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2)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나왔나?
(3) 삼관경관(三管境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4)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삼조선(三朝鮮)
(5)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의 운명과 국가로서의 삼한의 영토운명은 함께 가는 것인가?
(6) 삼한관경(三韓管境)은 땅에 그은 금인가, 종족을 따라다니는 울타리인가?
(7) 삼한관경(三韓管境)에 속한 나라들은 병립하기만 하였는가?
(8) 각 시기의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은 삼한관경(三韓管境) 안의 여러 나라에서 통일성이 있었는가?
(9)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살다보니 한 물건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만든 것도 아니요, 제가 처음 찾아낸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니는 큰 길 바로 옆에 마치 이정표처럼 늘 거기 있었는데, 그 길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길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사람들은 문득 스스로 길을 다니던 그 길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합니다. 길잡이로 쓸 뭔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늘 보던 그 물건이 길잡이로 쓰일 요긴한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물건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져서 몇 사람을 빼고는 존재 여부를 고심해 보지조차 않았습니다.
이 물건은 無知愚昧한 제가 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요행히 힘겹게 짊어졌다 한들 제대로 쓰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렇게 길 가에 쪼그리고 앉아 이 물건에 하염없이 잔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 물건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갈 날을 기다리며... 그러면 쪼그렸던 저린 다리를 펴고 이 몸은 졸래졸래 따라갈 터인데...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우리 겨레 삶의 터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삼한관경(三韓管境)에 근거하여 우리 겨레의 옛사람들이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던 눈을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늘 우리 곁 잘 보이는 곳에 있었던 물건이 바로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입니다.
(이하 존칭 생략)
(2)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나왔나?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말은 僞書의 논란이 있는 <桓檀古記>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한(환)단고기>는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 선생이 교열(校閱)하고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 ~1920) 선생이 합본한 것인데,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李裕?)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참고로,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라고 한다.
이 <桓檀古記>(차라리 漢字를 쓰자, 환이니 한이니 말이 무성하여...)는 우리나라 사학계와 역사교육계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답답한 마음을 가진 분들은 정규 교단의 자리에 있는 林承國 교수나 한영우 교수 등등의 긍정적 評을 열심히 언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품질을 알 수 없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中古品에 유명 감정가의 감정서를 눈에 띄게 붙이듯이...
나의 이 글에서 이 僞書論爭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없다. 그럴만한 지식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지만, 무엇보다도 이 글은 그 논쟁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문구를 보고, 이 글에서 뭔가 통쾌한 것을 혹시나 기대한 분들께는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이 <桓檀古記>는 삼성기 상(三聖紀 上;안함로 찬(安含老 撰)), 삼성기 하(三聖紀 下;원동중찬(元董仲 撰)), 단군세기(檀君世紀;이암 편(李椎 編), 북부여기(北夫餘紀;범장 편(范樟 編)),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범장 편(范樟 編)), 태백일사(太白逸史;이맥 찬(李陌 撰)) 의 5개 서(書)와 운초 계연수가 광무(光武) 15년(신해(辛亥), 1911년) 5월에 합본하여 머리글로 써놓은 범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은 <太白逸史>에 세군데(맞나요?) 쓰여 있다.
참고로, 이 <太白逸史>는 조선 중종때 이맥(李陌;1455~1528)이 전한 책이라고 하는데,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환국본기(桓國本紀)」,「신시본기(神市本紀)」,「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한(九桓)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모두 통합하였다...]
<태백일사 신시본기(神市本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비王)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景)으로 삼한(三韓)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내용은 마한과 번한의 세가]
위의 기술이 史實이냐 아니냐의 與否에 관계없이 분명한 事實은 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말이 만들어져 쓰였는데, 그 뜻은 옛날에 역사적 영역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게 언제였을까?
<桓檀古記>를 詐欺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최소한 이유립(李裕?)이 이 책을 영인하여 출판한 1979년 이후로는 국민들의 일부에서나마 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조금만 사려가 깊다면, 이런 방대한 내용을 이유립(李裕?) 혼자서 창작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더구나 일제강점 이후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생각한다면, 한가하게 <桓檀古記> 수준의 내용을 창작할 생활상의 여력이 없지 않았을까?
