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들 《계파(系派)》라는 용어를 자주 듣게 되는데 《계파(系派)》라는 용어는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가?
국어사전에는 작은 조직이나 집단으로 나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곳이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동물들까지도 《계파(系派)》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우익과 좌익, 노론과 소론, 특정 정당의 보수파, 신진파, 개혁파의 계파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족보와 관련된 용어에서의《계파(系派)》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각관성씨(各貫姓氏)는 모두 최초의 조상인 시조(始祖)를 기일세(起一世)하여 오늘날까지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시조 한 사람 밑에 무슨 계(系)와 파(派)가 많은지 현대에 사는 우리는 무지(無知)하여 알 수가 없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자기 출신을 ○○○氏 ○○派 ○○代孫이라 하는데 기껏 알아야 지역 명 또는 조상이 역임했던 관직명을 앞에 붙이고 자기 성씨(姓氏)를 뒤에 쓰며 몇 代孫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요즈음 세상에 이것만 알아도 다행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氏 ○○系 ○○派 ○○代孫이라고 호칭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족보나 이와 관련된 책자나 인터넷의 각관성씨(各貫姓氏) 종중(宗中)의 대종회 홈페이지에서는 바로 이 계(系) 라는 글자가 난데없이 등장하게 된다. 똑똑한 우리 인동(옥산)장문들도 잘 모르리라 생각되어 나름대로 재조명하여 몇 자 적어볼까 한다.
각관성씨(各貫姓氏) 모두는 그 옛날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터를 잡고 씨족끼리 많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관직에 등용 한다던가 유배를 간다던가. 또는 지방관직에 머물러 그 지방에서 생을 마감한다던가. 등등의 사유로 인해 또는 집안끼리 싸움으로 한 집안에서 등을 돌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온갖 사유로 인해 갈라져 계(系)도 만들고 파(派)도 만든 것이다. 다행인 것은 改貫개관을 하지 않고 姓氏는 그대로 따르고, 단지 크고 작은 집단을 하나 더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 인동(옥산)장문의 系派계파를 예를 들어보자.
인동이라는 지명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그 인동 마을에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이름이 玉山이다. 그리하여 우리 선계선조님들은 인동을 玉山이라고 따로 불렀고 관향(貫鄕)도 玉山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은 사동화현, 수동, 선산, 칠곡, 인동으로 거듭 개칭 되었지만 玉山이라는 별호(別號)는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 써 왔기 때문에 玉山은 관향으로서 자리매김을 해 왔던 것이다. 옛 문헌이나 비석, 유허비, 신도비 등의 비명(碑銘)에는 인동이라는 글자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오직 玉山이라는 글자만 나온다는 것도 우리 인동(옥산)장문의 후손이라면 꼭 알아야 할 부분이다.
지금도 인동부근의 5개 파는 玉山이라 본관을 고집하여 사용하고 호적등본에 본관 란에도 玉山이라 등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본관을 개관하지 않고 玉山을 본관으로 사용하는 향리 5개 파의 원로들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우리 인동 장씨들에 실시간 연락만 가능하다면
개관한 본관 인동을 옥산으로 복원하고 싶다는 것이 우리 혈통의 역사에 관심 있는 종인들의 한결 같은 소망이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간 것 같아 줄거리가 이상하다. 본론으로 가보자.
우리 집안의 역사와 뿌리와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우리 始祖公시조공이 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始祖公시조공을 起一世기일세하여 玉山을 시조의 고향 즉, 관향(관적)으로 삼고 본관을 玉山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족보를 등한시하고 살아온 20세기의 어른들이 조금(?) 소홀히 하여 21세에 사는 우리 후손들은 자기의 집안과 조상의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는 하지만 족보를 멀리한지가 워낙 연대가 멀어 이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生業생업을 포기하고 찾으려고 해도 오래 전부터 족보를 잊고 살았으니 무슨 근거와 자료로 찾을 것인가?
그나마 家乘가승이라도 유지했더라면 천만다행 이었을 텐데 말이다. 족보문화가 사라진 지금 이 말이 귀에 들어 올 리가 있겠나마는 또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네. 워낙 할말이 많아서 잠시 한 눈 팔았으니 이쁘게 봐 주세요.
