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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2O 인가? 4장
4장. 능동적 실재주의와 H2O의 실재성
물은 정말로 H2O일까? 나는 물이 정말 H2O이지만 또 다른 것이기도 하다고 결론짓는다. 물의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서 나는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논쟁에 새로운 접근법으로 다가간다. 그 접근법은 실재론이란 우리가 유망한 탐구의 길이라면 무엇이든지 탐구하고 보존하면서 실재로부터 배우는 바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과학에 대한 능동적 실재주의로 명명한다.
나는 실재란 탐구하는 사람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모든 것이며 앎이란 실제의 저항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행위하는 능력이라고 본다. 이 관점은 반실재론자들의 ‘비관적 귀납’을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나는 과학이 ‘성숙했다mature’는 말의 의미를 재고하고 오만함이 아나라 경험함을 성숙의 올바른 토대로 지목한다. 능동적 실재주의의 이상은 진리나 확실성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다원주의적인 앎의 추구이다.
4.1 물은 실재적으로 H2O일까?
1장에서 화학혁명을 논하면서 물을 원소로 간주하는 플로지스톤주의의 시스템을 설득력 있게 반박하는 논증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2장에서는 전기분해도 물이 화합물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논증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3장은 원자화학이 등장하고 반세기 뒤에 찾아온 합의 시점에조차도 물의 분자식 H2O가 옳다는 절대적 증명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라봐지에의 연주에서 시작된 한 세기 동안의 화학은 물의 조성에 관한 논쟁을 종결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는데 실패했다.(더 나중에 물리학이 그런 증명을 제공했는지 여부는 전혀 다른 사안이다) 그럼에도 논쟁은 실제로 종결되었고 ‘물은 H2O다’는 외견상 확고부동한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물은 H2O라는 명제에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옳은 구석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직관의 토대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유형의 질문들은 과학철학자들을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논쟁으로 이끈다. ‘과학적 실재론realism’이란 과학자들은 우주가 실재적으로 어떠한지에 관하여 무엇가를 발견하려 노력해야 하며 이제껏 그 노력에서 꽤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물과 같은 어떤 하나의 사례가 과학적 실재론처럼 광범위한 주제에 관하여 일반적이고 확실한 교훈을 줄수는 없다. 그러나 H2O는 중요한 판례로 구실하게 될것이다. 과학이 우리에게 자연에 관한 진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H2O처럼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학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음을 우리에 확신시킬 수 있어야 마땅하다. 실재론은 말하자면 물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4.1.1 실천 시스템 안에서의 가설 검증 먼저 ‘물은 H2O다’ 같은 주장들이 실재적으로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개관하는 작업을 출발점으로 삼자. 오늘날의 과학적 철학적 상식에 따르면 자연에 과한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가장 좋은 원천은 가설에 대한 진정한 경험적 검증이다. 그러나 뒤엠에 따르면(1906) 가설에 대한 검증은 항상 이론적 집단 전체에 대한 검증이다. 한 실험의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실험을 보증하는 이론들의 집단 전체를 신뢰하는 것에 기초한 행위이다. 이론에 대한 흡족한 입증처럼 보일 만한 것도 그 검증에서 전제된 보조가설들이 배척되면 언제든지 교란될 수 있다.(경제학 이론에서 소비자들의 합리적 행동 기대 가설)
물은 화합물이라는 어떤 검증을 시도하더라도 실험 결과를 물은 원소라는 가설과 일관되게 만들어 주는 대안적인 보조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런 보조가설들 덕분에 캐븐디시, 프리스틀리, 리터 등은 물이 원소라는 가설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의 구체적인 분자적 조성에 관한 가설들의 검증에서도 ‘이븐’(동일부피-동일개수 가설)과 같은 근거 없는 보조 전제들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물은 H2O다’를 검증할 수 없다. 당신이 ‘이븐’ 자체의 검증을 시도해야 한다면 그 검증을 위해 또 다른 보조 전제들이 필요할 것이다.
가설의 검증에만 보조 전제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채택하는 임의의 검증방법은 오로지 그 방법과 정합하는 다른 인정된 실천들 혹은 인식활동들의 맥락 안에서만 타당하다. 이론의 입증은 오직 실천 시스템의 성공의 일부로서만 이루어진다. 실천 시스템의 성공과 별개로 이론의 옳음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따라서 어떻게 이론들이 선택되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 시스템들이 선택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1,2,3장 사례들 각각에서 가설 검증과 이론 선택에 관한 설명은 관련 실천 시스템들이 맥락을 제공하고 논증의 많은 내용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결정적으로 불완전했을 것이다.