최소한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생각의 뿌리는 일제강점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만일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선생과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 ~1920)선생으로부터 그의 제자 이유립(李裕?)으로 이어지는 學脈을 인정한다면, 1363년(공민왕 12)에 <단군세기>를 전했다는 문정공 이암(李椎)선생의 현손인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맥(李陌;1455~1528)이,〈태백일사>를 편찬했다는 것은 事實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용어의 사용시기는 조선중기 및 그 이상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3) 삼관경관(三管境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민속학에서 우리 겨레는 3 자를 즐겨 쓴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출처는 ?, 죄송^^).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 선조들은 우리 겨레의 삶의 터를 (그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는 개념(이를 三管境觀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앞서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 관경(管景)으로 삼한(三韓)으로 나누었는다"는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개념이 조선 중기까지도 비록 소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나마 있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그런데 과연 우리 겨레의 삶의 터를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는 개념(三管境觀)이 15세기 조선 중기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가?
"고려시대에는 거란ㆍ금ㆍ고려를 아예 삼한(三韓)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죠[허흥식編,『韓國全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1984) 崔思全 墓誌]"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10>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에서 재인용)
(제가 게을러서 이 책이 무엇을 근거로 이런 기술을 했는지 확인을 못했습니다^^)
<고려사>에 보면,
[건녕 3년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도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성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자 궁예가 그에 따라 왕건에게 성을 쌓게 하고 그 성을 지키는 성주로 삼았다. 이 때 왕건의 나이 20세였다] (여기서 왕융은 고려 태조의 부친으로 후일 추존하여 고려의 세조(世祖)가 되는 분입니다].
[原文] 乾寧三年 丙辰 以郡歸于裔裔大喜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使太祖築勃禦塹城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高麗史』太祖紀).(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10>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에서 재인용)
<고려사>는 조선 초기에 우여곡절 끝에 나온 책이다. 어쨌거나 최소한 조선 초기에도 우리 겨레의 삶의 터를 조선ㆍ숙신ㆍ변한(朝鮮肅愼卞韓) 이렇게 세 개로 나누는 개념(三管境觀)이 있었다. 만일 왕융(王隆)과 궁예(弓裔)사이의 이 대화(對話)를 조선 초기 건국공신들의 조작(造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羅末麗初에도 삼관경관(三管境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三國史 崔致遠 列傳>에서 최치원공(857~ ? )은 태사시중에게 올린 편지(일종의 비자신청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 월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 연, 제, 노의 땅을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原文]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여기서는 삼한의 위치를 고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므로, 동쪽 바다 밖(東海之外)이 어딘지는 고려하지 않겠다. 아울러 진한/변한 --> 신라 ; 마한 --> 백제 ; 부여 --> 고구려가 되었다고 쓴 김부식공(1075-1151)의 삼국사 본기(三國史 本紀) 첫부분과 여기의 최치원공의 말이 어긋나 보인다(그냥 어긋나 보이기만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는 것도 잠시 제쳐 두기로 한다.
김부식공이 황명을 받아 삼국사(三國史)를 편찬한 것이 1145년(인종 23)경이니, 이 시기에도 너무나 우연처럼 삼관경관(三管境觀;고구려-신라-백제)이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만일 김부식공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면 9세기 중-후기의 최치원공도 삼관경관(三管境觀)을 가지고 있고, 그 중에서도 그야말로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4)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삼조선(三朝鮮)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천재적인 직관력과 해박한 고전지식을 바탕으로 所謂 "古記類"를 앞세우지 않고서도 우리의 옛역사에 "三朝鮮이 分立"하고 있었음을 간파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는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본디 이 책은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 <조선상고사>, 특히 제3편 삼조선(三朝鮮)분립시대는 이 글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만날 것을 기약하며, 첫구절을 인용해야 하겠다.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 ·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불 ·말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 (大王) 이요 , 불·말 두 한은 부왕(副王)이다 . 삼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 (弁韓)이라 기록된 것이고 ,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 ·막(莫) ·번(番)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 (音譯) 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用字) 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古典)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 지나사(支那史)에는 왕왕 보인다..."
(<조선 상고사(丹齋 申采浩)> 제3편 삼조선(三朝鮮)분립시대 제1장 삼조선의 총론 1. 삼조선 명칭의 유래)
여기서 신채호 선생은 '삼한(三韓)이라는 용어가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삼조선(三朝鮮)이라는 관경이 분립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연히 한(韓)은 우두머리의 의미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특정 種族(그리고 그 종족이 세운 나라와 그 영향권 하의 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을 가능성도 고려하여야 한다.