그러면 나를 소개할 때
저는 인동장씨 상장군계 태상경공파 22代孫입니다. 라고 상장군계를 붙여 호칭해야 바른 표현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찌할까요? 우리 앞으로 이렇게 부릅시다. 괜찮으시다면 댓글 달아주시고,
그 옛날 인동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 선조님들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크든 작든 우두머리를 한 사람 앞세우고 그 집단을 새로이 구축하여 《○○○씨 ○○계》라 이름 짓고 《○○계의 시조는 장○○》이며 살아계실 때 고위관작 했던 품계와 시호 또는 업적을 앞세워 기일세하여 그 《系派계파》나름대로 宗史를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지어 어떤 《系派계파》는 종족사의 전통과 종중의 질서를 무시하고 떨어져 나간 경우도 있다.
이렇듯 본관은 인동인데 시조를 달리하는 조직을 한편으로는 《인동 장씨 ○○계(系)》라고 한다.
1. 上將軍 系 仁同 張氏
2. 直提學 系 仁同 張氏
3. 文肅公 系 仁同 張氏
4. 張壽命 系 仁同 張氏
5. 興城 張延佐 系 仁同 張氏
6. 禮賓卿 張龍瑞 系 仁同 張氏
위의 자료와 같이 우리 인동 장씨는 여섯 계(系)로 나누어져 있다. 덧붙여 설명을 한다면 위의 1번, 2번, 6번의 시조 앞에 붙인 용어는 시조가 역임했던 관직명을 따서 붙인 것이고 3번의 경우는 시조가 죽은 뒤 나라에서 시조의 높은 공적을 인정해 주는 시호를 딴 것이다.
또한 간혹 족보와 관련된 문헌에는 ○○군계(君系)과 ○○백계(伯系)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군(君)은 왕실의 친족들이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사람에게 邑號읍호를 붙여 부르는 호칭어이다./ 옥산부원군, 옥천부원군, 옥산군 등
○○백(伯)은 국가에 특별히 인정받을 공적은 없으나 일가(一家)에서 큰일을 했던 조상을 우대하여 후손들이 號호를 따서 붙인 경칭용어이다.
이 글을 지은이가 보명(譜名)은 장홍희이고. 호(號)를 현해(賢海)라 한다면 아마도 지은이가 죽고 나면
賢海伯 系 仁同 張氏 라 감히(?) 예를 들어 보았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질문자는 인동장씨 AB파로서 조상과 항렬을 알고 싶어 인터넷 인동장씨대종회 홈페이지에 질문을 한다. 답변은 여기는 인동장씨 상장군 계의 대종회 홈페이지입니다. 상장군 계에는 AB파가 없습니다. AB파는 직제학계의 파이므로 직제학계 홈페이지를 검색하세요.
여기까지 이해를 다했으리라 생각하고 다음은 ○○파(派)에 대해서 조명해 보자. 위에서 조금 언급했지만 파(派)는 그 옛날 시조의 후손들이 관직에 등용하여 서울에도 살고 지방에도 살면서 어쨌든 관향(貫鄕)을 떠나 어는 한 마을에 정착을 하여 살다보니 같은 혈족끼리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통신수단,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서울-부산을 하루 만에 볼 일 다보고 집에 돌아 갈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가히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조의 혈통과 종중의 관습, 문화, 전통, 규칙은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入鄕祖입향조를 중시조(中祖, 派祖)로 받들어 分派분파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로 그파(派)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분파조(分派組)의 명칭과 호칭이 각파마다 들쑥날쑥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떤 파는 마을 이름을 따서 영광파, 함평파, 흥해파 등 이라고 하는데 비해 어떤 파는 분파조(分派祖)가 역임한 관직명을 따서 태상경공파, 판서공파, 참찬공파 등 이라고 각각 저마다 달리 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대종회에서는 이를 바로잡아 지역명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지역명 뒤에 괄호 안에 각파에서 따로 부르는 관직명을 넣어 놓기도 하였다.
그렇다, 참으로 옳은 일을 하신 것이다. 지역명은 고유명사로 독립적인 기능을 할 수 있지만 관직명은 세대가 바뀌면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관직을 역임하는데 만약에 우리 종중에 영의정을 역임한 분이 세 사람이 나왔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러면 영의정이 얼마나 높은데 영의정파(領議政派)라는 파명(派名)을 안 쓸 후손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인동(옥산)장씨의 최고 의결 기관인 대종회에서는 지역명을 공식 분파조명(分派組名)으로 사용하니 착오 없길 바란다.