실천 시스템들은 어떻게 선택되어야 할까? 우리의 시스템 선택이 우리의 성공을 극대화한다면 우리는 좋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상당히 공허한 개념이다. 성공이란 우리가 욕망하는 온갖 것들의 성취를 가리키는 기호일 따름이다. 따라서 실천시스템이 인식적으로 성공적이라 함은 우리가 지닌 다양한 인식 가치들의 실현에서 그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효과적임을 뜻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존중할 만한 시스템들이 동의하는 결과가 있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참으로 간주해야 하지 않을까? 3장에서 서로 다른 원자화학 시스템 세개가 무척 인상적으로 수렴되는 것을 보았다. 그 시스템들은 H2O를 포함한 현대적 원자량들과 분자식들의 시스템에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어떻게 수렴이 한낱 우연의 일치가 아님을 보여줄 것인가? 가능한 모든 시스템들이 특정한 결과에 도달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필연적으로 참이다. 문제는 과학에서 이런 식으로 불가피한 결과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4.1.2 상상하라! (화학 지식이 없어 제대로 상상하기 어려움ㅠ) H2O를 이루려면 적어도 산소 분자가 산소 원자들로 분해되어야 하는데 산소 원자만 보고는 산소의 속성들을 알수 없다. 만일 수소와 산소가 중성 원자를 뜻한다면 그것들은 간단히 결합하여 물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원자들은 먼저 이온의 성격을 띤 무언가로 변환되어야만 서로 결합할수 있다. 다시말해 물속에 수소와 산소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의 조성이 H2O가 아니라고 하는 좋은 원자화학 시스템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역사를 돌이켜보고 지금은 배척당하는 시스템들이 무엇을 잘했는지 상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화학교육자 시트 테이버(2003)는 오늘날의 표준적인 교육과정이 제공하는 ‘개념적 화석들’이 많은 학생들을 오도하여 제약적일뿐더러 실은 최신의 현대적 이해와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원자를 생각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개념적 화석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원자적 존재론’을 갖도록(물질에 관한 분자 모형에서 원자들에 ‘존재론적 우선권’을 부여하도록) 부추긴다. 화학반응을 고찰할 때 본래의 원자들을 전제하도록 부추기며 온전한 전자 껍질이 바람직하다는 것에 기초하여 화학반응을 합리화하는 설명 틀을 개발하도록 부추긴다. 이 생각들은 물질의 구조에 관한 현대적인 화학적 관점의 발전을 가로막고 분자 수준의 화학적 변화의 본성을 제대로 아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을 한다”
4.1.3 H2O : 다원주의적 진리 다들 알다시피 물은 H2O다. 또한 물은 양전기를 띤 수소와 음전기를 띤 산소의 정전기적 결합의 산물이며 전지를 사용하여 분해할 수 있다. 또한 물은 (무게 유일 시스템에서)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일대일 결합의 산물이다. 또한 물은 원소이며 플로지스톤을 그 원소에 집어넣거나 그 원소에서 빼냄으로써 그 원소로부터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를 생산할 수 있다. 이밖에도 많은 명제들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논리적 상호모순이 발생하는 방향으로 이 명제들을 해석함으로써 단 하나의 명제만 선택하는 것을 강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이 명제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것들 각각이 속한 실천 시스템들의 장점들을 환영하고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자연 자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들보다 조금 더 많은 개념적 가능성들을 허용할 것이다.
4.1.4 지식, 진보, 능동적 실재주의 과학적 실천을 이해하고 촉진하기 위하여 나는 앎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재정향re-orientation 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앎을 믿음이라기보다 능력으로 생각할 것을 말이다. 적어도 실천 시스템 안에 내장된 채로 존재하는 앏을 다룰 때는 앎을 믿음이 아니라 능력으로-실재의 저항에 좌절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의도한 대로 신뢰할 만하게 해내는 능력으로-생각함으로써 새롭고 더 나은 통찰들을 얻을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허위의 배정은 믿음에는 적용되지만 능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능력은 진리값을 보유한 무언가가 아니다) 따라서 앎에서 관건은 진리가 아니다. 또한 능력의 차이는 흔히 흑백의 ‘할 수 있음/없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정도의 차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앎과 참된 믿음의 분리는 인식론으로 하여금 확실성이라는 짐을 내려놓게 한다.