혹시 단재선생은 朝鮮이 주도권을 내준 이후 어느 시기에 주도권을 잡은 韓이라는 종족(물론 같은 우리 겨레이지만)의 管境을 뜻하는 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계속 묶어 두어, 朝鮮이 역사의 주도권을 내주었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단재 선생의 삼조선(三朝鮮)분립론(감히 論자를 붙일 수 있다면)과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단재 선생에게 역사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역사적 아(我)가 되려면, 상속성(相續性;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끊어지지 아니함)과 보편성(공간에 있어서 영향의 파급)이라는 두 개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檀君 → 箕子 → 衛滿(四郡二府)/三韓 → 삼국(高句麗/百濟/新羅) 혹은 檀君 → 箕子 --> 馬(三)韓/衛滿 → (三國) → 統一新羅 라고 하는 기존의 正統論을 깨고, 단군 --> 부여 --> 고구려 로 계승되는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正統論을 제시하였다.
이만열(李萬烈), <丹齋 申采浩의 古代史 認識>
그러면서도 "우리에게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와, 우리 문화의 강보(襁褓)에서 자라온 일본이 우리의 큰 적이 되어 있는 사실"과 "흉노.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의문"을 고심하였다.
<丹齋 申采浩의 古代史 認識>이라는 글에서 이만열(李萬烈) 선생은 "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史書인 <<三國史記>>를 비롯하여 그 뒤의 <<三國遺事>> 등에는 그들의 역사인식을 제대로 체계화시켜 놓지 않았다"라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발상을 바꾸어 단재선생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당연히 김부식공과 일연선사의 시대사람에게도 "역사적 아(我)"의 상속성과 보편성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 초에 이르러 우리 나라의 역사를 체계화시켜 인식하려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는데, "정통성을 확립시키는 문제는 역사체계화의 방법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판단하에 지나식 정통론(이것을 소중화주의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요?)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느덧 단재선생도 이만열(李萬烈) 선생도 우리도 그런 생각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옛 책이 체계가 없다고 느낀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단재선생의 삼국사(기) 비판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바로 역사인식의 체계가 없어 보이는 <三國史(記)>(<三國遺事>는 모르겠지만) 속에있는 우리 고유의 역사적 아(我)의 상속성과 보편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5)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의 운명과 국가로서의 삼한의 영토운명은 함께 가는 것인가?
모든 사람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모든 나라는 흥망성쇠가 있다.
삼한을 제대로 된 국가라고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그 정치체(국가의 수준이 아니라 해도)도 흥망성쇠를 겪었을 것이다.
왕부(王符) 의 잠부론(潛夫論)에 , '주나라 선왕(宣王) 때(BC 827 ~ 782)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韓)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韓) 인데 위만(衛滿)(BC 194 ~ BC 180)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 (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조선 상고사(丹齋 申采浩)> 제3편 삼조선(三朝鮮)분립시대 제1장 삼조선의 총론 4. 삼조선 분립의 시초 에서 재인용)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언제 나온 책인지는 모름^^그냥 빼긴 지식)>에는, 한(韓)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한(韓)은 옛 나라 이름이다. 지금의 하북성 고안현(北京 남쪽 1백리 정도) 동남이다. 좌전에서 말하는 한( )이며, 진(晉)나라 때의 한(韓)이다
[원문] 韓古國名, 在今河北固安縣東南, 漢之三韓, 卽其後, 左傳所謂 晉應韓…
<2> 역시 옛 나라 이름이다. 지금의 섬서성에 있는 한성현(韓城縣:西安 위 산서성과의 접경지대) 남쪽이다.춘추시대(BC 770 ~ 453)에 진(晉)나라에 들어왔다. 그 후 6국(전국시대?; BC 453 ~ 221)의 한(韓)이 되었다. 좌전에 의하면, 곽( )·양(楊)·한(韓)·위(魏)는 모두 희씨(姬氏) 성을 지니고 있었다. 진(晉)나라에게 망했다.(秦이 아니라?)
[원문] 亦故國名 在今陝西韓城縣南, 春秋時入於晉, 六國之韓卽其後, 左傳所謂 곽楊韓魏, 皆姬性也, 而晉滅之.
<3> 전국시대의 국명이다. 춘추시에 진(晉)은 한무자(韓武子)를 한원(韓原)에 봉했다.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 남쪽 8십리다. 그후 대대로 대부로 내려왔다. 주나라 위열왕(威烈王;32대, BC 418년 癸未) 23년에 조(趙)·위(魏)와 더불어 晉나라를 삼분하여 (周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한(韓)나라의 도읍지는 평양(平壤?)이다. 지금의 산서성 임분현에서 다스렸다.
