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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일기(赴燕日記) 저자미상
화표주(華表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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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길을 아는 사람이 없이 길을 따라 유관(楡關)을 지날 때 길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석주(石柱)가 있는데 길에서의 거리가 수십 리인데도 높다랗게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수십 장(丈)은 되어 보인다. 내가 시험삼아 ‘이것이 화표주인가?’ 하고 물으니, 어떤 이는 ‘그렇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하여 선뜻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억단(臆斷)하였다.
옛날 전설에 ‘화표주는 요동(遼東)에 있다.’ 했기 때문에 이제 이곳에 있는 것이 화표주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이곳은 요동과 1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요동의 화표주는 분명 이곳에 있지 않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지금 우리 일행이 지나온 곳이 사실 요동이긴 하지만 천하로 본다면 산해관 밖은 요동 경계이며 천하의 동쪽이므로, 요서(遼西)ㆍ요양(遼陽)ㆍ요동을 구별하지 않고 통틀어 요동이라고 한다. 그러니만큼 옛날에 이른 ‘주(柱)가 요동에 있다.’ 한 것은 천하를 기준해서 한 말이요, 지금 ‘화표주는 분명 요동성에 있다.’ 하는 것은 동방 사람들의 말이다. 그러니 어찌 동방 사람의 변통성 없는 견해가 고래의 대방(大邦)의 전설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봉화대[烽臺]도 아니요, 부도(浮圖)도 아닌 한 기둥이 까마득히 높은 산머리에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는데, 층절(層節)도 없이 상하가 한결같이 곧은 기둥이다. 세상에서는 요동의 백탑(白塔)을 화표주라고 하는데, 이는 대개 이 기둥이 요동 땅에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탑과 기둥은 만듦새가 전혀 다르다. 탑은 바로 부도이니 불가에서 사리골(舍利骨)을 안장하는 것으로 둥근 것은 항아리 같고, 층을 이룬 것은 대마디[竹節]와 같아서 아래는 넓고 위로 갈수로 가늘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고금의 사찰[佛舍] 근방의 평지에 있는 것으로 나도 익히 아는 것이다. 소위 주(柱)라는 것은 하나의 돌이 높이 솟아 위아래가 없이 모두 고르며 층절이 없고 또 높은 봉우리의 절정에 있는 것이니, 요동의 층부도(層浮圖)를 주(柱)라 하는 것은 너무도 고루한 말이다.
더구나 이 요동의 백탑은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쌓은 것이라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또 화표주가 요동에 있다고 하는 말도 분별하기 어렵지 않으니, 현재 요동성에 있기 때문에 요동에 있다고 이른 것뿐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이 촉(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길게 1만여 리를 뻗어 요동 해상(海上)에서 끝난다 했는데, 현재 장성의 끝머리가 요동성에서도 오히려 1000여 리나 떨어져 있으니, 옛사람들이 산해관(山海關) 밖 1천 리 이내를 통틀어 요동이라 칭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한 가닥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오늘 유관(楡關)을 지나 무령현(撫寧縣)에 이르러 멀리 산머리의 석주(石柱)를 바라보니, 내 생각에 이것이 참으로 화표주라 여겨졌다.
또 요양군(遼陽郡)이 그 아래에 있으니, 요양의 학(鶴)은 정녕코 부합된다. 100여 리를 간 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하나의 석주가 산머리에 있는데 크기와 모양이 어제 본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이에 이르러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왔다. 화표주가 한 쌍이란 것에 대하여는 고정(考訂)할 만한 말이 없으니 모르겠거니와, 이 중에 어느 것이 정영위(丁令威)의 화표주인가? 진시황(秦始皇)이 동해가 구계(昫界) 중에 돌을 세워 진 나라의 동문을 삼은 것이 이것인가? 문을 세웠다면 형세상 아마 두 개를 마주 세웠을 것이니, 북으로 가고 남으로 가는 그 하나를 일러 화표라 한 것인가? 아니면 이 밖에 달리 화표주가 있는 것인가? 화표주에 대한 설이 선대 때부터 나온 것인가? 후대에 나온 것인가? 그러므로 억지로 그 설을 고집할 수는 없다.
[주-D001] 정영위(丁令威) : 한(漢) 나라의 요동(遼東) 사람이다. 정영위가 선술(仙術)을 배워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서 성문의 화표주에 앉았다는 고사가 있으므로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
이제묘(夷齊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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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부(永平府) 북쪽 30리 거리에 있다. 난하(灤河)의 상류에 민둥산[童山]이 있는데 이를 수양산(首陽山)이라고 한다. 그 산 북쪽은 고죽성(孤竹城)으로서 담장을 둘러 네모진 성을 만들었고, 서문 문미 위에는 ‘고죽성’이라고 새겼으며, 그 아래에는 ‘현인구리(賢人舊里)’ 네 글자를 크게 새겼다.
묘에는 ‘청절(淸節)’이라는 편액이 걸렸고, 정문 좌우에는 큰 석비를 세웠는데, 좌측에는 ‘충신효자’, 우측에는 팔분체(八分體)로 ‘도금칭성(到今稱聖)’, 바깥 담의 좌우에는 ‘백대청풍(百代淸風)’이란 편액을 했으며, 중문에는 금액자로 ‘청풍가읍(淸風可挹)’, 북쪽 담에는 가로 글씨로 ‘고금사범(古今師範)’, 남쪽 담에는 가로로 ‘천지강상(天地綱常)’이라고 썼다. 내문(內門)에는 층루가 있다. 정당에는 구슬로 꾸민 관과 용곤(龍袞 용을 수놓은 천자의 옷)을 하고 어깨를 나란히 해서 앉아 있는 백이ㆍ숙제의 소상을 안치하였을 뿐 다른 의장은 없고, 다만 향로ㆍ촛대 등을 늘어놓았다. 벽에는 건륭의 시 몇 수를 돌에 새겨서 벽에 걸었다.
심양(瀋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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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봉천부(奉天府)이니 소위 성경성(盛京省)이다. 장군(將軍) 등 6, 7개의 아문(衙門)이 있다. 네모진 성[方城]으로 둘렀는데, 비예(睥睨 성가퀴)는 없고 4개의 문에는 3층 누각을 세웠다. 남문 밖 5리쯤 못미쳐 혼하(渾河)가 있는데, 그 하수 위에 백탑이 있어 멀리 바라보니 흡사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 같았다. 연경과는 1500리 떨어져 있다.
행궐(行闕)이 있는데 붉은 난간이 두루 둘렀고, 파수가 엄하여 가까이 갈 수 없었으므로, 다만 외면에서 바라보니 채색한 용마루가 층층으로 되어 꾸밈새가 기묘했다. 이 성은 요동성과 비교할 때 규모가 배도 넘고, 화려하기로는 만 배는 될 듯싶다.
성안에는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있으며 길마다 층루문(層樓門)을 세웠는데 벽돌로 사면을 높이 쌓아 올리고, 문의 사면을 뚫고 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세웠는데 북 또는 종을 달았다. 이와 같이 한 것이 몇 곳인지도 모른다. 시가[市井]는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거마가 길을 메우니 참으로 큰 도회지이다.
책문에서 심양까지는 400여 리가 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백두산에 올라 바라볼 때, 산 아래 서남쪽 벌판에 아스라하게 한 줄기 연기가 흩어진다는 곳이 바로 성경(盛京)이다.
통주강(通州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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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백하(白河)이다. 강이 통주의 동성(東城)을 싸고돌아 북으로 흘러 연도(燕都)와 통구(通溝)가 되고, 이어 서산(西山)에 이른다. 이 강은 배가 통하는데, 동남쪽 포구(浦口)로부터 돛대가 묶어 세운 듯 전후로 30여 리를 숲처럼 빽빽이 뻗어 있어 몇 천 몇 만 척인지 모른다.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며, 매어 있기도 물에 떠 있기도 하여, 온 강이 모두 배이니 진실로 수시(水市)의 대도회지다.
