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갑진년(甲辰年)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람 중 ‘AI(인공지능)’라는 단어가 무척 새롭거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일상에서 가전제품 광고를 비롯해 온갖 방송매체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AI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AI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AI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분명 현대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 소위 ‘AI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AI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니 AI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정말 AI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삶에서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체감하며 살고 있냐는 것이다.
혹시나 세상에서 매번 AI를 떠들어대니 우리가 AI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맞구나 정도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AI라는 다소 피상적인 단어 대신 현실적으로 와닿는 단어를 우리 삶에 대입시켜서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AI라는 것이 현대 과학기술의 화두이므로 현대 과학기술의 가시적인 대표물로서, 나의 삶에 체감되는 어떤 것을 대입시켜 지극히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기 바란다.
예를 들면, ‘나는 휴대폰 없이 살 수 있는가?’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돈과 휴대폰을 한번 비교해 보자. 출근했는데, 당장 오늘 쓸 돈이 주머니에 없는 상황과 휴대폰을 분실한 상황 중 어느 상황이 더 당혹스러운가?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당혹스러움에 있어 어느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자본주의 시대의 돈처럼 AI 시대의 과학기술(휴대폰)을 우리가 얼마나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2012년 당시, 구글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회장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어느 대학 공개 강의 초반에 회중들에게 던졌던 질문이자 대답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자기 직전에, 잠자다가 한밤중 깼을 때 당신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가? 바로 휴대폰이다.”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기술문명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10년도 더 전에 콕 집어주었던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음악을 담당했던 고라 자손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며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는데,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기독교 신앙들조차 모두 하나같이 아침에 눈을 뜰 때나, 밤에 눈을 감을 때나 항상 찾기에 갈급한 것이 엉뚱하게도 휴대폰 아닌가 싶다.
이러한 유형으로 농담 반 진담 반 필자가 들어본 이야기들은 이러하다. ‘배우자 없이는 살아도 휴대폰 없이는 못 산다.’ ‘주말부부로는 살아도 휴대폰 없이는 하루도 못 산다.’ 웃고 지나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유머 속에 담겨있는 깊은 의미는 이러하다. 매일 우리 삶을 실제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휴대폰과의 교감이 배우자와의 교감을 능가하는 시대, 과학기술과 나의 긴밀한 관계가 배우자와 나의 애틋한 관계를 앞서는 시대, 바로 이런 시대가 소위 AI 시대임을 웃고픈 유머가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한다. 그냥 권고 수준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명령하기도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시 115:11). 특히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엄중히 심판하실 것임을 자주 무섭게 경고한다. 빈번하게 이러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심판을 받아온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가 그러했듯, 모세의 뒤를 이은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의 나이 110세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 후 유언과 같은 마지막 당부이자 전 민족적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고대 이스라엘 시대가 신정(神政) 시대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강령이었던 것처럼, 현대 과학기술 시대가 AI 시대이기에 AI와 같은 첨단 기술을 의지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시대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되면 그것이 결국 우상이 되며, 우상이 된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섬김의 대상까지 된다는 성경의 교훈이자 경고의 메시지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잊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세계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었던 2천 년 전, 로마시대 때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시면서 참된 의지의 대상인 하나님에 견줄 만큼 돈을 의지하기 쉬우며, 자칫하다가는 의지의 대상을 넘어서 섬김의 대상까지도 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는 사실을 신앙인은 기억해야 한다.
그럼 휴대폰은 어떠한가? 혹시나 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에서 등장하는 돈과 같은 대상도 아닌데 고작 휴대폰을 여기에 비교하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하는가? 돈도 아니고 휴대폰일 뿐인데 그게 어떻게 우상까지 되며 섬김의 대상까지 될 수 있겠냐며, 괜히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하실 분이 있으신가? 아마도 많이 있으리라 예상해 보며, 그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길게 다시 물어보고자 한다.