[원문] 戰國時國名, 春秋時晉封韓武子於韓原, 在今陝西韓城縣南八十里, 其後世爲大夫, 周威烈王二十三年, 與趙魏分晉列諸侯, 都平壤, 今山西臨汾縣治, 中略.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진(晉)나라를 찾아보았다.
<1> 진(晉)나라이다. 도읍은 낙양이다. 지금의 하남성 낙양현 동북 20리에 있다. 민제 때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 13리에 있다.
<2> 주나라 때의 국명이다. 희(姬)성이다. 지금의 산서성 태원현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문] 國號晉, 都洛陽, 在今河南洛陽縣東北二十里. 愍帝徙都長安, 在今陝西長安縣西北十三里…周國名, 姬姓…在今山西太原縣北…
이십오사(二十五史)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로 바다가 있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고 있다. 나라의 방경은 4천리다. 3종이 있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조일청의 말에 의하면, 변한은 후한서에 보면 변진으로 되어 있다. 변진은 별도의 나라로 보일 것이나, 같은 나라다. 이 당시에는 마땅히 변한이며, 당연히 삼한에 속한다. 왕회분의 말에 의하면, 진서·양서 두 책에는 변한으로 되어있다…
한서 조선전에 의하면, 진번은 진국이다. 위의 책을 볼 것 같으면 천자조선국(?)이었다. 사고의 말에 의하면 진은 진한의 나라다. 후한서 광무제(AD 25년) 건무 20년 가을에, 동이한국인들이 무리지어 낙랑 땅에 이르렀다.
동이는 진한, 변한, 마한이 있었는데, 이를 삼한국이라 한다.
양서에는, 진한은 처음 6국이 있었으나, 점차 12국으로 갈라졌다. 신라가 그 중 한 나라다. 마한은 54개 국이 있는데, 백제는 그 중 한 나라다.
구당서에 의하면, 백제국은 마한의 옛 땅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에 있는데, 그 백성들은 서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며, 씨도 뿌리고 곡식도 심었으며, 양잠을 했고, 목화도 심고 무명옷도 만들었다.각기 거느리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큰 자는 스스로 신지라고 이름했다.
[원문]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趙一淸曰弁韓後漢書作弁辰, 然弁辰別是一國, 則此當作弁韓, 以當三韓之數…王會汾曰, 晉梁二書, 皆作弁韓…朝鮮史, 謂三韓誰曰分立實則辰弁二國, 僅爲馬韓所支配, 非勢均力敵也…
漢書朝鮮傳,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朝鮮雍閼, 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後漢書光武帝紀建武二十年秋, 東夷韓國人率詣樂浪內附, 東夷有辰韓, 卞韓馬韓謂之三韓國也, 梁書, 辰韓始有六國, 梢分爲十二, 新羅其一也, 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 舊唐書, 百濟國, 爲馬韓故地,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발상의 전환을 위하여 길게 인용하였지만(부끄러운 역사지식 수준을 타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간추리면, 한(韓)은 BC 827 ~ 782 시기 연나라 근처에 있다가, BC 770 ~ 221 경에는 서쪽으로는 하북성 고안현-섬서성 한성현-산서성 임분현(도읍지는 평양(平壤))에도 있었다. 동쪽에 있던 韓은 위만(衛滿)(BC 194 ~ BC 180)에게 토벌당해 해(海)땅으로 옮겨가 살았다.
그러다가 나라가 커져 둘레가 각 4천리(1600km?; 方可四千里)되는 큰나라가 되었고(이것이 최대 강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배운대로 한반도 남부(대략 마한은 충청도/전라도, 진한은 경상북도/강원도남부, 변한은 경상남도남부)에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아니면 마한이 북에서부터 남으로 영역을 옮겼다고 생각해도 좋다.
다만, 다 가능성의 이야기라는 것만은 서로 공감해야 할 것이고, 어떤 주장이 더 타당한지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라는 것만 인정한다면 족하다.
만일 "삼한관경(三韓管境)"이 삼한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시기에 있었던 영토의 개념이라면, 이런 삼한의 흥망은 당연히 영토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패망 후에는 영토가 없어졌으므로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거나 별로 의미상 유용하지 않은 용어가 되는 것이 정상적이다.