배의 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지 않다. 선재(船材)는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는데, 모두 석회를 바르고 바깥쪽은 기름과 옻칠을 하였다. 윗면에는 판자를 덮어서 여닫으며 중간에는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있다. 큰 배는 복판에 3층 누를 세웠다. 처음 배의 문에 들어서면 금자(金字)의 편액과 주련이 있고 문 안에는 방이 있는데, 칸칸이 칸막이를 치고 의자와 평상을 늘어놓았으며, 사면에는 겹창을 했다. 또 안쪽에 있는 바깥 온돌방에는 침구류를 배치했고 좀 더 들어간 곳에는 안쪽 온돌방이 있고 더 안쪽으로는 부엌과 창고가 있다. 위층은 모두 창고이다. 배의 밑바닥은 널빤지로 열었다 닫았다 하게 만들었는데, 반듯반듯한 것이 흡사 뒤주 같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저장한다. 배의 안팎을 단장한 것은 기이하고도 절묘하며, 사창(紗窓)ㆍ유리ㆍ금막(錦幕)ㆍ수벽(繡壁), 새기고 그림 그린 침향ㆍ자단ㆍ나무 교창(交窓 창살을 정(井) 자 모양으로 짜서 분합문 위에 끼우는 창)ㆍ부란(浮欄) 등이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하다. 배의 외면 가장자리는 특이한 나무로 조각했는데 혹은 풍모란(風牧丹)을 썼고, 혹은 도금하고 아로새겨 꾸민 쇠, 대나무, 채색한 돛대, 수놓은 깃발을 썼으며, 더러는 몇 개의 돛대를 걸었는데 큰 것은 수십 칸에 이른다.
배에는 여자와 물건과 가축을 모두 실었다. 운반한 짐을 푸는 자는 무명으로 자루를 만들어 쌀을 담아 가지고 강남으로부터 배를 대면 수레로 실어 나른다 한다. 운반하여 통운문(通運門)에 들여다가 통주의 양식에 대비한다.
지리(地理) - 산천ㆍ도로ㆍ전묘(田畝)ㆍ구혁(溝洫)ㆍ농업ㆍ곡종(穀種)을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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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에 들어간 후로는 줄곧 산곡(山谷)을 지나가다가 청석령(靑石嶺)을 지나면서부터는 끝없는 평원으로서 아득히 서북쪽 먼 산을 바라보니, 가물가물하였다. 3, 4일을 가는 동안에 도시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구름낀 하늘만이 평야에 드리워져 있어 마치 안개 속을 가는 것 같아, 도리어 요동 벌판이 크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심양(瀋陽)을 거쳐 북진묘(北鎭廟)를 지나고 나니,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산기(山氣)가 있어 연경에까지 이르는데 도합 1000여 리이다. 서북쪽에 병풍같이 둘려 있는 것은 도무지 한 줄기로 뻗은 산맥인데 산세가 장대하였다. 대개 태행산(太行山) 남쪽의 한 산록으로 연경의 용호(龍虎 용은 왼쪽의 산맥인 청룡(靑龍), 호는 오른쪽 산맥인 백호(白虎))가 된다. 서산의 지록(枝麓)은 동남쪽으로 뻗어 발해(渤海)의 어귀로 들어간다.
중국의 공로(貢路)는 모두 노구교(蘆溝橋)로 해서 연경으로 들어가니, 노구교는 곧 상건(桑乾)이다. 바다는 연경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떨어졌고 다리 밖의 큰길은 곧 천하의 문로(門路)로서 곧 연경의 외성인데, 천연적으로 세워진 문이다.
태행산의 동쪽 산맥은 반산(盤山)이 되고, 산해관이 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된다.
오른편 산맥이 1000여 리를 가서 동남쪽에는 연경(燕京)ㆍ요주(遼州)ㆍ계주(薊州)ㆍ해주(海州)가 되는데, 한 큰 야산(野山)이 아득히 보이고 이북은 장성이 된다. 장성 내외와 요주ㆍ계주 이북은 모두 몽고(蒙古 몽골) 지방인데, 한계가 없다. 몽고 밖 서쪽ㆍ북쪽ㆍ동쪽은 만 리의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땅에 접해 있다. 책문 안에서부터 연경까지의 흙 색깔은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며, 백색은 많고 황색은 적으며 돌과 자갈은 거의 드물었다.
그들이 말하는 강하(江河)란, 통주(通州)ㆍ백하(白河)ㆍ대릉하(大凌河)ㆍ소릉하(小凌河)와 같은 4, 5개처 물 이외는 모두 배를 타지 않고 건널 수 있고 물이 불으면 모두 배로 건너는데, 땅이 평평하기 때문에 물이 괴면 빠지기 어려워서 땅이 모두 수렁이 된다. 유하구(柳河溝) 등지는 옛날에는 거마가 진흙 속에 빠지면 결국 구해 내지 못하였다.
강물은 혼탁하여서 색깔은 적황(赤黃)이고 맛은 쓰고 냄새가 나며, 물이란 것이 느릅나무즙[楡汁]과 같다. 샘물 맛이 나빠 소나 말도 마시려 하지 않아 매양 물을 길어 가지고 가는데, 관내(關內) 물맛은 좀 낫다.
도로는 들판 가운데 평탄한 곳인데, 넓고 크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전지에는 도랑이 없어 물이 길 가운데로 흘러 수레바퀴와 말 발자국의 물이 마르지도 새지도 않는데, 비록 7년의 큰 가뭄이라 할지라도 마를 때가 없다. 그래서 꽁꽁 어는 겨울철이 길 가는 데는 아주 좋은 계절이다. 지대는 높고 길은 낮은 데다가 길을 고치는 법이 없어 완연히 물 가운데로 가는데, 종종 길이 끊겨 못[澤]이 된 곳도 있어 동서쪽으로 돌아서 가기도 하고, 혹시 진흙탕에 거마가 빠져 꼼짝 못하면 끌어내느라 반나절이 걸리곤 한다.
전묘(田畝)는 아주 길고 넓어 거의 10리에 이르러, 동쪽에서 농사짓는 자는 서쪽에서 농사짓는 자를 보지 못한다. 천 리나 되는 들판에는 농사가 한창 바쁘다.
오관(午關) 밖은 백성이 모두 기정(旗丁 조운(漕運)하는 군인)으로 세금을 징수하는[征稅] 법이 없어 촌락은 윤택하고 민력(民力)은 넉넉하였다. 뽕나무와 삼[麻]이 빽빽한데 호미를 메고 나가는 자가 분분하기 구름과 같고, 한집안에 농사짓는 자가 3, 40인이나 되었다.
쟁기는 쌍 보습을 사용하여 소나 말이나 나귀를 쓰는데 한 밭[田]을 가는 데 쟁기가 10여 개나 되었다. 호미의 만듦새는 같지 않은데 자루가 길고 쇠로 되어 꼿꼿이 서서 흙을 깎아서 맨다. 쟁기의 만듦새는 우리나라와 방불하다. 보이는 연도(沿道)에는 한 뙈기라도 묵혀둔 땅이 없고 다만 물이 차는 땅은 갈대와 풀밭으로 내버려 두었으니, 만약 물갈이하여 벼를 심으면 극히 기름질 것인데 논은 금한다고 한다. 단지 고려촌(高麗村) 앞에는 논이 약간 있다. 농사짓는 집은 분뇨 아끼기를 금과 같이 하며, 부녀자가 나가 밭가는 예는 없다.
전지에 심는 것으로는 벼ㆍ기장ㆍ찰기장[黍]ㆍ메기장[稷]ㆍ수수ㆍ메밀ㆍ보리ㆍ콩ㆍ팥ㆍ들깨ㆍ광랑(桄榔 야자과에 속하는 상록 교목)ㆍ비마(萆麻)ㆍ호마(胡麻)ㆍ면화 등 없는 것이 없다.
타곡(打穀)하는 법은 연가(連枷 도리깨)를 쓰지 않고 단지 나귀가 연자방아[碾]를 끌어 부수고, 방아로 찧지 않고 오로지 석마(石磨 맷돌)를 쓴다. 곡식을 운반할 때에는 모두 나귀를 메워 쓰며, 수레 운행과 타곡할 때에도 나귀로 하고 곡식을 찧을 때에도 나귀로 하니, 그 사람들의 나귀 노릇하기는 어렵겠다. 채소 역시 없는 것이 없는데, 무[蘿葍]ㆍ순무[蔓菁 무의 한 가지]ㆍ미나리[芹]ㆍ명아주[藜]ㆍ아욱[葵]ㆍ파[蔥]ㆍ마늘[蒜]ㆍ홍초(紅椒)ㆍ부추[韮虀]ㆍ오이[黃瓜]ㆍ동아[冬瓜]ㆍ가지[茄子]ㆍ겨자(芥子) 등이며, 품종이 모두 같지 않다.
