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에 다녀온후 산행기를 그때 그때 올려야 하는데 게으름 탓인지
열정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리산 덕유산 설악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열몇번씩 울궈먹었기에
이제는 자료들도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2002년부터 나에게 지리산을 가르쳐주던 이영진님과 공용철님이
몇년전부터 산행기를 접어버린 영향이 내게도 미친것 같습니다
감칠맛나게 산행기를 잘쓰던 오프넷의
정진원님 솔메거사님 슬기난님 쉴만한물가님 김현거사님 양윤선님
전주 광속단의 프록켄다님
하동송림의 조훈님
광주의 배창랑님
파주의 계백님
지리99의 강호원님과 유키님처럼 누애고치에서 명주실이 나오듯하는
그런 산행기를 쓰고싶으나 속에든것이 적어서인것 같습니다
동갑 이기에 절친하게 지내던 최화수님이 재작년봄에 하늘 나라로 떠나버린
후로는 지리산아래 이곳 저곳에 아직도 살아있는 90이넘은 그때의 좌익 투사들을
이제는 찾을수도 소식을 알수도 없습니다
그 빨치산들은 토벌대에 쫓겨다니면서 닷세 엿세를 쫄쫄 굶다가 어렵게 어렵게
마을에 내려가서 좌익 세포를 통해서 정세도듣고 곡식을 구해온후
산죽밭을 낮은포복으로 기어다니면서 죽은나무와 싸릿대와 맹감나무 등으로
밥을하는데 김이나면서 밥이 끓고있을때쯤 토벌대가 두둥 두둥 하면서사격을
해대면 언제 배고팟느냐 하면서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와중에도 뜨거운 빈솥단지와 이불보는 꼭 가지고도망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럴때는 적개심에서 토벌대를 전부 잡아먹어 버리고 싶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운봉 허브농장 김영호님은
그때 빨치산으로 열렬한 활동을 하였던
남원 산내면 0화0 고향마을에 지금도 건강하게 살고있는 김00님은
산내면 1000석군 아들이었고 1924년생인데 잘생기고 동경유학도 다녀온
남원에서는 알아주는 최고의 인테리 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선대에베푼 은혜덕에 이곳저곳 친척들의 도움으로 3-4년을 숨어서
지냈기에 형무소도 안갔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자기집 근처의 산에도 다닐정도로 건강하며 약초와
산나물도 채취한다고 하였습니다
2021년 가을에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200번 작은행사를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몇년전부터 벼르며 기다리고있는 영랑대 영신대 토끼봉 에서의 야영이
꼭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일시: 연인산 4.28.10:30 - 17:30
지리산 7.4.24:00 - 7.5.:21:30
용문산 8.12.09:30 - 20:00
백운대 9.1.09:30 -17:00
우면산 9.8.10:00 - 18:00
관악산 9.13.10:00 - 18:30
천사대교 10.18.07:30 - 10.19.21:00
지리산 10.28.14:00 - 11.4.19:30
장소: 경기 가평군 가평읍
경남 함양군 마천면,산청군 시천면
경기 양평군 용문면,옥천면
서울 은평구 종로구 강북구, 경기 고양시
서울 서초구, 경기 안양시
서울 관악구,과천시,안양시
전남 신안군 암태도일대,목포,진도
경남 산청군 삼장면,하동군 청암면,전북 남원시 운봉읍
코스: 마일리 - 우정고개 - 우정봉 - 연인산 - 마일리
백무동 - 장터목산장 - 천왕봉 - 법계사 - 중산리 - 원지
용문역 - 일주문 - 용문사 - 용문역
구파발 - 산성입구 - 위문 - 백운대 - 산성입구
서울대공학관 - 깔닥고개 - 연주암갈림길 - 연주대 - 응진전 - 연주암 - 과천
1004대교 - 암태도 - 자은도 - 추포도 - 팔금도 - 안좌도 - 목포 - 진도
새재 - 치밭목산장 - 하봉 - 소년대 - 영랑대 - 마암 - 새재 - 청학동 -
삼신봉 - 정령치 - 만복대 - 정읍 부안촌 - 두승산
풍도목에핀 벚꽃
몇년전 태풍때 퍽큰 벚꽃나무가 등산로를 가로질러서
쓰러졌는데 그풍도목에서 벚꽃이 한창 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들 기어서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배낭과 스틱을안고 기어서 지나왔어도 아무런 불만이없고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지리산 선비샘에서 샘위에있는 하대받던분의 묘에 머리를
숙이고 어쩔수없이 예를 드리면서 물을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인산 정상
가평 최고의 산이기에 평일인데도 여러팀이 보였습니다
반가운 해후
(시계방향으로 소용순소대장 김선우 소대원)
서울 근교에사는 저희 군동기생 당구모임 12명중 9명이
춘천 소양땜건너 청평사로 야유회를 갔다고 했습니다
전철 남춘천역에서 소양강땜까지 닭갈비 식당에서 공짜로
테워주는 봉고차를 타고가면서 군대이야기를 하던중누가
"기사양반은 군대는 갔다왔소 어디서 근무했소?"