과연 그러한가?
앞서 든 예들을 포함하여, 삼한의 이름이 들어가거나 혹은 우리겨레의 활동 영역을 세개의 덩어리로 보는 개념들을 열거하여 비교해 보자.(제 지식수준을 용서하시기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삼조선 ; 신/진(眞)-말/막(莫)-불/번(番) 삼조선 = 辰韓-馬韓-弁韓
<三國史 崔致遠 列傳> ;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
<高麗史>太祖紀 왕융이 궁예에게 한 말 ; 朝鮮 - 肅愼 - 卞韓
김부식공의 <三國史> 本紀의 이름 ; 신라 - 고구려 - 백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8권 <遼史地理志> 高州三韓縣 ; 辰韓爲夫餘, 弁韓爲新羅, 馬韓爲高麗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世紀 四, 三韓편<三韓通寶> ; 辰韓爲扶餘, 弁韓爲新羅
<北史> ; 辰韓爲新羅, 馬韓爲高麗
허흥식編,『韓國全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1984) 崔思全 墓誌] ; "고려시대에는 거란ㆍ금ㆍ고려를 아예 삼한(三韓)이라고 불렀다"
이런 글들을 보면, 우리겨레의 영역을 3개의 덩어리로 나누고 있으며, 삼한(三韓)을 그 준거(準據)의 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분류에 들지 않는 조합이 있으니 <遼史地理志>나 <三韓通寶>에 나오는 진한-->부여 및 변한-->신라 가 그 예이다. 이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일면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하여는 나중에 논의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논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를 들어 "신/진(眞)朝鮮 --> 진한(辰韓) --> 신라(新羅) ~~ 朝鮮 ~~ 고려"가 적절한 연관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의 핵심은 우리 선조들이 각 역사시기의 활동영역을 세개의 덩어리(管境)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과, 그런 세개의 덩어리(管境)를 반복적으로 삼한(三韓)에 준거(準據)의 틀을 두고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보아온 대로, 그 답은 "그렇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옛사람들은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으로 다시말해 삼한관경(三韓管境)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던 아니겠는가?
그런데 삼한관경(三韓管境)이 三韓의 역사운명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준거(準據)의 틀로서 작용을 하겠는가?
그러하니 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은 애초에는 삼한(三韓)의 영토영역에서 출발하여, 특정 국가의 영토개념을 뛰어 넘는 '우리 겨레의 활동 영역'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종족 혈통의 개념에서 나와서 그 해당 종족의 터전으로 인식되는 개념인가?
(6) 삼한관경(三韓管境)은 땅에 그은 금인가, 종족을 따라다니는 울타리인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에서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를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고 혹은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중략)...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곳[地],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랍고 천재성이 번득이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옛 책들을 보면, 여러 種族과 여러 前時代 나라의 遺民과 流民이 삼한관경(三韓管境) 안팎으로 드나들며 흥망성쇠를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크게든 작게든 땅의 이름을 바꾼다.
그러다가 어떤 종족은 다른 종족에 흡수되고 혹은 어떤 종족은 다른 종족과 통합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종족 울타리의 변화를 알아내는 것은 바로 "때[時],곳[地],사람[人] 라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를 밝히는 한 방법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마한, 진한 및 변한이라는 나라(혹은 同名의 우두머리가 다스리는 지역)를 밝히는 데에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삼한관경(三韓管境)과 역사적 국가로서의 삼한(삼조선)의 영토는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다.
삼한관경(三韓管境)은 한때는 국경선(國境線)이자 종족의 울타리였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국경선(國境線)도 아니요 종족의 울타리도 아닌, 그것들을 뛰어넘는 개념이 된 것이다.
삼한관경(三韓管境)이 한때는 국경선(國境線)이자 종족의 울타리였기에, 삼한의 국경선이나 소속 종족의 움직임을 따라가면 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밝힐 수 있을까?
아마도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사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여기가 삼한관경(三韓管境)이다'라고 명시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역사의 흐름에 따른 삼한(三韓)의 국경선(國境線)을 다 밝힌다 해도 어느 시점의 국경선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개념으로 작용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숲속에 들어서서는 숲의 전체 규모를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숲을 나와 조망(鳥望 bird's view)을 해야 할 일이다.
위에서 삼조선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고 하였으나, 우리는 삼조선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충분한 사료가 없다.