무는 대부분 파랗거나 빨간데, 모양은 아주 둥글거나 또 길쭉한 것이 깎은 듯한 것도 있다. 파는 또 여러 종류가 있는데, 길이와 크기가 같지 않으며, 홍초 또한 극히 크다. 호박[南瓜]은 우리나라에서 심는 것과 같은 것이 없고, 색깔은 붉고 적은데 주먹보다 조금 크며, 맛이 달고 색깔이 붉어 꼭 우리나라의 늙은 호박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당호박(唐琥珀)인데 그렇게 좋지는 않다. 우리나라 호박의 모양과 색깔은 그곳의 수박[西瓜]과 아주 같아서 처음 저들의 수박을 보고 호박으로 여겼다. 겉은 푸르고 빤질빤질하며 점으로 푸른 선이 그어져 꼭 우리나라의 새로 나온 호박과 같았다. 쪼개어 보니 속이 누래서 또한 꼭 우리나라의 호박이었다. 먹어 보니 맛이 달고 성질이 연한데, 이것이 수박이라 하니 극히 괴이하다. 속이 붉고 씨가 붉은 것은 보지 못했으나 수박씨는 검고 희고 해서 일정하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호박은 저들의 수박에 맛이 간 것이리라.
오이[黃瓜]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혹 오이 종자를 심는데 늙어도 터지지 않고 껍질이 얇고 노란데, 저들의 종자는 아주 특이하였다. 오이 1개가 몇 척이 되고, 긴 것은 죽순과 같이 가늘고 극히 부드러웠다.
동아 역시 몇 척이나 되게 가늘고 길며, 둥근 것ㆍ모난 것ㆍ아주 큰 것이 있다. 가지는 자색ㆍ흑색의 둥그스름한 것이 있는데 보기에 질항아리[土缸]와 같으며, 밭 가운데에 겹겹으로 달려 있는데 우리나라에 옮겨 심으면 보기 드문 완물(玩物)이 되겠다.
도로마다 교계패(交界牌)가 있다.
[주-D001] 오관(午關) : 오관(午關)이 오문(午門)과 관내(關內)를 말하는지 혹은 다른 의미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천기(天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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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寒暑)가 우리나라보다 심해서 절후가 조금 빠르다. 5월 초열흘에 책문에 들어갔는데, 시절(時節) 산물(産物)로 징험해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꽃ㆍ과일ㆍ채소ㆍ콩 등의 이른 것은 반드시 연경산[京産]이라 하는데, 이제 보니 우리나라에 비해 이곳의 것이 훨씬 이르다. 한서로 말하면, 여름에는 열기가 등에 쬐어 몇 겹의 옷을 입어도 열기가 파고들어 마치 뜸질하는 것 같다. 5월 보름께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우 겹옷을 벗은 때에 불과하여 등에 열기도 그리 심하지 않으므로 길을 떠날 적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갈의(褐衣)를 입은 뒤에야 햇볕을 막아 그늘지는 효과를 보았다.
그런데 5월 말에서 6월 초경에는 태양이 곧바로 머리 위에서 쬐어 눈을 떠도 생기가 없고, 온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이 흘러서 꼭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같으며, 때때로 호흡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처서(處暑)가 겨우 지나고 나면 찬 기운이 갑자기 생기고, 8월이 오면 벌써 겹 솜옷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 서울 사람들은 오히려 모시옷[紵布]을 입는다. 길가는 행인들은 대부분 추석날부터 두터운 갖옷을 지니고 다닌다. 대개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면 태양열이 퍼지지 않아서, 수천 리 광막한 평지에 햇볕이 쬐는 것은 반드시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비해 배는 되므로, 여름날의 혹독한 무더위가 먼 곳까지 끝없이 통하게 되는 것이다.
지역이 북쪽에 가까우면 한기가 일찍 이르는 것은 또한 필연적인 것이요, 사철 바람이 많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산해관 밖은 바람이 차기가 관내(關內)보다 심하다.
풍속(風俗)--가쇄(枷鎖)의 형구를 몸에 찬 채 자기의 집에 있는 죄수를 보았는데, 가쇄의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사면이 한 자 남짓한 네모난 판자를 사용하여 목에 칼을 씌워서 감히 풀지 못하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죄수는 이웃 마을을 마음대로 출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죄수들은 형을 받을 날짜가 되면 관에 자진 출두하여 관의 처분을 받는다 하니,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나귀나 말의 종류들은 모두 방울을 달아 목에 둘렀는데, 금방울이 수십개에 달하며, 더러는 큰 요령(搖鈴) 1개를 달아서 걸어갈 적마다 쟁쟁 울렸다. 비둘기에도 작은 방울이 있으므로 뭇 비둘기가 하늘로 날게 되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한 소리가 공중에 퍼졌다.
개나 고양이의 무리도 역시 모두 방울을 달았으며, 행상이나 거지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쇠붙이나 나무로 소리를 내는 기구를 만들어서 손으로 흔들거나 어깨로 두들겼는데, 걸음마다 절도에 맞았다.
성읍(城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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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을 지난 이후로 연로의 성읍은 봉황성(鳳凰城)에서부터 요동(遼東)ㆍ심양(瀋陽)ㆍ광녕(廣寧)ㆍ영원(寧遠)ㆍ중우소(中右所)ㆍ중후소(中後所)ㆍ중전소(中前所)ㆍ산해관(山海關)ㆍ대리영(大理營)ㆍ무령(撫寧)ㆍ영평(永平)ㆍ풍윤(豐潤)ㆍ옥전(玉田)ㆍ계주(薊州)ㆍ삼하(三河)ㆍ연교(燕郊)ㆍ통주(通州)를 거쳐 연경에 이르렀는데, 심양은 곧 봉천부(奉天府) 성경성(盛京省)으로 산해관 밖의 큰 도성(都城)인데, 청 태종(淸太宗)이 창업초에 도읍했던 곳이다.
산해관은 곧 수륙이 큰 관방(關防)이고, 통주는 곧 기보(畿輔)의 큰 도시이며, 봉황성은 곧 변문(邊門)의 방수(防守)이다. 소(所)니 영(營)이니 하는 것은 곧 외영(外營)이고, 기타 군ㆍ현들은 크고 작은 영장(令長 현의 장관)의 땅에 불과하였다. 비록 지극히 쇠잔한 한 현(縣)이라 하더라도, 성 안은 충실하고 인민들은 조밀하며 시장은 여기저기 있다. 산해관과 통주와는 서로 위아래에 있으며, 심양은 연경의 다음 가는데, 우리 서울에 비하면 부유하고 화려한 것이 백 배나 되지만, 연경에 비교한다면 10분의 1, 2가 된다.
성지(城池)의 제도는, 성에는 반드시 호(濠)가 있어 높다랗게 벽돌로 쌓았으며, 모난 성은 평지로 곧게 뻗게 해서 산을 의지한 곳이 없으므로 가는 곳마다 하나도 높은 곳을 올라가서 성안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연경 남성(南城) 밖에는 또 겹으로 한 성을 쌓아서 내ㆍ외성을 만들되 마치 일자형(日字形)과 같은데, 외성은 약간 넓었다.
성의 높이와 크기는 우리 도성에 비해 1배 반이 더 있어서 말 10필(匹)이 나란히 달릴 수 있고 양쪽에는 모두 여성(女城)을 쌓았다. 성 위에는 간간이 행랑이 있고 성을 지키는 군사가 밤낮으로 살고 있다.
행랑 앞에는 성면(城面)에다가 층계를 만들고 문을 설치하여 출입하며, 성에 올라가서 자물쇠를 잠근다. 그 아래는 행랑이 있어서 음식을 만들어서 제공하면, 군사들은 성 위에서 밧줄로 끌어올려 먹는다.
도성 안에는 중성이 있어서 빙 두른 담을 온통 붉게 칠하고 누런 기와를 덮어 놓았다. 또 중성 안에 궁성을 쌓아 놓았는데, 사면에는 정문을 설치하여 성의 제도는 한 모양이었으나, 다만 성 위에서 지키는 군사가 없을 뿐이었다.
성 아래에는 빙 둘러 행랑을 지어 놓았는데 행랑의 제도가 성을 향하였고, 행랑 밖에는 깊은 못으로 둘러 놓아 군량이며 병기며 장졸(將卒)이며 기승(騎乘)들이 모두 그 가운데 있었다. 다리에 다다라 문을 잠그므로 한번 이 문에 들어가서 기한이 차지 않으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위급할 때 의뢰할 수가 있어서 임시로 징발하는 폐단이 없으니 그 설비가 크다고 하겠다. 성문은 반드시 옹성(甕城)고 중문(重門)을 만들었고, 문루는 모두 3층으로 되었으며 성에는 순전히 벽돌을 사용해서 매우 편리하였다.
대저 요동에서 연경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들판이어서 목재나 석재가 아주 귀하였다. 이미 거친 여러 곳의 석재로는 패루(牌樓)의 마석(磨石) 이외에는 운반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돌은 없으며, 주춧돌 따위에는 불과 소 한 마리로 끌 수 있는 것을 썼고, 큰 것은 마소 두세 마리의 힘으로 끌만한 것을 사용하였다.