앎에 관한 이 같은 입장은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새로운 입장을 낳는데 나는 그 입장을 ‘능동적 과학적 실재주의’로 칭하려 한다. 나는 실재론을 둘러싼 논의 전체를 진리에 관한 논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다시 실재의 개념을 향하도록 이끌고 싶다. 과학에 대한 ‘실재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혹은 얻어왔는지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실재에 노출시키기로 결심하는 과학적 태도여야 마땅하다.
과학 지식이 각 시스템 안에서 간단명료하게 가능한 것을 넘어서 누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대개 언급되지 않는 보호주의적 다원주의의 귀결이다. 그 다원주의는 다양한 지식 시스템을 살려둔다. 그리하여 시스템 의존적 지식의 누적이 일어나고 이는 오직 시스템들의 누적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4.2 능동적 과학적 실재주의
4.2.1 우리가 실제로부터 배우는 바를 극대화하기 ‘능동적 실재주의’란 용어는 내가 고안했지만 가장 큰 영향력의 원천 하나는 퍼시 브리지먼의 작업주의다. 과학자는 더 높은 반증 가능성과 더 가혹한 검증을 추구해야 한다는 칼 포퍼의 명령도 실재와 더 많이 접촉하라는 요구로 볼수 있다.
나의 논의는 과학적 실재론을 둘러싼 논쟁 전체의 프레임을 바꾸는 시도이기도 하다. 나는 그 논쟁이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과학에 의한 진리의 달성에 초점을 맞추는 관행에서 멀리 벗어나기를 바란다. (바스 반 프라센(1980)의 과학적 실재론의 정의) “과학의 목표는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하여 곧이곧대로 진리인 이야기를 과학 이론들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 이론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 이론을 진리로 믿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이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옳은 명제다” 실재론을 옹호하는 많은 철학자들이 궁극의 진리(Truth)를 과학의 목표로 간주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실제 과학적 실천의 길잡이로 구실하지 못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업가능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란 무엇일까? 외적 실재는 무엇을 뜻하며 외적 실재에 관하여 배우려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 우리 자신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모든 것을 외적 실재로 간주하자고 제안한다. (마이클 폴라니의 실재관) “한 자연법칙을 진리로 간주한다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어쩌면 생각할 수 없는 무한정한 범위의 귀결들에서 그 법칙의 존재가 표출되리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법칙을 우리의 통제 너머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연의 실재적인 특징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앎이란 우리 존재의 한 상태이며 그 상태에서 우리는 성공적인 인식활동을 할수 있다. 그리고 성공적인 인식활동은 오직 실재가 우리의 계획과 예상에 불충분하게 저항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실재로부터 배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상황안에 우리 자신을 놓는 것이다. 배움이 발생하려면 우리는 일어나는 사건들에 우리의 감각들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그런 상황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적절하게 작업화된 개념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경험이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배움을 극대화하려면 우리의 예측이 반박될 개연성이 가장 높은 상황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능동적 실재주의의 가장 뚜렷한 적은 탐구의 길들을 봉쇄하는 교조주의dogmatism다. 능동적 실재주의적 배움의 과정을 방해하는 또 다른 유형의 장애물은 외적 실재와의 접촉 없이 자기 머릿속에서 과학을 규제하는 철학적 원리인 듯한 것들을 생산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서 유래한다.
반실재론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관찰 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이론이 우리를 실재에 관한 더 많은 발견들로 이끄는 발견적heuristic 힘을 지녔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표준적 실재론은 능동적 실재주의를 심하게 방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란 대응이라는 생각에 내재하는 일원주의 때문이다. (칼 포퍼) “새 이론은 아무리 혁명적이더라도 항상 앞선 이론의 성공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포퍼는 한 분야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이 독점권을 누리는 것을 정상과학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했다. 이런 패러다임-일원주의에서, 또 패러다임 이행기의 ‘쿤 상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에서 쿤은 능동적 실재주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했다.