"예 1사단 12연대 출신입니다
우리 중대장님은 오해봉 중대장님 이었습니다"
"아하 그래요 오해봉이 우리 동기생 인데요"
"그러시면 우리 중대장님 전화 번호좀 알려주세요"
오랫만에 동기생 조충호의 전화를받고
우리중대의 김선우를 바꾸어 주어서 44년만에 무지하게
반가운 전화를 통화했습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그시절 김선우의 그우렁찬 목소리 였습니다
"중대장님 김선우 입니다"
"야 선우야 참 반갑다 너몇살이냐?"
"예 예순여덥살 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우연히 중대원 김선우군을 찾았습니다
2004년 봄부터 연락이되어서 절친하게 지내는 김선우네 소대장인
소용순님과 셋이서 반가운 만남을 갖었습니다
장터목산장
제가 지리산에 다니면서 가장많이 잠을잔 산장 입니다
20몇번 숙박중 공짜로 잠을 잔적도 5-6번 있었습니다
24:00시경에 산장에가면 관리공단 직원들도 잠을 자버리기에
돈을 줄곳이 없었습니다
지리산 산장들은 밤에는
탱크가 지나가는듯한 코고는 소리
박격포나 기관총 소리같은 방구소리가 밤새도록 나는곳 이기도 합니다
30000만불 시대에 부끄러운 이야기 이지만 가끔씩 새등산화나
좋은등산화의 도난사건이 발생하는곳 이기도 합니다
수녀님 스님 외국인들도 많이들 잠자는곳인데 이좋은 지리산에와서
남의물건을 훔쳐가는 추한일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석봉
우측으로 멀리 보이는산은 반야봉 (732m) 입니다
제석봉 설명판
태풍때문에
올여름 태풍때 부러져버린 아름다웠던 나무입니다
작년 가을에도 멀정 했었습니다
2004년봄에 오프넷 들꽃님과 달님이 이천 문화원에서
사진 전시회를할때 김수훈님과 갔더니
싱싱했던 저나무가 모텔로 등장되었던 멋있던나무 였습니다
오프넷에서 슬기난님과 쌍벽을이루는 여태영님의 산행기에
촛대봉에서 연화봉 오는길의 껍질만 남았던 수백년된
주목나무도 부러져 버렸다고 하기에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나는 그곳을 지날때는 언제나 그주목을 눈이오거나 비가올때도
꼭 한참씩 포옹하고 다녔었습니다
나무들도 사람처럼 세월앞에는 어쩔수가 없는가 봅니다
주목
촛대봉 - 연화봉 사이의 수백년된 주목의모습 입니다
저 아름답고 좋았던 주목이 올여름 태풍때 보통 사람의키
정도만남고 부러져 버렸다고 합니다
2015 새해일출 산행때 중산리 - 천왕봉 - 장터목 - 세석 -
거림으로 오면서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천왕봉
언제나 그리운 그곳 천왕봉 입니다
성묘
부모님과 외할머님 산소가있는 서북쪽을 향해서
경건하게 절을 3번 했습니다
처부모님이 계신 이천 호국원 쪽을 향해서도
절을 했습니다
때로는 무슨종교냐?
무슨 신앙이냐?