그러나 일부 분파조에서는 아직도 지역명을 쓰지 않고, 관직명을 옛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경파(京派)의 예를 들어보자. 경파는 주로 경인지방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기에 대종회의 공식분파조명은 경파라 하는데 경파에서는 지금까지도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라는 분파조명을 고집하여 사용하고 있다.
족보명: 인동장씨태상경공파세보가 그것이고, 또한 종친회 현판도
인동장씨 태상경공파 종친회가 그것이고, 각종 통문이나 고지서 등에
인동장씨 태상경공파 제위께 로 시작한다.
이러한 일들은 각파의 종친회에서 결정한 일이니 더 이상 언급하다간 큰일 날 것이다.
분파조(分派組)에 대한 개념과 가치는 지금에 사는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종인들이 많을 줄 안다. 왜냐하면 같은 마을에 살지 않으니까 말이다. 集姓村집성촌 이라는 용어를 쉽게 이해하는 종인이 몇 사람이 되겠는가? 그래서 대중가요에 멀리 있는 친척도 사촌만큼 못하다는 이웃사촌이란 노랫말도 등장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카페를 자주 들르면 집안의 어른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 우리 인동(옥산)장문의 역사와 전통과 관습을 배울 수 있고, 또한, 우리 대종회나 종친회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으니 현대문화도 잘 만 사용하면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으니 어쨌든 많이 들러 주길 바랄 뿐이다.
그러면 여태껏 두서없이 떠들었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어느 한 宗人의 出身이
玉山 張氏 上將軍系 咸平派 25代孫 이라고 가정(假定)한다면 자기소개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면 어떨까?
玉山張氏: 저는 玉山을 本貫으로 하는 張姓을 가진 사람이며
上將軍系: 우리 玉山 張氏는 여섯 계(系)로 각각 시조(始祖)를 달리하고 있는데 그 중 저는 고려 때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을 역임하신 諱金用 府君의 계(系)로
咸平派: 분파조(分派組)는 함평파이며 분파조(分派祖)님은 고려 때 正二品 우참찬(右參贊)이라는
높은 관직을 역임하신 휘백림(諱百林) 부군(府君)으로
25代孫: 저는 그 분의 20代孫입니다.(이며, 시조공(始祖公)으로부터는 25代孫입니다.)
☞공(公): 특정한 인물, 관직명, 시호, 성씨 등의 뒤에 붙이는 경칭어
始祖公, 太常卿公, 忠貞公, 張公 等
☞휘(諱): 사자(死者)의 생전의 이름 앞에 붙이는 용어./휘자(諱字)↔함자(銜字)
○우리 5代祖님 의 諱字는 吉東입니다.
○인동장씨 대종손 12세 충정공 송은 휘안세는 고려말 절신으로,,,
○仁同張氏 大宗孫 12世 忠貞公 松隱 諱安世는 高麗末 絶信으로,,, |
첫댓글 홍희 운영자님, '계'와 '파'에 관한 글 올려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저도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의문과 궁금한 것이 많았는 데, 이제 관향을 인동으로 쓰는 장성(張姓)에 대해 걸음마 수준이지만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그것은 우리 인동(옥산)장문 25개 파는 거의 다 지역명으로 파명을 부르고 있으며, 관작명으로 파명을 부르는 파는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감무공파,교위공파,태상경공파,영돈령공파,자성정공파,기촌공파 등..) 그 외 뚜렷하게 알려지지 않은 관작명으로 파명을 쓰는 파는 우리 '상장군계 인동(옥산)장문'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익창 운영자님 안녕하세요. 익창 운영자님 덕분에 글 쓰는 맛이 납니다. 장문의 댓글을 보게되면 독후감을 읽는 것 같고 내용에 대해 평가를 받은 느낌이 듭니다.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홍희운영자님 머리로만 대충 생각했던 것을 이렇게 논리 정연하고 알기쉽게 설명해 주시니 존경스럽습니다. 대단히 고맙게 잘 읽고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경산
경산이 아니라 선산(옥산 연혁에 선산부)이라 해도 될른지요?
칭찬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자만해지니까요. 차라리 구석구석 잘 점검하셔서 잘 못된 점을 따갑게 지적해 주시는 것이 더 좋은 감사의 글이 되겠습니다. 더운 여름 마무리 잘하시고 사업 잘되시길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