4.2.2 비관적 귀납의 낙관적 해석 비관적 귀납은 성공적인 이론이 틀린 것으로(즉 그 자신도 훗날의 과학에 의해 반박될 개연성이 매우 높은 현재의 과학에 따르면, 틀린 것으로) 판명된 수많은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성공에서 진리로 나아가는 추론을 가로막으려 한다. (스타티스 프실로스 1999) “과학사는 다양한 시기에 오랫동안 경험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세계의 심층구조에 관한 주장들에서 틀린 것으로 드러난 이론들로 가득 차 있다 (---) 따라서 이론의 경험적 성공은 이론이 근사적으로 진리라는 주장을 보증하지 못한다”
나는 비관적 귀납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진리를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가 이토록 성공적일 수 있다니, 이것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라봐지에의 산소 기체는 산성의 요소였고 다량의 칼로릭과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런 산소를 기반으로 삼아서 라봐지에가 얼마나 좋은 화학을 했는가! 전기화학자들은 19세기 내내 원자가 전자를 잃거나 얻음으로써 이온으로 된다는 것조차 모르면서도 많은 성공을 이뤄냈다.
비관적 귀납 시나리오에서 정말로 그릇된 부분은 또 다른 성공적인 새 이론이 등장하여 옛 이론은 틀렸다고 선언하는 듯하면 성공적인 옛 이론은 배척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바로 이 생각을 보호주의적 다원주의는 반박한다. 진리와 성공은 사뭇 다르다. 두 이론이 서로 모순된다면 그 이론들은 둘 다 진리일 수 없다. 그러나 그 두 이론들은 둘다 성공적일 수 있다. 비관적 귀납은 성공-진리 연관성 전제를 깨부수는 데 기여한다. 그 연관성을 끊으면 성공 개념은 진리란 대응이라는 생각에 내재하는 독점성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우리는 다수의 시스템들이 동시에 성공적일 수 있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4.2.3 성공에 기초한 논증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1. 과학은 정확히 얼마나 성공적일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판정할까? 현대 과학은 오로지 과거의 과학과 비교할 때만, 또한 점술, 마법, 투자은행 운영, 정치와 같은 여러 미심쩍은 인간적 사업과 비교할 때만 확실히 성공적이다. (그러니 우쭐대지 말자!) 인류사를 통틀어 우리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것을 목격한 적이 없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다양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인 정도의 성공이다.
2. 과학의 성공은 영속할까?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추론의 토대로 삼고 싶은 성공은 영속적인 필요가 있다. 한때를 지배했지만(고대로마, 중세교회, 공룡 등) 다른 시스템들에게 자리를 내준 이 시스템들과 과학은 왜 달라야 할까? 과학의 전반적 성공이 영속하려면 계속해서 성공적인 결과물을 산출할 역량이 과학이라는 사업에 내재해야 한다. 국소적 성공은 존속할 가망이 더 높다.
3. ‘성공’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평범한 사람들일 보기에 과학은 (원자폭탄과 같은) 실용적 성과들을 내기 때문에 특별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성공적인 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 혹은 공학이며 이 분야의 큰 부분은 기반에 놓인 과학적 원리들에 대한 참된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비행 기술 초기에 유체역학 이론의 수준) ‘과학의 성공’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과학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라도 성취하기일 수 밖에 없다. 정확성, 일관성, 단순성/우아함, 범위/완전성, 통합력, 설명력, 생산성, 검증 가능성, 심지어 보수성까지.
4. 우리는 어떤 유형의 설명을 원할까? 과학철학자들은 평소에 설명에 관한 이론들을 논할때는 대단한 엄밀성을 요구하다가도 과학의 성공에 대한 설명을 다룰 때는 갑자기 정신줄을 놓아 버리고 막연한 직관적 견해들에 의지하는 듯하다. (퍼트넘) 그는 과학의 성공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원한다. (반 프라센의 선택주의적 설명) 과학자들이 경험적으로 부적합한 이론들을 배척하기 때문에 과학은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들로 가득 차 있다
5. 왜 성공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진리에 기초하여 성공을 설명하는 입장으로부터는 유용한 조언이 나올성 싶지 않다. 궁국의 진리는 작업적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능동적 실재주의자가 과학의 성공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면 그것은 성공에 대한 좋은 설명이 더 많고 더 좋은 성공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통찰들을 제공하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6. 우리는 성공으로부터 진리를 추론할 수 있을까? 적어도 어떤 특정한 이론의 진리성은 그 이론의 성공을 함축한다. 그 명백함에 기초하여 ‘최선의 설명을 향한 추론’ 유형의 논증을 펼쳐 성공에서 진리로 나아가는 추론의 정당화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티머시 라이언스(2003)에 의하면 이론의 진리성이 이론의 성공을 보장하려면 우리가 그 이론을 적용할 때 사용하는 모든 보조 전제들도 진리여야 하는데 그럴 개연성은 낮다는 것이다.