질문을 받을때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로타리 산장
저는 지리산 8개산장중 유일하게 이곳에서는 한번도
잠을 자본일이 없는곳 입니다
몇년전부터 기념으로 한번 자볼려고 하고있습니다
용문사 은행나무
1100년과
1300년의 2가지 수령을 갖고있는 은행나무 입니다
은행나무 설명판
용문산 계곡
매월 두번째주 일요일에 산행을하는 군동기회 산행날 입니다
전철을타고 오면서부터 삼복더위에 산에올라가면 골병든다고
용문사위계곡 물속에서 놀자고들 하였습니다
저도 용문산이 어디로 이사가는것도 아니니 그러자고 했습니다
계곡의 흐르는 물속에서 목만내놓고 누워있으니 이곳이 정말로
유토피아이고 극락 이었습니다
나는 삼겹살 오리고기 닭고기를 코펠에 데워서 이곳 저곳으로
나누어 주면서 박수를 여러번 받았습니다
인수봉
인수봉 바위에는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이 여러팀이 보였습니다
저는 2007.5.군동기생 故 김청룡이만든 의정부 산사랑 산악회를
따라서 헬멧 안전벨트 로프등 안전장비를 갖추고 한번올라가 보았습니다
50m짜리 로프로 올라갈때는 5피치
내려올때는 2피치로 내려왔습니다
백운대에 올때마다
저 인수봉 고독의길 난코스에서10m 정도의 90도 직벽에 오르며
힘들어서 헤메는 나를 코치해주며 안전 로프를 잡아주던 다정했던
김청룡이 항상 생각나고 있습니다
백운대
오늘은 일요일이라 사진찍는 줄이 퍽 길었습니다
지리산 천왕봉만은 못해도 백운대 정상도 아주 좋았습니다
의정부 - 남산 - 인천 - 김포 - 강화 - 일산등 조망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조실록에 실렸다는 옛날 이야기 (조선일보)
세종대왕이 왕자 8명을 담력훈련을 시킨다고 백운대에 올려보냈다고 합니다
내금위 에서는 바위에 미끌리지 안토록 가죽신발에 명주배를 여러겹으로
꼬아서만든 로프를 휴대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경호실격인 내금위의 젊은군사들이 호위를 하였는데
7명의 왕자들은 사시나무떨듯 벌벌 떨면서 로프를잡고 오르고 내렸는데
수양대군 한사람은 젊은군사들의 호위도 안받고 로프를 한번도
안잡고 혼자서 올라가고 내려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보고를받은 세종대왕은
수양대군 저놈때문에 큰일이라고 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고 했습니다
그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병으로죽자 임금이된
어린 단종을 끌어내리고 용상을 탈취하고
단종을 영월 청령포로 유배보낸후 사육신등이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난다고 단종을 끈으로 목을졸라서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2010년즈음 백운대길 가장 난코스에도 철계단을 만들어놨기에
지금은 누구나 올라갈수 있지만
철계단이 설치되기 전에는 그곳 때문에 백운대를 못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쇠줄로프를 잡고도 떨면서 오르고 미끄러져서 부상당하고 옷이 찢어지고
하는일로 근10여분씩은 지체 되었던곳을
수양대군은 그시절에 어떻게 5m 정도의 수직에 가까운 그난코스를
혼자서 바위틈만잡고 올라가고 내려왔을까 대단한 수양대군 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잡고올라 다니는 안전 쇠줄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등산용으로 만들어서 박아둔 쇠기둥과 가느다란 쇠줄을
70년대말에 우리나라 관리공단에서 지금의 굵은쇠줄로 교체해 놨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잊었는데 일산의 어떤분은 소년등과를 (20세때 행정고시) 한분인데
2010년 경에 백운대를 3000번 등정했다고 합니다
큰 프랭카드에 000 선생님 백운대 3000번등정 사진이 인터넷에서 한참
올려져 있었습니다
설날에도 아들과 손자들한테 세배를받고 백운대에 오를정도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지금도 일산 - 구파발 - 산성 - 백운대를 다닌다고 합니다
지리산에 실성해버린 마니아들이 지리산 봉우리들을 유일한 종교로 여기듯
그분은 북한산 백운대를 신앙으로 여기는것 같습니다
오래된 북한산 산행기를 찾다보면 여러사람들의 산행기에서 일산 그분의 3000번
사진이 남아 있답니다
삼각산 설명판
우면산
군동기회 충무산악회 산행날 입니다
푸른 등산로
태풍이 지나간후라 온산이 푸른 나뭇잎으로 뒤덮혀 있었습니다
관악산
41년째 친형제처럼 지내는 8살 덜먹은 김선희아우 입니다
추석날 기념으로 아직 한번도 못가본 관악산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무조건 OK 하고 1시간후 낙성대역 4번출구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고마운 김선희의 청을 거절할수가 없었습니다
오후에 영화를보여 준다고하던 우리집사람도 추석날인데
부안촌 사람들보다 더반가운 선희삼촌을 만나네 하면서