궁궐ㆍ사관(寺觀)의 섬돌ㆍ주춧돌ㆍ난간도 역시 두께가 큰 돌은 없었고, 비표(碑表)나 부도(浮圖)도 장대하여 수송하기 어려운 것은 전혀 없었다. 오직 태화전(太和殿)의 월대(月臺) 및 정로(正路)의 용체(龍砌 궁중의 섬돌)만이 매우 높고 넓어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석재였고, 그 밖에 사용한 것은 돌조각이 가볍고 얇아서 운반하기에 편리하였다.
성첩(城堞)이나 원장(垣墻)에는 전혀 돌을 쓰지 않았는데, 여염집의 벽에는 더러 두어 층은 잡석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벽돌로 쌓았다. 성곽에도 돌을 하나도 쓰지 않은 데가 있고, 여염집 문미(門楣)나 성루(城樓)의 홍예문(虹蜺門)에도 모두 벽돌을 썼으며, 비록 한 조각의 돌이 없더라도 대(臺)를 쌓거나 성을 쌓는 데는 무방하였다.
만리장성도 순전히 벽돌만으로 쌓아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 바다에 와서 그쳤다고 하는데, 어느 성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산해관의 한 굽이는 곧 서달(徐達)이 쌓았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바다 가운데의 몇 리에까지 성을 쌓은 것은 결코 후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오직 진시황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서달이 이를 쌓았다고 생각한다면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과연 별도로 있어서 바다의 성으로 들어왔다는 말인가? 나는 성은 진(秦) 나라 때 쌓은 성이고, 관(關)을 설치한 것은 곧 서달이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성의 문안에 또 따로 중성(中城)이 있으니 이것이 산해관인데, 어찌 장성을 가지고 서달이 쌓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벽성(甓城 벽돌로 쌓은 성)의 제도는 큰 벽돌을 가지고 쌓되 내외면을 다같이 서너 겹으로 벽돌을 쓰고는 석회로 그 틈을 바르며, 중간을 누런 진흙으로 채우므로 그 견고한 것은 돌로 쌓은 것보다 더 나았다.
대개, 성이 오래 되어 돌이 빠지게 되면 돌 하나의 해가 성 몇 칸에 미치는 것이다. 대개, 돌은 크고 벽돌은 작은 것인데, 1개의 돌이 무너진 구멍에는 우묵하게 공간이 생기어서, 1개의 돌이 떨어진 다음에는 2개 3개로 늘어나서 형세가 장차 저절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벽돌은 그렇지 않았다. 벽돌의 크기가 일정하여서 서로 짓눌리고 서로 엉겨붙어서 이리저리 버티고 물려 있으므로 이렇게 두어 겹을 쌓으면 비록 벽돌 1개가 먼저 빠지더라도 둘째 벽돌, 셋째 벽돌이 서로 엉겨붙어서, 틈이 생기거나 해가 파급되는 걱정이 없으니, 벽돌 1개가 떨어진 곳에 1개의 벽돌로 메우고 2개가 빠진 곳에는 2개로 메우며, 떨어진 곳에 따라 메워서 매우 간편하였다.
또한 벽돌의 쓰임새는 매우 많았다. 그들 지방에는 흙의 품질이 모두 차져서 도자기를 만드는 데 마땅하므로 마을마다 기와가마[窯]를 묻었는데, 가마 제도는 역시 우리의 풍속과 같지 않았다. 독처럼 둥그렇게 부엌을 쌓았는데 텅 비고 높이 솟았으며, 부엌 가운데는 반을 그어서 굴뚝을 만들고는 벽돌로 가지런하게 높이 쌓은 후 곡초(穀草)를 땠다. 벽돌을 만드는 것의 간단하고 두루 편하기가 여기에 더할 것이 없었다. 기왓굴을 만들 적에는 둥글고 높게 했던 까닭에 화기가 쉽게 더워져서 벽돌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벽돌 1개의 값은 당전(唐錢)으로 7문(文)이 된다고 하는데 집의 굴뚝이나 정원 길이나 담장이나 무덤에 벽돌이 아니면 쓸 수 없다.
궁실(宮室) - 누대(樓臺)를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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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柵門) 안으로부터 가옥제도가 한결같지 아니하여, 초가집은 띠풀과 기령풀 같은 유로 두어 줌씩 나누어서 묶고 5, 6촌(寸)으로 절단하여 고기비늘처럼 쌓았는데, 건물의 대들보로부터 처마에 이르기까지 한 칼로 바르게 깎아내린 듯하였다. 대들보 위와 좌우변은 모두 석회(石灰)로 발랐는데 매우 정밀하고 간결해 보였고, 20여 년 만에 한 번씩 바꾼다 한다.
기와집은 공청[公廨]이 아니면 감히 원앙와(鴛鴦瓦)로 덮지 못하게 하고, 다만 여와(女瓦 암키와)로 덮게 하여 석회로 그 이어진 곳을 발랐으며, 기와의 모양이 조각이 작고 또 대들보 위에 기와를 쓰지 않은 것이 많이 있어서 보기에 제법 기괴하였다. 사찰(寺刹)과 사묘(祠廟) 등은 모두 원앙와로 덮었다. 옥량(屋樑)은 반드시 모두 높게 하는 제도만을 쓰지 아니하고, 둥글게도 하고 평평하게도 하고 높게도 하여 용마루를 만들지 않았으니 무릇 기이한 것을 좋게 여겼다.
실제(室制)는 항상 일자(一字) 제도를 써서, 비록 굴절(屈折)이 있게 집을 지을지라도 연접(連接)해 있는 굽은 처마가 없고 반드시 북쪽으로 일자로 하여 끝마치고 또 동쪽으로 일자로 하여 끝마쳤으니, 언제나 이와 같았다. 창문은 나무를 깎아서 창살을 만들고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여, 원래 목재 그대로의 재질은 없었다. 장벽(墻壁)과 문로(門路)에 이르러서는 벽돌로 쌓았는데 반드시 꽃무늬로 조각된 것을 썼으며, 원형의 문과 팔각문(八角門)등 문짝 모양은 한결같지 않았다.
길가의 점사(店舍) 같은 것은 무려 2, 3백 칸인데 일직선으로 8, 9동이며 동마다 수십 칸으로, 이와 같이 중첩해 있다. 밖에서 그곳을 지나매 깊숙하게 은은히 비쳐서, 그 빛이 찬란하였다. 언제나 좌우로 문을 만들었는데 문안이 널찍하였다. 한번은 한 점사에 이르니 석조(石槽 돌로 만든 구유)가 있는데 길이가 1칸도 더되며, 사면에 나열되어 있는데 40여 개나 되었고, 나무로 만든 구유 같은 것은 으레 근 백개나 있었다. 중정(中庭)은 수레 3, 40대나 용납할 만하였다. 해 저물녘에 그곳을 보니 수레 위의 긴 채찍이 쫑긋쫑긋 묶여 서 있는 것이 마치 배의 돛대가 모여 서 있는 것과 같았다. 말은 수백 필에 이르렀고 인객(人客)은 천에 가까웠는데, 흩어져서 들어오니 칸칸이 점사가 시끄럽고 더워서 마치 시장에 들어간 것과 같았다.
여염집들은 크고 작은 것이 한결같지 아니한데 외문(外門)으로부터 벽을 쌓아서 좌우에 그 문기둥을 세웠고, 아래로부터 대들보에 이르기까지 회벽돌로 쌓았다. 무릇 모든 궁실(宮室)은 반드시 기둥을 가리고 쌓아서 원래 기둥의 면이 노출된 것이 없었다. 집의 벽은 모두 외를 얽어 붙이는 법이 없고, 일체 벽돌로 쌓아 두껍게 처마까지 닿았으며, 외면에는 회를 발랐다.
창문 역시 우리나라의 쌍창(雙窓) 제도는 없었으며, 또한 앞에 툇마루를 만드는 예도 없다. 온돌방 위 전면에 창을 만들었는데 모두 층창(層窓)을 써서 위의 반은 걸어서 매달아 두고 아래 반은 각각 나누어졌는데 지도리가 없으며, 쓰거나 그냥 두거나 열고 닫음에 특별한 손잡이가 없다. 창에 기대고 앉으면 당(堂) 아래가 한 길쯤 되어서 곧바로 중정(中庭)에 임하는 것 같다. 층창(層窓)의 안에 또다시 판자창이나 혹은 종이창[紙窓]을 만들었는데 안에서 여닫게 되어 있고 걸어서 매달았으며, 1개의 쇠지도리도 없다. 안 바라지 문은 모두 판자문이었으며 발을 드리웠는데, 추운 계절에 바람을 막기가 어려운데도 역시 풍지(風紙)를 붙이는 법이 없다.