당신은 하루의 일상에서 휴대폰을 더 많이 찾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더 많이 찾는가? 휴대폰을 어디 두고 오면 쩔쩔매며 휴대폰 찾기에 갈급하던 당신의 모습과 앞서 말했듯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 찾기에 갈급하던 당신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어느 모습이 더 당신의 진짜 일상의 모습인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휴대폰을 켜서 누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그 문제에 관해 인터넷 검색부터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문의하는가? 휴대폰 없이 생활하는 하루가 더 불안한가 아니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사는 하루가 더 불안한가? 혹시 주일 예배 전까지 하나님 없이 한 주는 살 수 있어도, 휴대폰 없이 한 주는 살지 못하지는 않는가? 결론적으로 당신은 휴대폰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고작 휴대폰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당신의 휴대폰이 당신 일상을 좌지우지하는 하나의 우상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현대 과학기술이 생산해낸 제품 중 하나인 휴대폰이 이러할진대 작금의 첨단 과학기술을 대표하며 소위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AI를 휴대폰이라는 단어 대신 대입해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작년 초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오고 있는 AI를 기반으로 한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는 과학기술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를 현격히 높여주었다. 맛있는 음식을 표현할 때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고 하듯이, 한 번도 챗GPT에게 안 물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챗GPT에게 물어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챗GPT가 상용되자마자 이용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챗GPT가 국내에 대중적으로 화제가 된 시기를 작년 2월 즈음으로 볼 때,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지난 작년 3월에 한 일간지에서는 우리나라 국민 3명 중 1명이 챗GPT를 사용해 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그 후 다시 한 달이 지난 작년 4월에는 정부가 챗GPT를 쓰는 한국인 이용자를 220만 명 정도로 파악했으며,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는 1억 명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존도에 있어서 챗GPT의 강점이자 매력은 언제든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해 준다는 점이다. 웬만해서는 바로 응답해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과는 달리 언제든 물어보는 질문에 바로 대답해 주는 챗GPT. 물론 지금은 생성형 AI의 대답 수준이 인공지능 초기 단계이기에 많이 부족하여 감히 하나님의 응답과 비교할 수준이 못 되지만,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로 미루어 앞으로 생성형 AI의 답변 수준을 짐작해 볼 때, 내가 생각하지도 예견하지도 못하던 삶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대답을 AI가 해줄 수 있는 시대가 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미래가 아닌 현재 AI 수준에서만 보더라도, 기도 응답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삶의 어려운 질문에 대한 신속한 AI의 답변이 오랜 기다림을 요구하는 기도 응답의 영역을 침투하지 않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챗GPT의 대중화를 기점으로 하여 AI가 종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이제 많이 알려졌다. 챗GPT 기술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이제 종교계에도 도입되는가 싶던 작년 3월에 영국의 「더 타임스」는 이미 스위스에서 어느 스타트업 회사가 천주교 성인의 이름을 가진 AI 챗봇을 통해 성도들의 고해성사를 해주고, 신앙적으로 의미 있는 조언도 해주는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천주교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AI는 계속해서 새로운 뉴스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달 초에 대한민국에서 열린 2023 IT 선교 콘퍼런스에서는 국내 어느 회사에서 창세기를 낭독하는 음성파일 하나를 재생했는데, 낭독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2011년에 별세하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님이셨다. AI 기술을 통해 별세하신 목사님의 목소리를 복원시킨 것이다. 한국 교계를 대표하시던 그 목사님의 음성을 기억하는 신도라면, 그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다는 놀라움과 함께 그 음성을 통해 낭독되는 성경 말씀을 들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기대되고 듣고 싶은 음성의 실체가 그분이 아니라 AI라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찌 되었든 이런 현황을 볼 때, 성경 말씀을 듣는 영역에서는 AI가 신앙인의 일상 속에 이미 침투해 들어와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논의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AI가 얼마나 우리 인간처럼 말하는지 혹은 얼마나 우리 인간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주는지가 아니라, 그처럼 뛰어난 발전을 이루는 AI에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의지하게 되는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대상에게 우리의 삶을 의지할 때, 의지하는 강도가 삶의 태도가 되고, 그 삶의 태도가 삶의 기준이 되며, 그 삶의 기준이 결국 우리 삶의 윤리적 지침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어야만 그의 삶의 윤리적 지침이 하나님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구약성경 시대인 신정 시대가 아닌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강하게 의지하게 되는 대상은 돈이기에, 돈을 가장 강하게 의지하는 사람의 삶의 윤리적 지침은 돈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현대 과학기술 시대에서 가장 의지하게 되리라 예측되는 대상이 AI라면, 현대인들의 삶의 윤리적 지침이 언젠가 AI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은 하루하루 일상에서 무엇을 가장 강하게 의지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인가, 돈인가, 아니면 지금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는 휴대폰인가? 혹시 당신이 체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 휴대폰을 비롯한 모든 일상의 기기들을 주도해가고 있는 AI가 알게 모르게 당신의 매일의 삶의 윤리적 지침이 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