과일 송편 식혜등 여러가지를 챙겨주었습니다
연주대 응진전
백운산장
중이 고기맛을보면 절에있는 OO까지도 잡아먹어 버린다더니
김선희는 어제 처음가본 관악산이 기막히게 좋았다고 하면서
오늘은 백운대에도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종아리에 알이 박혔지만 자기의 친지들을 교섭해 놨다고 했습니다
산행후 제일로 비싸고 맛잇는 저녁대접을 해주고 사우나도 시켜준다고 했습니다
등산후 사우나를하면 무릅이 고장나 버리니까 안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백운대
물을 많이먹은 짙은안개로 산아래는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추석연휴 이기에 서양 사람들과 동남아 사람들도 많이 왔습니다
우리일행 5명도 안개속에서 근20여분 줄을서서 기다리다가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태국사람들 사진을 여러번 찍어주다가 일행들과 떨어져서
이산가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닐 우의를입고 위문에 내려오니 일행들이 가랑비를 맞으면서
나를 기다고 있었습니다
김선희 아우는 형님은 비가올것을 어떻게알고 우의를 갖고왔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5개의 배낭중 어디에든 비닐우의 라이타 멘소레담등 상비약과
누릉지와 과자가 들어있다고 했더니 모두들 좋은걸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들중 김선희아우와 김용덕님은 오늘 백운대를 처음 올라가 봤다고
하면서 이렇게 좋을줄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프랭카드
전철 수유역에서 시내버스를타고 도선사 입구로 가다가
신호대기중인 버스속에서 촬영 했습니다
충무산악회
07:30 분부터 테마 여행으로 신안군 5개섬 - 목포 - 진도를
향해서 가는중 입니다
1004 대교
특전사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임동수 신안군 해설사님은
이곳이 암태도 제일의 사진 포인트라고 했습니다
1004 대교는 10.8km이며
우리나라에서 4번째 긴다리라고 했습니다
이다리는 자동차만 다닐수있다고 하며
사람이나 자전거 오토바이가 다리에 들어가면
CCTV 를보고 즉시 순찰차가 출동 한다고하며
벌금 10만원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암태도에서 가장 유명한사람은
김대중 대통령때 법무장관도했던 5선의 천정배 국회의원
이라고 했으며
천정배는 서울법대1등 사법고시1등 사법연수원1등으로
암태도 사람들의 자존심이고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신안군에는 1026 개의 유무인도 섬이 있는데 다리의 이름을
1026 교라고 할려다가 주민들이 1026은 부르기도 촌스러우니
조고만 무인도 22개는 빼버리고 부르기도 아름다운 1004 교로
하자고해서 천사교로 정했다고 합니다
해설사 설명
김환기 화백 생가 (자은도)
저는 전에는 김환기 화백이 그정도로 유명한줄을 몰랐는데
이번에 해설사인 임동수님의 설명을듣고 좋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오늘 (11.25) 조선일보에는 김환기화백의 우주라는 그림이
홍콩 경매장에서 132억원에 팔렸다고 보도 되었습니다
중개 수수료까지 합하면 153억 5000만원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그림중 100억이넘는 그림이 10개가 있는데 8개가
김환기 화백의작품 이라고 했습니다
임동수 해설사가 보여주는 사진속의 그림들을 보면서도
저런 그림이 무엇때문에 수십억 짜리인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여지껏 우리나라 에서는
진도의 소치 미산 남농 祖 夫 孫 3대의 그림들이 제일로 값나가는줄
알았는데 김환기 화백의 그림에 비하면 조족지혈인것 같았습니다
목포해상 케이블카
유달산 8부정도를 지나고 조고만 산을넘고 바다를 건너는
이 해상 케이블카는 아주 잘만들어 놓은것 같았습니다
왕복 6.4km 이기에 20000원 가치가충분 했습니다
중간에 전망대 휴게소도 있기에 한나절간 놀다가 돌아와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 케이블카는 밤 21:00시에도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유달산덕에 더 각광을 받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바다를 건넌다고 한때 소문났던 10000원짜리 여수의
케이블카는 이곳과는 비교가 안되었습니다
진도대교
다리건너 먼곳은 해남 문내면 우수영이고
더 먼곳의산은 옛날에
목포로가던 아시아나기가 추락했던 화원반도 산입니다
충무공 전적비
진도 벽파가 고향이라는 여자 해설사 김도심님은 이곳에있던
큰바위를 석공이 저렇게 다듬어서 거북을 만들고 그위에