온돌방은 네 벽이 없는데도 외벽(外壁)의 밖에 다시 가리는 것이 없었고, 문을 닫은 뒤에도 문 안의 크고 작은 방은 서로 바람이 통하였으며, 다만 장지[障子]로 가릴 뿐이었는데, 높이가 반벽(半壁) 남짓에 불과했다.
궁궐과 묘사(廟寺) 등처에는 밖에 패루(牌樓)가 있는데 역시 면장(面墻)이 있고 면장에는 용(龍)과 사자 등의 무늬를 놓았으며, 혹은 채색한 질그릇을 썼고 혹은 순수한 도기(陶器)도 써서, 채색한 기와와 조각한 담장의 화려함이 비길데 없다. 비록 서인의 집이라 할지라도 사치를 한껏하니, 원래 막는 법이 없다. 옹대(甕臺)와 채루(彩樓)도 가끔 있으며, 집집마다 모두 벽청(甓廳)이 낮아서 우리나라 나무 대청(大廳)의 크고 편리함만 같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여러 곳의 누각은 모두 날아갈 듯 치켜 오른 부연(附椽)에 두공(枓栱)에 산을 그리고 동자기둥에 수초를 새겼다. 창문 창살의 조각도 모두 우리나라의 공장들이 미칠 수 없는 바인데, 나무로 된 대청 하나는 우리나라가 나았다. 누대의 큰 기둥은 모두 나무를 합하여 세우고 가죽으로 싸서 겉은 붉은 칠을 하였는데, 썩어서 떨어져 나간 곳을 보니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가죽을 싼 것과 밖에 칠했던 것이 이지러져 일어나는 것은 그 두께가 손바닥만 하였다. 길옆의 두어 칸 토실(土室) 또한 모두 몇 칸이나 되는 넓은 등마루이며, 비록 수수깡 창문을 만들었을지라도 반드시 꽃무늬와 가는 만(卍) 자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 풍속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무량옥(無樑屋)이란 것은 용마루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곧 평평한 용마루를 말한 것이다. 옥제(屋制)가 위를 평평하게 하여 용마루가 높지 아니하니, 빗물이 흘러나가기 어려워서 비록 회로 바르고 진흙으로 바를지라도 새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수천금 나가는 큰 집이 밖으로 단청을 하고 안으로 꽃종이를 발랐을지라도 칠량(七樑)과 구량(九樑)과 능화(菱花)와 판자 가운데에 한번 비나 눈이 지나가고 난 후면 흙물이 줄줄 흘러내려오므로 비가 그치고 해가 뜨면 흙을 바르고 종이를 바르느라 집집마다 분분(紛紛)하니, 이런 제도는 금하여 그만두게 함이 옳을 것인데, 심양(瀋陽)으로부터 서쪽으로 수 백리의 땅에 이런 집들로 풍속을 이루었으니 괴이하고 나쁜 풍습이었다.
사묘(祠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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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가 많기로는 저들과 같은 데가 없다. 제왕묘(帝王廟)와 동악묘(東岳廟)는 연경의 큰 시설인데, 제왕묘에서는 예부터 역대의 제왕들을 모두 위패를 모시고 묘향(廟享)하며, 동악묘 중에서는 산령(山靈)ㆍ지선(地仙)ㆍ옥제(玉帝)ㆍ옥녀(玉女)ㆍ명부(冥府)ㆍ귀사(鬼司) 등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없다. 동악묘의 시설은 열군(列郡)으로부터 있고 또한 용왕묘(龍王廟)도 있으며, 국학ㆍ향교에도 모두 문묘가 있다. 연경에 있는 관제묘(關帝廟 관우(關羽)의 사당)가 몇 군데인지 알 수가 없으니, 천하가 모두 그러하다. 연로에서 본 고을과 마을에는 집집마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요동이 제일 웅장했다.
조신(竈神 부엌신)과 노신(路神)에 이르러서도 사(祠)라 하고 묘(廟)라 하는 것이 허다하다. 청절사(淸節祠)와 문산사(文山祠) 및 강녀묘(姜女廟) 등처는 모두 몸소 가 보았고, 그 외에 지나면서 바라만 본 곳을 이루 다 기억할 수가 없으니 귀신을 존숭하는 것이 또한 청(淸) 나라 풍속만한 데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남묘(南廟)와 동묘(東廟) 및 남쪽 지방의 여러 관제묘는 모두 중국 사람이 세운 것인데 이미 명 나라 때부터 그러하였으니, 천하가 관우를 존봉하는 것이 그러한 전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 소상(塑像)의 세밀함과 정교함은 우리나라의 공장이들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음식(飮食) - 주정(酒政)ㆍ과소(菓蔬)를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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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柵門)에 들어온 뒤부터 본 바로는 저 사람들의 식품이 우리 풍속과는 크게 달라서 모두 교좌상(交坐床) 및 발이 높은 큰 상(床)을 썼고, 소반의 제도는 없었다. 심양 이후는 모두 담식(淡食)을 하여 혹은 생파 한 줌으로 한 그릇의 밥을 먹기도 한다. 밥 먹는 법이 매우 거칠어 모두 옥수수로 주식을 삼는데, 삶아 익혀서 물에 말아서 먹는데 모두 젓가락을 쓰고 숟가락은 없었다. 반찬에는 김치 같은 유는 없고, 고기로 주장을 삼고 달걀과 거위알 같은 것이 그 다음이다. 밥그릇은 모두 다종(茶鍾) 등의 그릇을 썼고 원래 큰 주발이 없으며, 한 공기를 먹고 나서 두세 공기 먹기도 하니, 많고 적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일찍이 행인(行人)이 밥을 사먹는 것을 보았는데 반찬은 한 다종(茶鍾)의 소금과 손가락만도 못한 준치 및 한 개의 달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밥을 먹고 난 것을 보면 소금과 고기만 먹을 뿐 달걀은 가지고 일어났으며, 한번 식사한 값은 당전(唐錢) 40문(文)이었다. 일찍이 찬물을 보니, 곧 장과(醬菓)ㆍ혈증양(血蒸羊)ㆍ저육초(猪肉炒)ㆍ두부국ㆍ달걀과 거위알 등이었다. 흰 소금은 아주 귀하였고, 망해점(望海店) 앞에 편염(片鹽)이 있었지만 마두(馬頭)들이 모두 무역하여 연경에 들여갔다. 생선이 드물어서 바다 근처에만 종종 있었다.
떡은 한결같지 아니하여 모두 밀가루로 둥글게 빚어 만드는데, 고기 소가 든 것도 있고, 설탕 소가 든 것도 있었다. 백설기[白雪餻]는 두 쪽에 당밀(糖蜜)을 넣어 붙이고 전후면에 붉은 연지의 투인(套印)을 찍으니, 이것이 찹쌀떡으로 비로소 우리나라의 떡맛과 같고 그 외에 다른 모든 떡은 우리의 떡만한 것이 없었다. 기름에 지진 가래떡이 가장 많았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먹는 법은, 다리가 높은 큰 상을 놓고 사면에서 의자에 걸터앉아 두루 자리를 정한 뒤 사람 수에 따라 각각 빈 술잔 하나, 빈 접시 하나, 젓가락 하나, 쌍사시(雙沙匙) 하나, 다종(茶鍾) 하나를 놓고 나서 먼저 차(茶)를 돌리고 다음에는 과일을 상 가의 사방 주위에 진설(陳設)한다.
