니 88세로, 한분은 1942년생으로 저보다 7년 연상이니 83세로 선종했습니다. 요즘 대부분이 80-90세 사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90세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도 앞으로 남은 햇수로 10년-15년 안팎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어제는 신문에서 80년대 초반 서강대에서 함께 공부했던 인천교구 제정원 신부의 부고도 접했습니다. 40년 전 공부하던 때 본 후 한 번도 못 봤는데 72세로 선종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처럼 살아서가 아닌 죽어서 만나는 경우가 앞으로도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새삼 인생무상과 더불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음에 하루하루가 참 소중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늘 강조하다시피 삶을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한 후 현 시점을 확인해 보면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시를 읽으며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전부 7연으로 된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2012년 수도원 설립 25년 기념감사제 행사때 낭독한 시인데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읽어보며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는 시입니다. 연중시기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하루 일상이 얼마나 치열한 100%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회당에서 가르침이 끝나자마자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전도 여행을 떠나십니다.
날마다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는 평범한 일상에 지극히 충실한 삶입니다. 날마다 이런 스승이자 의사이신 주님을 만나 배우고 치유를 받고 복음 선포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목할 바 예수님 삶의 중심입니다. 삶의 한복판 중심에 위치한 외딴곳에서의 기도입니다. 분주한 일상을 마친 후, 외딴곳에서의 기도가 삶의 리듬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영육이 살기위해 외딴곳에서의 충전은 필수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피정 차 외딴곳 이곳 수도원을 찾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저는 밤 12:30분에 잠깨어 기상 후 수도원 외딴곳 집무실에서 강론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밤에도 강론 쓰기를 완성했는데 잠깨니 꿈이었고 참 난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가 끝나자마자 찾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새삼 삶의 중심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탁월합니다. 에수님은 결코 군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유혹됨이 없이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시며 삶의 중심과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니 그 모습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어느 한 곳에, 사람들에 집착함이 없이 홀가분하게 성령의 바람 따라 책임을 다하신 후 자유롭게 훌훌 떠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예수님의 시야가 참 넓고 깊습니다. 이 모두가 외딴곳에서의 기도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산같이, 나무같이 정주하는 우리 수도자의 삶이라 해도 내적시야는 주변에 깨어 두루 넓고 깊게 활짝 열려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에게서도 우리는 삶의 중심과 질서에 충실한 모습을 배웁니다.
소년 사무엘은 스승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늘 깨어 주님께 귀 기울여 경청하는 사무엘이었기에 주님의 매번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급기야 네 번째 주님이 부르시자 엘리가 알려 준대로 대답합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정말 사무엘처럼 이렇게 깨어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며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영적소망일 것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니, 얼마나 사무엘이 지극 정성 하느님을 섬겼는지 깨닫습니다. 또 사무엘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얼마나 잘 질서 잡힌 균형과 조화의 삶이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니 사필귀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시어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당신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며, 기도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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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일상>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 아니 일생에 대한 요약입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은 매일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렇게 사셨습니다. 탁 드는 느낌은 불꽃 같은 삶이셨습니다. 그다음 드는 느낌은 “나는?”입니다. “나는 이중 무엇을 얼마만큼 잘 따르고 있나?”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어제 봤듯이 예수님은 책상받이가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서 생사고락을 같이하십니다. 대부분 시간을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 가운데서 보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는 식사를 하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지 형제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노상 아픈 사람들과 상대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아픈 사람을 대하면 아픔이 전이되고 우울한 사람과 만나면 우울함이 전이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살려면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이돼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든지 전이 되는 것을 아예 잘 차단하던지.
많은 사람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없기에 전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도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통을 많이 겪는 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오는 분들로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찾아가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감당하기가 더 힘들어진 겁니다.
역시 찾아가야 합니다. 태도의 문제인데 더 능동적이기 위해서입니다. 찾아 떠나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것은 안주하고 수동적이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오늘 주님은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분들을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 고통이 전이되는 걸 차단하게 된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 부족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고 제가 말할 때 그것은 기도 시간이 짧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기도 시간은 짧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도 시간은 충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도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제가 풍덩 잠기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잠기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물을 깃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바쁜 중에도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서 무엇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계획을 하지 말고, 자책을 하지 말고, 명상이나 심지어 묵상도 말고 오직 사랑에 잠겨 있다가 나와야 할 겁니다.
지난 주일부터 이번 봄 학기 강의 준비하러 왔습니다.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 있어서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강의에 집중하느라 새로운 강론을 쓸 수 없어 전에 올렸던 강론을 다시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강론 꼬박꼬박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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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1,34)
<하느님의 뜻!>
오늘 복음(마르1,29-39)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병든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셔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십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온 많은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나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 움직임들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뜻을 이루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후렴)
오늘 독서(1사무3,1-10.19-20)은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와 그 약속대로 주님께 바쳐진 사무엘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3,10)
주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응답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3,10) 사무엘을 부르신 주님께서 지금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라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이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하나와 일치가 아닌 분열과 싸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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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VwMPD7dL9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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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르 1, 34)
아픈 우리를
언제나
먼저
찾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치유의
일상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불같이 뜨겁게
우리들
안쓰러운
일상에 스며듭니다.
보살핌으로
우리의
지친 일상을
고쳐 주시는
일상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서
보살핌을
배우는 일상의
시간입니다.
일상이 모여
우리들
삶이 됩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보살핌이라는
은총이
있었습니다.
보살핌이
미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믿음과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밖의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십니다.
이와 같이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치유 뒤의
건강한
생활이
펼쳐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픔을 치유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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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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