성공적임은 이론의 특정한 적용에 귀속하는 속성이다. 우리의 지적에너지를 성공에 대한 ‘심오한’ 설명을 발견하기 위한 논증들에 쓰는 것보다 성공의 촉진에 쓰는 편이 낫다.
4.2.4 성숙을 운운하는 미성숙함 (퍼트넘) “성숙한 과학 이론들 속의 용어들은 전형적으로 무언가를 지칭하며 성숙한 과학에서 받아들여진 이론들은 전형적으로 근사적으로 진리” 취지는 과학이 성숙하면 특이한 이론들은 사라질 것이며 오직 진리성에 기인한 성공만 존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프실로스) 열물리학은, 영구운동은 불가능하다는 원리, 열은 따뜻한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흐른다는 원리, 뉴튼 역학의 법칙들과 같은 배경 믿음들이 확립되면서 비로소 성숙했다.
과학은 성숙함에 따라 점점 더 통일되고 더 안정화된다는 견해는 표준적 실재론자들의 통념인 듯하다. 통일성과 안정성은 근사적으로 진리이며 정말로 지칭하는 바가 있는(?) 이론들의 집합에서 우리가 바랄만한 속성들이다.
흥미롭게도 현재의 첨단 과학은 과학이 성숙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갖게 만든다. 쿤이 지적했듯이 전문화된 하위 분야들의 급증은 현재 과학의 지배적 특성이다. 심지어 물리학에서도 오늘날의 경향은 전문화와 파편화(우주의 자이로스코프, 고온 초전도체의 임계온도 등)
또한 우리가 직관적으로 성숙했다고 간주할 법한 과학들이 특별히 안정적인지도 불명확하다. 정반대로 가장 성숙해 보이는 이론들이 가장 혁명적인 격변을 겪어왔다. 쿤의 관점에서 패러다임은 성숙하여 자신의 잠재력의 한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대개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라봐지에 화학, 베르셀리우스 전기화학, 뉴튼 역학, 뉴튼 광학, 기하광학, 맥스웰 전기역학 등 반론의 여지없이 성숙했던 이 이론들 각각은 근본적인 이론적 핵심에서 붕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성숙의 개념이 실제로 유용한 개념이며 매우 흥미로운 통찰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숙의 상호 연관된 두 측면 1) 발전 과정에서 충분히 진행된 후기 단계에 이른 과학은 어떤 모습을 띨까? 2) 성숙한 과학자나 성숙한 과학자 공동체는 과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까?
성숙한 과학은 자신에게 적절한 영역을 알고 자신들의 성공과 실패들을 반성할 기회를 통해 자신의 주요 장점과 약점들을 알것이다. 그 과학은 자기 내부에 잘 발전한 전문 영역들을 보유하고 특수한 영역은 특수한 방법들을 필요로 하고 효과적인 작업을 위한 특수한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여러 과학사적 발전 과정을 고찰 했을 때 과학의 발전 패턴들은 여럿이며 다양하다. 성숙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관하여 그릇되게 통일된 견해를 고집하는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성숙한 과학자와 과학자 공동체는 끈질기게 묻는 태도를 겸비한 관용, 겸허함, 신중함을 높게 평가하고 인간의 연약함과 오류 가능성, 자연의 다양한 복잡성에 대한 자각을 드러낼 것이며 그 자각을 담아낼 수 있는 제도적 구조들을 창출하려 애쓸 것이다. (윌리언 니컬슨의 저널, 라봐지에 공동체 vs 플로지스톤주의 공동체)
내가 실재를 생각하는 방식에 적합한 성숙한 인식적 태도는 심리치료사 에르네스토 스피넬리(1997)가 말하는 “아니 알기un-knowing” 곧 우리의 관계경험에 등장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최대한 열려 있으려는 노력, 익숙한 듯한 것, 혹은 우리가 의식하거나 잘 아는 것을 참신하고 고정되지 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기존에 검토되지 않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다루려는 노력이다. 이것이야말로 겸허한 실재 추구자가 채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다.
4.3 표준적 실재론의 파리 병에서 빠져나가기
4.3.1 진리와 진리의 여러 의미들 (오스틴, <진리> 1950) 진리는 실체substance일까, 아니면 질quality일까 아니면 관계일까 하는 질문을 제기. “그러나 철학자들은 자신의 체급에 더 적합한 주제에 열중해야 한다.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오히려 ‘진리임’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술속에는 진리(truth)가 있을지 몰라도 냉철한 학술토론회에서는 진리임(true)이 있다.”