과일 종류로는 호도당(胡桃糖)ㆍ행인당(杏仁糖)ㆍ과자당(瓜子糖)ㆍ밀조(蜜棗)ㆍ건포도(乾葡萄)ㆍ생포도ㆍ복숭아ㆍ배ㆍ버찌ㆍ능금ㆍ빈과(蘋果)ㆍ사과ㆍ감인행(甘仁杏)ㆍ참외ㆍ수박ㆍ용안(龍眼)ㆍ여지(荔支)ㆍ생 연뿌리ㆍ남칠(南七) 등 없는 종류가 없었으니, 남칠이라는 것은 곧 마름열매이다. 설탕과 섞어서 먹으니 연하고 달며 시원하였다. 과일을 차린 뒤에 다시 술안주를 차리는데 평평한 접시 4개를 놓았으니, 하나는 마늘, 하나는 장과(醬菓), 하나는 생채(生菜), 하나는 숙채(熟菜)였고 그렇게 한 뒤에야 술을 돌렀다. 술을 돌리는 법은 마신 즉시 술을 따라, 마시고 나면 곧장 따르고, 잔이 비어 있는 때가 없었으며, 연회가 파한 뒤에야 그쳤다. 조금 있다가 술안주를 차리는데, 익힌 저육(猪肉)과 양신(羊腎)ㆍ양간(羊肝)ㆍ초오(炒熬)ㆍ백숙(白熟) 닭고기 및 향개채(香芥菜)ㆍ죽순채(竹筍菜) 등과 마른 떡 여러 가지, 잡채 등과 고기만두[肉饅頭] 등이었다. 특별히 단간장 한 그릇, 초 한 그릇을 나무잔에 섞어서 두고, 각각 자리 앞에 초장을 나누어 차려서 가져다가 먹기에 편하게 하였다. 다시 분탕(粉湯)ㆍ세면(細麪)ㆍ편수(䭏水)ㆍ돼지국ㆍ양국ㆍ닭국ㆍ오리국ㆍ두부국ㆍ통째 삶은 돼지ㆍ해석(海蜥)ㆍ찐 어시고(魚翅膏)ㆍ황백해삼고(黃白海蔘膏)ㆍ숙장어초(熟長魚炒)ㆍ잡채(雜菜)ㆍ골동반(骨蕫飯)ㆍ연화전(蓮花煎) 등을 이어서 차려놓았다. 또 큰 접시를 높이 놓고 흰 소금 같은 것을 놓았으니, 이것은 설탕인데 떡을 찍어 먹는 것이었다. 저들 땅의 육품(肉品)으로는 양고기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기름진 살이 제일 좋고 그 다음으로는 닭고기ㆍ돼지고기ㆍ거위고기ㆍ오리고기요, 쇠고기는 딱딱해서 맛이 없어 거의 먹을 수 없을 정도다. 개고기는 먹을 줄을 모르고 뱀과 구렁이 등을 먹는 자가 있었으나, 이른바 장어(長魚)라는 것은 곧 뱀이요, 참으로 물속에서 사는 장어가 아니었다. 내가 일찍이 한 곳에서 어초(魚炒)를 먹고 돌아올 적에 아랫사람의 말을 들으니 조금 전에 큰 뱀 하나를 벗겨 삶았다고 하였다. 그 맛은 물고기보다 못하였다.
저들 땅에 과품(果品)의 풍성함은 우리나라보다 더하다. 고욤나무[梬棗]가 도처에 숲을 이루었고, 담 모퉁이나 밭두둑에는 모두가 멧대추[酸棗]였다. 포도도 또한 집집마다 있는데, 청색ㆍ자색ㆍ흑색의 여러 가지는 맛이 상쾌하여 먹을 만하였다. 감인행(甘仁杏)이란 것은 색이 엷은 황색이며 매우 굵어서 우리나라의 단행(丹杏)과 같았는데, 맛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으며 전혀 신맛이 없고, 한 알의 값이 당전(唐錢) 1문(文)이었다. 풋밤[軟栗]과 푸른 감도 모두 있었다.
주정(酒政)은 모두 소주이고 청주와 탁주를 빚는 데가 없었다. 길 곁에 소과주국(燒鍋酒局 소주 만드는 공장)이 있는데, 한번은 들러 보니, 빈 행랑에 누룩이 산더미같이 쌓였고 밀누룩을 석회와 섞어서 조각을 만들었다. 술을 빚는 곳은 칸마다 구역을 만들고 항아리를 그 가운데 두고서 군데군데 사이를 막았는데 바로 찬합의 칸살과 같았다. 이와 같은 수백 칸이 익은 술을 묻어 놓은 독이었다. 다시 한 곳에 이르니, 찐밥을 누룩과 섞는데 쌓인 술밥이 수십 석에 이르렀고, 남자 10여 명이 모두 나무 삽을 가지고 벌여서서 밥을 들추어 공중에 던지매 밥이 대들보를 때려 사면으로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니, 잘 섞일 때까지 하였다. 노구에 술내리는 곳은 평지에 부엌아궁이를 만들어 솥을 걸었는데 우묵하게 솥의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었고 공중에 연통을 만들어서 벽돌로 다섯 길이나 쌓아 연기가 다발처럼 나오는 것이 멀리서도 바라보였다.
불 때는 곳에는 동자(童子)가 한 단씩 묶은 수수깡으로 서서 불을 때는데 아궁이는 둥근 것이 평지에 나와 있고, 다발째 꺾어서 집어 넣는다. 그 아궁이를 엿보니 안이 1칸은 됨 직하였는데, 붉은 불꽃이 이글거렸으나 그것은 모두 석회였다. 소주 공장의 앞에 우물이 있고, 기계를 장치하여 서서 우물의 물을 길어 노구에 붓는다. 기계를 놀려 노구의 귀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니 소주가 세찬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술 저장하는 항아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 다닥다닥 줄을 이루었고, 납으로 만든 독 뚜껑으로 덮어 놓았다. 주상(酒商)이 큰 수레로 큰 가죽상자에 술을 부어 싣고 운반하였다. 누룩에 석회를 쓰기 때문에 술이 흔히 독하였다.
백주(白酒)는 한 잔의 값이 당전(唐錢) 5문(文)이었으며 진홍주(眞紅酒)는 맛이 감렬(甘烈)하여 아주 좋았으니 이름은 오가피주(五加皮酒)인데 한 잔의 값이 7문(文)이었다. 포도주는 맛이 상쾌하고 달콤하였는데, 한 잔의 값이 20문이었다. 이른바 소흥주(紹興酒)라는 것은 소주가 아니라 빚어서 만드는 것인데, 엷은 황색이었고, 맛이 매우 담담하여 1만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을 갖출 적에는 반드시 이 술을 내놓았으니, 종일토록 주고받아도 실수하는 바가 없음을 취하였고, 또 마시지 못하는 자가 없음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한 잔의 값은 50문이었다. 주루(酒樓)가 있는 여러 곳은 모두 유람할 만하였으니, 중문(重門)과 층루(層樓)가 천백 사람을 용납할 만하였고, 칸마다 교의(交椅)와 고상(高床)을 베풀어놓아서, 마시며 기분을 풀기에 편리하였다.
기용(器用) - 배ㆍ수레ㆍ가마를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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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기(木器)와 궤장(櫃藏) 등은 모두 완전하고 좋아서 쓸 만한데, 반드시 붉은 칠과 금(金) 무늬를 놓았고, 교의(交椅)와 교좌상(交坐床) 등은 화류(華榴)와 강진향(絳眞香) 등을 많이 썼으며, 토기(土器)는 모두 가볍고 치밀하게 문채를 놓았고, 일용음식(日用飮食)에는 모두 그림 그려진 옹기를 썼으며 유기(鍮器 놋그릇)나 도기(陶器)는 없었다. 토분(土盆)은 모두 청록(靑綠)으로 입혔고, 기와와 벽돌 등 물건은 모두 오색으로 만들었는데 진채(眞彩)가 선명하고 윤택하였다. 철물(鐵物)과 연기(鉛器)는 매우 완전하였고 병배(鉼杯 금술잔)와 관첩(罐貼)과 촛대와 향로 등은 모두 놋쇠와 백철로 만들었으며, 납과 놋쇠는 값이 같은데 부드러워서 깨지지 않고 또한 오래 쓸 만하였다. 도검(刀劍) 등의 기구는 쇠가 날카롭고 솜씨가 정밀하며, 황석(黃錫 누런 주석)ㆍ백동(白銅)ㆍ적동(赤銅)ㆍ백은(白銀) 등의 그릇은 제작이 교묘하였다.