전적비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모든 비용은 벽파마을 주민들이 거출하여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벽파마을 이었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퍽 큰동내인 목포가 지역구인 박지원 의원의
고향 마을도 쳐다보면서 지나왔습니다
요즈음 진도에서는
군수님이 어디에가면 면장이나 이장등 10명정도만 따라다니는데
진도출신 송가인이 진도에오면 목포 해남 영암 강진 장흥등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수백명씩따라 다닌다고 했습니다
운림산방
소치의 (허련님1808년생) 집터가 대단히 좋아 보이지요
소치의 가계도
현재 5대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허씨들의 DNA 같습니다
새재
행정구역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윗새재 입니다
해발 650m지역 이기에 여름에도 해만 떨어지면 더운줄을
모른다고 하는곳 입니다
치밭목 산장
이곳에 올라오는데 손이 무척 시려워서 혼났습니다
새로 신축하고 나서는 처음으로 자보았습니다
해발 1450m 고개위에 있기에 언제나 큰 여객기가
지나가는 소리가나는 치밭목인데 오늘은 덜했습니다
저녁을 잘먹고 따뜻하게 잘잤습니다
한참 자는데 60대 초반의 두사람이 대청봉에서 내려
오느라 늦었다며 들어왔습니다
그분들은 아침에 취사장에서도 천왕봉을 계속 대청봉
이라고 하기에 모두들 웃었습니다
이들은 지리산이 이렇게 험한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다시는 지리산에 안온다고 했습니다
수류탄
6.25.때 토벌대나 빨치산들이 사용했던 세열수류탄 입니다
손잡이는 삭아서 없어졌어도 충격을 가하면 폭발할수 있습니다
이영진님이 하봉 샘아래 500m 정도에서 발견해서 핸드폰으로
촬영해 왔기에
서울에와서 공중전화로 지리산 남부관리사무소에 알려 주었습니다
빨치산을 토벌하던 때가 70년이 되어가지만 지금도 지리산
곳곳 에서는 해마다 큰비가 내리고난 후에는
녹슬은 권총이나 탄창에 끼워진 8발짜리 M1총 실탄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M1 실탄
8발 1크립짜리 M1 실탄입니다
지리산 토벌작전때 군경 토벌대의 주무기 였습니다
간혹 좌익성향의 토벌대원은 저런 실탄을 빨치산들이 사용하라고
수백발씩 잘보이는곳에 놔두고 갔으며
어떤 토벌대원은 담배대신 단풍잎이나 도토리 상수리 나뭇잎으로
말아서 담배를 피우는 빨치산들을 위해서 담배도 몇갑씩 잘보이는
바위틈등에 비에 젖지안게 놔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2차대전때 잠자는 호랑이 콧수염을 건드렸던 일본은 공군과 해군이
미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자
유일한 희망은 한번도 패배한일이없던 일본의육군 이었다고 합니다
그 막강한 육군 보병들이 미군 보병들과
남향군도인 가다카날군도의 여러섬들과 오키나와에서 전투를할때
미군 보병의 주무기였던 저 M1 때문에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맥을 못추었다고 합니다
일본군들의 주무기는 한번쏘고 장전하고 손으로 반복장전 해야하는
99식 딱쿵총인데
미군들은 화력도좋고 총소리도큰 8발을계속 연속으로 사격하면서
공격해 오기에 당할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주간 전투에는 미군한테 못당해서 박살이나던 일본군들은
야간에 훈도시만입고 숫돌에 잘손질한 리폰도를들고 잠자는 미군막사에
침입하여 미군들의 모가지를 전부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몇번당한 미군들은 막사주위에 3중 윤형철조망을 설치하고 곳곳의
땅속에 마이크를 묻어놓고 삐삐선을 연결한 앰프는 막사에 두었답니다
그후로는 침입하는 일본군은 전부다사살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그 마이크 탐지기가 발전하여
지금 우리육군이 GOP와 GP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있는 진동기 입니다
소년대
제뒤로 하봉 중봉 천왕봉 입니다
저도 이곳은 오늘 4번째 와보는곳 입니다
태극종주때 2번 올라와보고
10여년전 이영진님 박찬선 김진수와 초암능선으로 내려갈때도
유명한 봉우리 이기에 기념으로 이곳에 올라와 봤었습니다
오늘은 여유를갖고 동서남북을 자세히 둘러 보았습니다
영랑대
신라 시대때에 김유신등 화랑들이 군사 훈련하면서
올라다녔다는 영랑대 입니다
제뒤로 보이산은 반야봉 입니다
반야봉 넘어는 만복대와 큰고리봉 입니다
집에서 나올때는 이곳에서 이영진님 중봉님과 헤어져서
혼자 야영을한후
장터목 - 세석 - 영신대(1박) - 토끼봉(1박) -
뱀사골 - 만복대(1박) - 정읍(2박)으로계획 하였으나
너무나 힘들어서 내년 봄으로 미루었습니다
김진수님까지 모두들 잘생각 했다고 하였습니다
점필재 김종직님이 1471년 가을에 함양군수를 하면서
뇌계 유호인 매계 조위 와함께 지리산에 올랐던 유두록에
" 여기에서 영랑재(永郞岾)까지는 길이 매우 가팔라서 해가 정오를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에 올랐다.