마한-진한-변한 삼한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고 하였으나, 이도 연구가 부족하다.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고 하였으나 논란이 많고, 기본 사료인 삼국사(기)에 대해서 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다. 이해를 못하면서 비판을 한다. 마치 먹어보지 못한 음식의 맛을 평하는 것과 같다.
朝鮮 - 肅愼 - 卞韓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고 하였으나 朝鮮도 肅愼도 卞韓도 또한 제대로 알 지 못하는 일이다(이 말을 듣고 있던 궁예는 이 뜻을 몰랐겠는가?).
"고려시대에는 거란ㆍ금ㆍ고려를 아예 삼한(三韓)이라고 불렀다"는 이 말에 이제 겨우 감(感)이 온다. 이 놀라운 간극(間隙)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물론 거란ㆍ금ㆍ고려의 영토를 합친 것이 삼한관경(三韓管境)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은 비슷할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고, 다시 <삼국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중국측 사서, 일본, 몽골드의 사서, 아라비아 및 인도의사서 등등 있는 사료들과 고고학적 발굴, 비교 언어학, 신화학, 복원학, 역사 지리학 등 여러 다른 관련 학문분야와 협력하여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를 복원하고, 삼한시대를 복원하고 삼조선시대를 복원한다면, 이번에는 거꾸로 거칠게 판단을 내렸던 오류들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반복과정(큰 준거의 틀에 입각한 사료의 해석과 그 해석에 근거한 새로운 준거 틀의 수립)은 애초의 삼한관경(三韓管境)에 대한 가설 즉, "거란ㆍ금ㆍ고려의 영토를 합친 것이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는 거친 가정(coarse assumption)을 정상화 시킬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3요소를 史實에 근거하여 복구한 역사는 역사가의 의무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7) 삼한관경(三韓管境)에 속한 나라들은 병립하기만 하였는가?(주도권 해석의 문제)
김부공의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신라-백제 및 그 외 여러 나라들은 서로 돕고 또 서로 싸운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나라가 으뜸이라는 생각이 왜 안생기겠는가?
신채호 선생은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 불·말 두 한이 그 부왕(副王) 이었으므로"라고 하여 신/진(眞)朝鮮의 주도를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38년(서기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여기서 三韓은 馬韓이 주도하였고, 삼국의 건국시기(기원전후)에 오면 이 주도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대개 삼한은 馬韓-辰韓-弁韓의 순서로 써 있다.
김부공은 삼국사(기)의 본기의 순서를 신라-고구려-백제로 배열하였다. 이는 아마도 김부식공은 자신의 삼국사(기)가 다루는 시기동안의 주도는 신라가 하고 있었다는 판단에서 그리 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遼史地理志>나 <三韓通寶>에 나오는 진한-->부여 및 변한-->신라 라는 기술은 어쩌면 삼국사(기)의 어느 시기에는 "진한-->부여 및 변한-->신라"라고 쓰는 것이 적절했던 시기가 있지는 않았을까?
이렇듯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에 입각하여 옛사람들이 우리 겨레의 역사를 남겼다 해도, 역사의 시기를 어떻게 나누느냐와 그 시기의 역사적 주도권(主導權)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다소 다른 기록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배운 삼국시대의 흐름이 대체로 史實에 부합된다고 보고, 고구려 패망시기까지를 역사의 한마디로 간주하여 역사책을 쓴다면, 고구려-신라-백제의 순서로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맥(脈)을 잇는다고 생각하는 나라라면, 자신의 나라(예를 들어 大辰國)와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 이전의 역사(부여)를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역사기술을 쓸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역사 해석과 기술의 난맥상이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에 입각하여 쓰여진 역사에 본디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아무리 종족상의 동족이라도 어찌 한 겨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분위기라면 애초에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은 몇몇 이상가의 지적 장난이 史書에 남은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8) 각 시기의 삼한관경관(三韓管境觀)은 삼한관경(三韓管境) 안의 여러 나라에서 통일성이 있었는가?
이 문제가 바로 중화사이관(中華四夷觀)이 움튼 계기이며, 우리의 역사해석이 김부식공을 필두로 서서히 小中華主義로 흐르게 된 까닭이며, <桓檀古記>류의 글들이 조선-부여-고구려-대진의 역사관을 부추기는 근거이다.