싸리광주리ㆍ대바구니ㆍ등람(藤籃)ㆍ지호(紙壺)의 유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용하기에 편리하였다. 배는 반드시 판자를 깔았으니 비록 나루터에서 사람을 건네주는 것이라도 판자를 깔고서 오르내리므로 수레나 말이 오르고 내리기에도 매우 편리하였고, 깐 판자가 있었기 때문에 배 안이 평탄하여 깊이 빠지고 기울어질 근심이 없어서 대청에 앉아 있는 것처럼 꼿꼿하였다. 해선(海船)은 모두 층루(層樓)를 만들고 외변은 다 쇠로 장식하였으며, 수놓은 깃대와 갈포돛은 안팎이 볼만하였다. 배 안에는 방을 만들어서 창문에 주렴을 드리웠는데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수레 제도는, 큰 수레는 바퀴가 두껍고 쇠로 장식하였으며, 수레 위는 점불(簟笰 대나무 돗자리와 가리개)을 만들었는데, 노새나 말 8, 9필이 끌고 있다. 태평거(太平車)는 멀리 가는 자는 두 마리 말로 멍에를 메우고, 가까이 가는 자는 한 마리의 말만 쓰는데 한 마리 말이 끄는 수레는 세 사람이 탈 만하였다. 한림거(翰林車)라는 것은 바퀴가 크고 붉은 칠을 하였으며, 바퀴가 수레의 뒤에 있으므로 돌에 부딪혀서 유동할 걱정이 없고 수레 안이 편안하였다. 다른 수레는 그렇지 않아, 두 수레바퀴가 바로 수레 아래에 있었고 가운데는 부딪히는 곳이 심히 움직여서 수레에 앉아 있는 자들이 혹 공중에 떴다가 떨어져서 가슴과 배를 모두 아파하는 때가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한림거는 지위가 높은 자만이 탄다. 수레의 꾸밈이 정밀하고 사치스러우며, 좌우에 창이 있어서 열고 닫을 수 있다. 농가에서는 모두 전거(田車)를 썼으며 또한 동거(桐車)도 있었는데 한 농부가 가죽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손으로 밀어서 운행하였다. 여교(女轎)와 소두자(小兜子)는 사면에 발을 드리웠는데, 우리나라 송경(松京)에서 시집가는 여인이 타는 것이 그에 가까웠다. 사인교(四人轎)는 가볍고 편리하며 사치스러웠고, 푸른 비단으로 장식하고 위에 덮는 것은 검은 끈으로 짠 그물을 써서 사면에 술을 드리웠다. 가마 안에는 층계를 만들어서, 바로 쌍교(雙轎)와 같이 하였고, 아래에는 걸터앉는 자리를 만들어서 매우 편하였다. 네 사람이 그것을 메는데, 전후의 두 장대에 푸른 갈포(褐布)의 멜빵을 매 놓고 붉은 칠을 한 짧은 장대를 메니 네 사람이 바로 긴 장대의 중간에 있어서 일자(一字)로 메고 가니 매우 편리해 보였다. 또 쌍교라는 것이 있는데, 행상하는 무리들이 모두 탄다고 한다. 두 마리 말에 멍에를 메우고 다시 한 사람의 부호(扶護)해 줌도 없으되 가마가 편안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니, 만든 제도의 좋은 법을 알 만하다.
금축(禽畜) - 곤충ㆍ뱀을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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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라 땅의 소는 비대한 것이 없고, 빛깔은 붉고 몸통이 작았다. 광녕(廣寧) 경계 안에서야 비로소 소가 비대하며 사하(沙河) 등지에는 순자(犉牸 털이 누렇고 입술이 검은 암소)가 들에 가득하다. 청우(靑牛)는 털이 길고 코가 희며 발은 말발처럼 생겨서 탈 만한 것이 많았다. 거의 백여 마리나 되는 소가 떼를 지어 풀을 뜯는데, 몇 사내가 긴 채찍을 들고 삿갓을 쓰고 보호하였다. 수레에 멍에 메우는 것들은 모두 코를 뚫지 않았고, 또한 목을 묶지도 않았으니, 멍에하고 부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배울 만하였다. 소를 도살하여 매매하는 방법은 곳곳이 같았다.
말을 기르는 자들 역시 말굴레를 씌우지 않았는데도 말타고 달리기가 편리하였으며 말을 모는 자는 왼쪽에 있었다. 털이 윤택한 양마가 드물었고 산북(山北) 변방의 종자가 가장 좋았다.
밭 가는 사람들은 꼭 소만 부리지 않고 말ㆍ노새ㆍ나귀를 아울러 거리낌없이 통용한다. 또한 과하마(果下馬)가 있는데 몸이 작고 또 골격이 섬세하다.
노새는 어디서 나는지를 알 수 없는데, 말쑥하고 윤기나며 강하기도 노새만한 것이 없고, 무거운 것을 끌고 멀리 가기도 또한 노새만한 것이 없다. 일찍이 보건대, 흑룡강(黑龍江) 군병(軍兵)들이 회강(回彊)에서 돌아올 적에 수만 리 길의 치중(輜重)을 모두 노새가 수레를 끄는데, 진탕이 배까지 빠지는 길에서도 굳세고 씩씩하여 좌절되지 않고 오히려 교일(驕逸)한 기운이 넘쳤다. 성 안의 태평거(太平車)도 모두 노새로 끌고, 행상(行商)들의 짐수레도 모두 안장을 갖춘 준수한 나귀ㆍ노새ㆍ소ㆍ말인데 노새가 반이 넘는다.
늘 보면 은 안장에다 수놓은 바퀴통[轂]에 말이 살찌고 기름이 번지르르하여 높이가 7자가 넘으며, 더러는 층층 등자(鐙子 발걸이)를 단 것도 있는데, 값이 은자(銀子) 500냥이나 된다고 한다.
사막[泥沙]을 지나가려는 사람도 천 리를 가는 노새라야만 비로소 사막을 지나갈 수 있으니, 번개치듯 뛰어가지 않으면 반드시 풍사(風沙 바람에 몰려오는 모래)에 묻힐 염려가 있어, 기기(驥騏)나 요노(騕褭)가 아니고서는 갈 수 없다.
노새를 부리는 사람은 반드시 어루만져 달래기를 조용하고 순순하게 하여 마침내 버릇이 길들여지게 해야 하고, 진실로 과격하게 성내어 꺾음으로써 제멋대로 날뛰어 억제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게 해서는 안 되나, 꽁꽁 얽은 뒤에는 위협하여 억제하기를 못할 것 없이 한다. 입에는 쇠 재갈 두서너 가닥을 물렸고 양쪽 이빨 사이와 위아래 입술 사이에도 모두 쇳조각을 붙였으므로 움직일 즈음에 언제나 입술이 뒤집힌다. 네 발굽에는 모두 징을 박았다. 빻은 밀을 풀에다 섞어서 먹이는데 그들의 이른바 부자(麩子 밀기울)로서 우리나라의 누룩 만드는 기울[只花]이다. 소ㆍ말 할 것 없이 모두 이것을 먹이는데 살찌고 강하며 병이 적다. 원래부터 콩을 먹이는 법이 없고, 소나 말 등은 또한 모두 찬물을 먹인다.
나귀는 산서(山西)에서 나는 것이 유독 비대하고 날쌔다. 관(關) 안팎에서 본 것으로는 푸르기도 하고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여 그 빛깔이 일정하지 않았다. 떼를 지어 풀밭에 놓아먹이는 것은 모두 소소한 못생긴 것인데, 한 떼가 많은 것은 혹 50여 마리도 넘었다.
그 지역의 농사일이나 일상 생활에 따른 사역(使役)을 나귀가 아니면 할 수 없다. 쟁기 메우는 것, 곡식 운반, 타작, 수레 메우는 것, 타고 다니는 것, 짐 나르는 것, 쌀 찧는 것, 콩 빻는 것, 물 긷는 것이 모두 나귀의 일이기 때문에, 비록 과부ㆍ홀아비ㆍ중들의 집일지라도 반드시 나귀 두세 마리가 있다.
무엇을 빻거나 갈 때에는, 나귀의 두 눈을 가리고 방울을 달아 놓으면 눈을 가린 채 뛰며 돌다가 눈을 벗겨 놓으면 꼿꼿이 서고 돌지 않으니, 원래부터 익히 길들인 소치이다. 눈을 벗겨 놓으면 먹을 것을 찾는 마음이 생겨 일을 잘 하지 않게 된다.
길 곁에서 팔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마른 짚 한 줌을 머리 위에 꽂아 식별하게 하였다.
이른바 참려(站驢)란 것은 아무 곳에서 아무 곳까지 세를 정하여 가게 되는데, 갈 때에 나귀 주인이 나귀의 귀에다 정녕하게 소곤거리고서 드디어 나귀를 가는 사람에게 내어 준다. 그 사람이 타고가다가 지경에 이르러 세 정한 한계를 넘으려고 하면, 나귀가 곧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데, 온갖 방법으로 채찍질하여도 죽여라 하고 듣지 않다가 할 수 없어 되돌아가게 하면 귀를 털며 쏜살같이 달려가므로 한 걸음도 더 타고 가는 일이 없다.
부녀자나 중들은 모두 나귀를 타는데, 수레에 메우는 것도 또한 많다.
돼지들의 매매가 활발한데, 보니 돼지 가진 상인을 천하의 큰 부자라고 했다. 돼지를 사방에서 사들여 경읍(京邑)에다 교역하고 천 리 안팎의 땅이 돼지 놓아 두는 밭이 되는데, 집을 짓고 울타리를 만들어 겨[糠]와 쌀가루[籺]를 많이 쌓아 두었다.