이곳에 이르니
천왕봉(天王峯)이 올려다보인다
영랑(永郞)은 신라(新羅) 화랑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산수를 구경다니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다 해서 영랑점이라 부른다
소년대(少年臺)는 이 봉우리의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길은 되어 보인다
이 산의 동서 계곡에는 잡목(雜木)은 없고 모두 삼(杉)나무회(檜)나무인데
잎은 말라 죽고 줄기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은 되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는 모두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둥치가 왼쪽으로 쏠려
굽었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
(청이당에서 영랑대 - 소년대 - 중봉 - 천왕봉에 오르는 왼쪽은 남쪽입니다)
마암
5-6년전 겨울에 저바위 아래서 모닥불을 크게 피워놓고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2톤이넘는 바윗조각이 떨어져서 제일안쪽에 앉았던 사람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낫던곳 입니다
바위밑에서 모닥불을 피우니 바위에 열기가 닿기에 점점 팽창하면서
균열이 생긴탓 이었을것 이라고들 했습니다
4명모두가 부산 사람들이고 지리산 어떤산악회 회원들 이었습니다
그후로 동부능선은 단속이 강화되고 태극종주 하는사람들이 들켜서
벌금도 여러명이냈고 아주 힘들었던곳 입니다
지금도 주말에는 하봉근처에 관리공단직원들이 자주 잠복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잠시 눈을감고 고개를 숙이고 그분의 명복을빌어 드렸습니다
청학동
새재에서 대중교통으로 이곳에 올려면 하루종일 걸리고
택시를타면 근10만원이 나오는 거리입니다
언제나 고마운 중봉님이 오늘도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73세에 비박 배낭을멘 지리산에서 최고의 형님이라고
추겨 주었습니다
80.5. 대학 다닐때부더 올해 40년째 800 몇십번 지리산을
다니고 있지만 70넘은 야영객은 한번도 못봤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2박을 하면서
삼신봉 - 송정굴 - 상불재 - 삼성궁 을돌아 보았습니다
요즈음은 지리산 남북종주하는 산행기를 볼수가 없더니
형제봉으로 가는길 산죽밭이 많이묵어 길이 안보였습니다
삼신봉에서 삼성궁까지 오면서 등산객은 두명 한팀밖에 못봤습니다
청학동 고향식당
제 산행기에서 3번째 소개하는 식당입니다
음식도 맛있고 부부간에 예절이 아주 밝은집 입니다
고향식당 안주인은 친정이 창령이기에 경상도 음식밖에 할줄을
몰랐답니다
경상도 음식은 전라도보다 맛이 없다고들 하기에 구례의 큰식당에가서
한달간 무보수로 일을해주면서 전라도 음식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2002년 겨울에 이현우님 송동선아우와 셋이서 남부능선으로
내려와서 이집에서 하룻밤 잠을 잤습니다
3학년짜리 작은 아들이 자기집앞을 지나가는 배낭멘 등산객들에게
계속하여 공손하게 절을 하기게
너는 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우리동내에 오시는 어른들에게는 모두에게 절을 하라고 했어요"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기특 했습니다
저는 그후로 고향식당의 단골이 되었습니다
그때 3학년 6학년이든 애들이 금년에 29세와 32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음식이 맛있는 뱀사골 산채식당 (010 - 6591 - 9670 )과함께
고향식당 (010 - 3830 - 7202 ) 을 여러사람 들에게 PR도 해주며
절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갓걸이재 이정표
이고개는 청학동에서 삼신봉에 오르는 가파른고개 이기에
옛날에 청학동 - 세석평전 - 마천 으로갈때 이곳에갓을
걸어두고 쉬었다는 갓걸이재 입니다
오늘은 갓대신 제 등산모자를 언져두고 기념으로 찍었습니다
지금은 모자가 옛날의 갓인것 같습니다
삼신봉
노고단 - 천왕봉 까지 지리산 주능선 전망이 가장 좋은곳 입니다
카메라가 낡아서 자동이 안되기에
멀리서 사람소리가 들려오기에 20여분을 기다려서 진주에서 오신분들과
품앗이를해서 찍었습니다
정령치
(삼성궁 내림길 난코스에서 미끄러지며 카메라 파손으로 사진이 껄적지근 합니다)
삼한시대에 정씨성의 장군이 이곳을 지켰기에 정령치라고
한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로드킬 예방을위해서 재작년에 동물 이동로를 만들었습니다
만복대
정상 20m아래 아주좋은 야영지 입니다
여름철 소나기를 제외한