역사를 위대함만 추려 쓴다면, 그 나라와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인정받는 동안은 그 쓰임새가 참으로 놀라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흔적을 남긴 그 오랜 세월을 돌아 보면, "달은 차면 기울고, 산은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아울러 그렇게 다시 초라해진 "위대한" 사람들은 도통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니, 그들에게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지혜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긴 세월 중에 "중화(中華)"가 스스로 역사를 만든 날이 그 몇 날인가?
중화사이관(中華四夷觀)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덫과 같은 것인데, 우리는 어찌하여 이를 부러워 하는가?
여기가 바로 단제 신채호 선생이 막혀서 헤매이던 그 話頭의 현장이다.
"우리에게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와, 우리 문화의 강보(襁褓)에서 자라온 일본이 우리의 큰 적이 되어 있는 사실"과 "흉노.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의문"이 바로 여기서 자라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소중화사이관(小中華四夷觀)의 작은 덫에 걸렸고, 이제 곧 빠져 나올 것이거니와, 황차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중화사이관(大中華四夷觀)의 큰 덫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니...
(9) 맺음말
짐을 온통 덜려고, 짐을 세상에 내보였습니다.
저더러 지라고 한 짐이 아닌데, 덜컥 짐 지키는 꼴이 되었으니...
부디 누가 있어 이 짐을 떠안아 가십시오.
無知하고 愚邁하지만 겨우 부끄러움은 아는지라, 마치 길가에 벌거벗고 서있는 심정이니, 이렇게 몇날을 버티겠습니까?
만일 이 글로써 앞으로 우리 살아가는 일에 그나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일일이 다 밝힐 수 없는 先知先學의 德이요,
혹여 이 글로써 작은 먼지일지언정 세상을 어지럽힌다면, 스스로의 몽매(蒙昧)를 깨우치지도 누르지도 못한 이 몸의 탓이 올시다.
첫댓글히즈 퍼즐님 아마 한단고기를 편찬햇던 북애자할배도 님과 마음이 같을 것입니다. 이제 그 짐도 같이 나누어 집시다. 그게 우리가 이렇게 역사를 논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연구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생각이 단순합니다. 요즘 제가 기억력이 떨어져? 조목조목 글 답이 안되네요. 님의 글에 친근감도
가고 이해합니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우린 국가관념보다 민족관념이 더 깊습니다. 요즘엔 다르지만 옛날엔 우리나라 이런소리 안하고 우리민족이 어떻고 하죠. 어느 가수? 김승준? 군대 때문에 한국국적 포기했다? 그럼 그는 우리 국민일까요? 아님 귀화한 외국인 하일 (로버트 할리?)이 우리국민일까요? 요즘 우리한국
삼한관경에 있어 주도권다툼은 원칙적,본질적문제가 아니다.고리.시라기.구다라.가라 워데가 적통이냐? 이런 야그는 벨 실효성이 없다.해양으로 뻗어 나가는 세력을 중추로 놓고보면 구다라가 ,대륙진출의 기백으로 따지면 고리가,보수적기질을 놓고보면 시라기가 다 정통일 수 있으니께...
첫댓글 히즈 퍼즐님 아마 한단고기를 편찬햇던 북애자할배도 님과 마음이 같을 것입니다. 이제 그 짐도 같이 나누어 집시다. 그게 우리가 이렇게 역사를 논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연구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생각이 단순합니다. 요즘 제가 기억력이 떨어져? 조목조목 글 답이 안되네요. 님의 글에 친근감도
가고 이해합니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우린 국가관념보다 민족관념이 더 깊습니다. 요즘엔 다르지만 옛날엔 우리나라 이런소리 안하고 우리민족이 어떻고 하죠. 어느 가수? 김승준? 군대 때문에 한국국적 포기했다? 그럼 그는 우리 국민일까요? 아님 귀화한 외국인 하일 (로버트 할리?)이 우리국민일까요? 요즘 우리한국
포기하는 순간 우리 민족(정신적으로)이 아닌 것입니다. 해외동포들이 삶 때문에 국적을 포기햇다면 우리 나라 잘못이요 우리가 끌어 안아야 할 동포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동포들을 무관심하게 버려두어선 절대 안되는겁니다.
감사합니다^^
삼한관경에 있어 주도권다툼은 원칙적,본질적문제가 아니다.고리.시라기.구다라.가라 워데가 적통이냐? 이런 야그는 벨 실효성이 없다.해양으로 뻗어 나가는 세력을 중추로 놓고보면 구다라가 ,대륙진출의 기백으로 따지면 고리가,보수적기질을 놓고보면 시라기가 다 정통일 수 있으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