수십 명의 인부가 채찍을 들고 천여 마리의 돼지를 모는데, 하루 가는 것이 60리에 지나지 않았고, 참(站)을 배정하여 먹였다. 돼지 1대(隊)가 50마리인데, 대마다 앞에서 몰아 길을 덮고 갔다.
산해관 안팎은 돼지의 귀가 매우 큰데 두툼하게 늘어져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관 밖에서는 순백색의 큰 돼지를 보았으니, 곧 옛날의 이른바 요동돼지[遼東豕]이다.
일용 음식에 양고기가 제일 가고 돼지고기가 다음인데, 백숙(白熟)이 으뜸이고 썰어 국끓인 것이 다음이며, 백정들이 저울로 달아 판다. 무릇 어느 여염집에서나 보통 키우는데 서융(西戎)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목축이 번성하기로는 염소[羔]와 양만한 것이 없고, 풀밭에 놓아먹이는데 한 떼가 수백 마리씩이나 된다. 몽고의 풍속이, 키우는 양이 골짜기를 메울 정도이고 말과 소도 또한 산에 그들먹하다고 한다.
염소와 양은 우리나라에서 기르는 것과 다름이 없으나, 고기 맛이 기름지고 연한 것이 양고기보다 나은 것이 없다. 굽든지 그슬리든지 어느 쪽이나 좋다. 푸주에 통째로 도살한 것을 쇠갈고리로 늘어 걸어 놓았으니 이것이 소위 육림(肉林)이다. 양고기를 먹은 뒤에 간혹 쇠고기를 먹어 보면 딱딱하고 깔깔하여 맛이 없다.
양고기가 사람에게 매우 널리 보(補)가 되기 때문에 연경을 가게 되면 친구들의 양고기ㆍ양 간ㆍ양 콩팥 등 여러 가지 부탁을 다 수응할 수 없다.
양 한 마리를 포(脯)를 떠서 말리면 두어 근 남짓한데, 머리와 가죽 및 내장을 제하고 정육(正肉)만 포를 뜨면, 모두 값이 당전 700문(文)이다.
개 종류는 한결같지 않아서, 아주 크며 사나운 것이 있고, 또한 아주 작아 옹종하고 앙징하며 조그마한 것이 있다. 털과 골격이 섬세하고 윤기 나며, 아주 작은 것을 발발이라 하는데 이는 개 중에 악착스러운 것이다. 노새 종류에도 역시 옹종하고 앙징한 것이 있는데, 또한 발발나자(騾子)라고 한다. 발발은 집집마다 기르고 큰 개는 백에 한둘도 안 된다.
그들의 풍속은 모두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닭은 크고 작은 종류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중닭 한 마리 값이 50문(文)이고, 달걀 1개가 다섯 끼니의 반찬이 되어 닭과 달걀을 항시 쓰게 된다.
깃 하나 털 하나도 저 사람들은 등한히 버리지 않고 크고 작은 깃털을 묶어서 비를 만든다. 뒤섞인 닭털을 수레에 싣고 지나다니는데 어디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비둘기 역시 반찬거리여서 집집마다 키우는데, 각가지 빛깔의 종자가 있다. 모두 쇠방울을 달았는데, 비둘기 떼를 내놓아 날게 되면, 퉁소 부는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것과 같다.
거위와 오리를 시냇물에 키우는데, 흰 큰 거위와 푸른 큰 오리가 지저귀며 울어댄다. 그 알이 상용하는 반찬거리가 되며, 백숙(白熟) 오리국 맛이 순순하고 담담하며 기름기가 많아 닭국보다 나았다.
뱀은 많이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소위 구렁이 같은 것들은 아주 드물고, 소소한 한 자[尺] 정도의 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먹을 수 있는 뱀 종류가 많은데 그 형상은 알 수 없다.
수목(樹木) - 화초도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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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柵門) 이후부터 소나무를 보지 못했고, 압록강을 건넌 뒤에도 아울러 솔이 없었으나, 이제묘(夷齊廟)ㆍ강녀묘(姜女廟)에 혹 한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으며, 백간송(白幹松)이 또한 더러 있었다.
그 밖의 잡목은 개오동나무ㆍ느릅나무ㆍ참죽나무 따위인데, 버드나무가 가장 많고 삼나무ㆍ전나무는 전혀 없으며, 문목(紋木)ㆍ압각(鴨脚 은행나무)ㆍ괴화(槐花) 등의 나무가 오히려 절반이나 되어 목재나 널판때기 따위가 모두 소나무나 잣나무가 아니었으며, 배도 모두 잡목이다. 수레에는 박달나무 및 문목을 쓰며, 궁실(宮室)에 쓰이는 것도 모두 참죽나무이다. 인가의 담장 안 및 무덤 원장 안에 심은 것이 모두 대춘ㆍ박달나무 따위이며, 적목(赤木)ㆍ백단(白檀)도 모두 있다.
화초는 각가지가 모두 구비되어 집집마다 꽃이 있는데 석류(石榴)는 겹꽃에 꽃잎이 붉어 여자들의 머리에 꽂기 가장 합당하다. 저자에서 파는 것으로는 옥잠화(玉簪花)를 제일로 쳐서 가장 사랑을 받는 것이 이것으로, 집집마다 분재(盆栽)하여 꽃을 따서 선사한다. 대저 이 꽃은 향기가 강렬하여 다른 꽃의 비유가 아니고, 비연(鼻煙)의 재료는 오로지 옥잠화의 향기에 의지하는데, 성안의 비연 파는 자들을 보면 꽃을 따서 비연 통 속에 넣어 판다.
그 밖의 여러 가지 꽃으로는 모란ㆍ작약ㆍ개나리[辛夷]ㆍ철쭉ㆍ두견화ㆍ봉선화ㆍ계관(雞冠)과, 여러 가지 국화나 여러 종류의 매화 등 없는 것이 없는데, 계관화는 또한 염색 재료로 사용한다.
죽련매(竹蓮梅)는 줄기 길이가 두어 자나 되는데, 이도 화초이다. 잎사귀는 버들 같고, 줄기와 잎은 약간 붉으며, 꽃잎은 기름하고 빛깔은 불그스름하여 형태가 오동나무 꽃[桐花]과 같다.
또 푸른 꽃이 있어 지부자(地膚子)와 같은데, 잎은 성기고 줄기가 가늘며 진한 청색이어서 사랑스러우니, 이름이 취조화(翠鳥花)이다. 또 사기(沙器) 분(盆에)다가 괴석(怪石)을 놓고 물풀[水草]을 심어 주황색 꽃이 핀 것이 있는데, 석죽(石竹)의 유에 지나지 않았다.
부용(芙蓉)은 가는 곳마다 있는데, 홍색ㆍ백분(白粉) 여러 가지 빛깔이 사랑스럽다. 연꽃이 무성하기로는 연경 등지만한 데가 없었다.
종려나무는 분재(盆栽)한 것이 있는데 뿌리 크기가 파초와 같으며, 더부룩하게 털이 덮였으므로, 그것으로 짜서 자리를 만들고 또 비를 만들기에 편리하며, 잎사귀는 접은 부채를 차차 펴는 모양과 같다.
소철(蘇鐵)은 뿌리가 종려나무와 같고, 잎사귀는 크며 가늘게 찢어져서 보기에 매우 기이했다.
선인장은 분재(盆栽)했는데 순 청록색이었다. 지엽(枝葉) 하나가 큰 손바닥만하고 안팎이 한결같은 빛깔이며 앞뒤 면의 군데군데에 몸뚱이처럼 자잘하게 뾰족뾰족 솟은 것이 있다. 오래된 것은 층층으로 돋아나서 한쪽 위에 다시 한쪽이 돋았는데, 그중에 큰 것은 4, 5쪽이 서로 붙어 두어 자나 높이 솟은 것도 있어 기괴하고도 기괴하였다.
무화과(無花果)는 분재한 것이 열매를 맺어 탱자와 같았다. 가지에는 가시가 없고 잎사귀는 크기가 배나무[梨] 잎만하며 줄기는 소가(小檟)와 같은데 겨울을 타지 않고 파란 것이 성숙하여 농창하게 붉어지면 맛이 달아 먹을 만하다고 한다.
오죽(烏竹) 및 자죽(紫竹)은 모두 흙이 붙은 채로 매매하는데, 큰 것은 낚싯대를 할 만하였다. 융복사(隆福寺) 시장에 숲처럼 캐다 놓았는데, 가지와 잎사귀가 시퍼렇게 무성하였다.
호초(胡椒)는 열매가 파랗게 설어 익지 않았는데, 씹어 보니 매운 맛이 혀에 묻어 여러 번 뱉어도 씻기지 않아 입 안이 중독된 것 같다가 밤을 지나서야 비로소 멎었다.
인용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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