강풍과 폭설에는 아주좋은 명당자리 입니다
금요일 이기에 야영팀을 2-3팀은 만날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오기에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10몇년전 송년산행때 영하22도 이던날
이영진님과 김진수 심상환과 넷이서 시베리아 북풍의
무서운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침낭과 텐트 후라이만덮고
비박을한후 오늘이 2번째 야영 입니다
동기생 심상환은 그때 손가락 4개가 동상에 걸려서 솔차니
고생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핫팩이 생활화 되어서 그런 걱정은 안하고 있습니다
(전주출신)
정상아래 바위밑에 뼛가루 일부와 묵주가묻힌 이철언님
(어느곳 사람인지 모르는)
능선끝 천왕봉쪽에 슬픈 비목이있던 75년생 류인철군은
"내가 죽어도 내이름은 잊지말아 주세요 " 등
애닯은 4줄의 글과 사진이있던 비목이 지금은 삭아서 없어졌습니다
(서울출신)
반야봉쪽 능선중앙에 추모솟대가 세워져있던 30대 중반의 은주양은
글도 잘쓰고 아주 세련되고 예뻣다는 그는 왜 스스로 생을마감 했을까?
참 슬픈 만복대 이기도 합니다
추모
전주 이철언님의 뼛가루와 묵주가 묻힌곳 바로아래 입니다
나는 이분과는 산행을 한번도 할기회가 없었습니다
전주 광속단 프록켄다님의 산행기에서 사진으로는 수십번
보았기에 어디서 보아도알것 같았습니다
재작년 1월말 운장산 폭설 산행후 만복대님 문병을 한다고
전주로온 중봉님이 천주교 요양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만복대 이철언님을 금방 알아보고 찾았습니다
중봉님은 자기가만든 내사랑지리 모임에서 야영과 산행을 여러번했어도
췌장암으로 너무 여윈모습의 만복대님을 긴가민가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초면인 나에게 오프넷에서 내 산행기를 꼭 읽어 본다면서
뵙게되어서 참으로 반갑다고 했습니다
그는 요즈음은 밥도잘먹고 건강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철언님은 우리가 문병간후 30 몇일만에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이영진님은 항상 전주사람들 중에서
지리산 최고의 고수는 만복대님 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이영진님이 전주의 지리산 최고의 고수가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에서는 더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
하면서 절을 두번 했습니다
만복대 이정표
부모님 산소 (사진이 흐려서 교체 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1899.12.22. - 1981.3.23.
어머님은 1905.6.10. - 1987.7.5. 입니다
1920.3.16.일(음력) 결혼을 하여서 10남매를 낳았는데
3남2녀는 잘기르고
4남1녀는 돐 - 4살 때까지 잃었기에
어머니는 항상
" 우리는 반타작만 했어 " 하셨습니다
우리 5남매중
2년전 큰누나가 91세로
올1월에 작은형님이 81세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죽어버린 다른것들 이야기는 안하면서
4살에 죽었다는 해만이 이야기는
10번도 넘게 하셨습니다
살았으면 84세인 큰형님보다 4살위 라고 했습니다
이쁘고 튼튼하고 영리해서 하나 둘 셋도 잘세던 해만이는
마루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지게에 무거운 짐을지고 마당에 들어오면
"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 "
를 부르면서 마루에서 훌쩍 훌쩍 뛰면서 손벽을치면
아버지는 그무거운 짐을진체 얼굴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한나절씩
쳐다보고 서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지게를 벗어놓고 밥을 먹으라고하면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쁘고 사랑했던 해만이가 4살때 홍역을 앓다가 죽어버리자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셋이서는 열흘넘게 눈물바람을 하면서
숫가락도 안잡았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만 정신을차려서 끼니때마다 큰누나에게 밥을 챙겨서
먹였다고 했습니다
다른것들 넷은 옹기 항아리와 포대기에 말어서 묻었지만
해만이는 연정아재한테 쌀다섯되값을 들여서 조고만관을 만들어서 동내앞
공동산에 묘를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안가르쳐주는 아버지를 졸라서 해만이 묘에가서