(Truth 1) 본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와 정확히 대응하게 진술한다는 의미(배가 고프다 또는 언덕 위의 눈표범을 본 것 같다 등) 이 의미의 truth는 대응에 관한 것이지만 단지 내가 말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바 사이의 대응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의미의 대응은 진리와 관련해서 우리가 지닌 유일하게 작업가능한 대응 개념이다.(이 대응 개념을 내가 생각하는 바와 외부 세계가 어떠한가 사이의 대응이라는 작업 불가능한 개념과 뚜렷이 구별할 필요가 있다)
(Truth 2) 정의에 따라 진리인 것들.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
(Truth 3) 일부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주어진 바로 바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아서 활동할 때 전제-채택에 의해 진리로 된다. 공리나 공준, 빛의 속력은 관찰자나 광원의 운동과 상관없이 동일하다(아인슈타인)
(Truth 4) 논리학의 맥락 안에서 명제들은 당사자의 작업에 속한 논리 시스템의 공리들에 따라서 다른 진리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면 진리다. 만일 P가 진리고 Q가 -P(=Not P)를 함축하면 Q는 진리가 아니다
(Truth 5)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가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옳음correctness 검사를 상황의존적contingently으로 통과하면 우리는 그 명제를 진리true로 인정한다. ‘염소의 원자량은 대략 35.5다’라는 명제는 진리일까? 우리의 작업이 속한 특정 원자화학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원자량 측정을 위한 구체적 절차들을 가지고 있으며 저 명제가 진리인지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판결이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이라고 주제넘게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 판결은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만 확정적이며 이런 의미의 진리는 일차적으로 또한 가장 중요하게 그 시스템의 나머지 부분과의 정합성에 의존한다.
나의 교설인 능동적 실재주의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진리 개념은 진리5다. 나머지 진리1부터 진리4까지 각각도 탐구에 필수적인 다양한 인식활동들과 연결되어 있다. 즉 경험의 보고, 개념의 정의, 탐구를 가능케 하는 전제의 채택, 논리적 도출과 연결되어 있다.
4.3.2 확실성 함정 진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확실성의 개념을 적절하게만 적용하고 부적절한 곳에서 확실성을 강요하는 것을 자제한다면 확실성의 개념을 버릴 이유는 없다. 우리가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한다면 과학에 대한 임의의 다른 입장과 마찬가지로 실재론도 절대적 확실성을 제공할 수 없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진리로 만들거나 받아들이는 것, 곧 진리2와 진리3이다. 경험적인 사안들(진리5의 후보로 머물러 있는 명제들)을 다룰 때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확실성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잘해나갈 것인가다. 오늘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확실성보다 확률을 더 많이 거론하곤 하는데 이는 건강한 경향일 수 있다.
우리가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면 확실성이란 실은 탐구의 종결일 것이며 탐구의 종결은 능동적 실재주의의 정반대다. 만약에 언젠가 모든 변칙 사례들을 제거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등장한다면 그 패러다임은 연구를 지원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쿤의 견해를 상기하라.
4.3.3 구조 최근에 아주 많은 관심을 받는 구조적 실재론 : 우리는 오로지 우리 이론의 수학적 혹은 구조적 내용만 인식적으로 전념해야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서로 매우 달랐지만 등속원운동은 두 이론 모두의 본질적 구조적 부분이었다.
4.3.4 지칭(쌍둥이 지구여, 안녕) 힐러리 퍼트넘의 쌍둥이 지구 : 쌍둥이 지구는 실제 지구와 거의 똑같은데 다만 그곳의 바다, 강 등은 모든 관찰 가능한 양태에서 H2O처럼 행동하는 복잡한 화합물 XYZ로 채워져 있다. 그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라는 단어는 H2O를 지칭할까 아니면 XYZ을 지칭할까?
우리는 과학자들 본인이 가장 새롭고 좋은 과학으로 판정한 것을 추종해야지 ‘물은 H2O다’ 같은 고리타분한 근사적 지식을 추종하면 안된다. 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벌써 오래전에 이 근사적 지식을 넘어섰다. 우리는 현재 화학에서 통용되는 물의 개념을 살펴보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헨드리 2008) 거시적인 물 집단은 다양한 분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역동적인 뭉치이며 그 안에서는 개별 분자들의 해리, 이온들의 재결합, 소중합체들의 형성, 성장, 해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H2O 분자들 사이에서 그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물은 우리로 하여금 물을 물로 인정하게 만드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