큰돌로 표시를 해두고 몇번을 가보았고 그때마다 집에올때까지
울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후 큰형님이 태어나서야 해만이를 잊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데릴사위인 우리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전재산인 논3200평 밭1400평을
작은 외할아버님의 (이홍기님) 꼬임에 빠져서 일본에서 줄포로 들여오는
광목 장사를 한다고 전재산을 날려버렸기에
평생을 어머니한데 큰소리 한번도 못하고 쥐어서 살았습니다
춘수리 오막살이에 살면서 논밭이 한평도없었던 작은 외할아버지는
말구루마 10대 분량의 광목을 아버지몰래 정읍 솜니(익산) 군산에다 팔아서
큰돈을 챙긴후 잠적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밥도굶고 줄포 상서 신태인 쌍치 복흥 흥덕등 그분의 연고자를
근한달이나 찾아 다니다가 집에오면 외할머니가 차려주는밥을 언제나
한번에 두그릇씩 잡수셨다고 합니다
작은 외할아버지는 그돈으로 부안 백산면에 논을 100마지기 정도를
사놓고 숨어서 지내다가
외할머니의 고소로 이듬해 정읍경찰서 순사에게 잡혀와서 전주 형무소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사기 사건이 있기전에는 부안촌에서 여름에도 굴비와 쌀밥을 먹는집은
우리집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는 자기 집에서는 식구가 10명이 넘기에 아침밥과 저녁밥만
반그릇씩만 얻어먹고 살었기에
22살짜리 신랑의 종아리 2개가 어머니다리 한개보다 가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설태를 못시키다가 외할머니께서 쇠고깃국 조기 명태등 생선국으로
잘먹이니 8년만에사 큰누나가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큰형이 군대에 갔을때는 매주 일요일날 면회를 시켜주기에 6주간
토요일날은 닭을잡아서 여름이라 상할까봐서 반절쯤 삶아가지고
논산 훈련소로 면회를 갔었습니다
아버지는 군대간 아들이 보고싶어서 어머니한테 함께가자고 사정을해도
차비든다고 아버지는 안데리고 갔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이 찰밥과 닭고기를 따듯하게 잘먹으라고
잘게쪼갠 장작과 백철솥단지와 양은냄비를 밀가루 포대에넣어 손잡이를 만들어서
등계물 정류소까지 꼭 들어다주곤 하였습니다
제게는 참 슬프고 아련한 옛날이야기 였습니다
두승산 말봉
말봉에는 저각자옆 퍽큰 바위에 옛날에쓰던 말과 됫박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유선사 (2015 년사진 입니다)
두승산 정상에있는 절입니다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만있는 절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6.25.휴전협정이 되기전인 7살때에인 53년도 초파일날
저곳에 처음으로가보았습니다
절에 갔다오면서 사탕을 사다준다고 어머니를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구잡스러웠던 나는 어머니몰래 동내 사람들을
따라서 가다가 뒷동내인 독골에서 어머니한테 들켜서 멱살이
잡힌채 등과 엉덩이를 여러대 맞았습니다
지은죄가 있기에 매맞고도 울지도 못했습니다
이웃집 일철이형이 (20살무렵 무슨병으로 사망했음) 말려주어서
매를 덜맞았습니다
검정 고무신을신고 산에오르면서 양말이 없어서 안신었기에
땀이나서 미끄러운 발바닥을 큰돌팍에 닦으면서 올라갔었습니다
소성 초등학교때 4.5.6.학년들은 소풍도 갔던곳 입니다
그때 코스는 삼거리 - 새내방죽 (저수지) - 한정리방죽 -
만수동 - 말봉 - 유선사 였습니다
5km 정도를 3시간정도 걸었던것 같았습니다
97년도에는 저의고향 소성면 주천리에 주둔하고있는 35사단 105연대에서
연대장을했던 대령 2명이 장군으로 진급되는 영광이 있었다고 합니다
육군 전체에서도 똑같은 연대의 선임 후임 연대장들이 한해에 둘다 장군으로
진급한일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풍문에는
이들은 연대장을 하면서 고부에서 유선사에 올라가는
산길 도로와 절도 여러번 보수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연대장들이 장군이 되도록 스님들이 불공을 많이 드려주어서
그런 행운이 있었다고해서 35사단과 육군에서는 유선사가 아주
유명한 절로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
첫댓글 10 여년간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면서 인사 올립니다
샘골산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 드립니다
새해에도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