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원문화의 중심지 충주(忠州) 답사 -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충주 고구려비(高句麗碑) 답사(踏査)하려고 용전리 입석(立石)부락에 도착했으나 고구려비(高句麗碑) 보호각(保護閣)이 있겠지 하는 선입감으로 고구려비(高句麗碑)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 보여서, 그 곳에 가까이 가보니 우리가 찾던 고구려비(高句麗碑)가 전시된 <충주고구려비전시관> 건물을 찾게 되었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위치도
고구려비전시관에 보존되기 전에 비각에 보관된 고구려비 : 출처 위키피디아
고구려비전시관에 보존되기 전에 비각에 보관된 고구려비 : 출처 위키피디아
충주 고구려비(高句麗碑)는 국내에 유일(唯一)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高句麗) 석비(石碑)로, 장수왕(長壽王)이 남한강(南漢江) 유역(流域)의 여러 성을 공략(攻略)하여 개척(開拓)한 후 세운 기념비(紀念碑)로 추정(推定)된다. 1979년 용전리 입석(立石)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碑面)이 심하게 마모(磨耗)되어 있었다고 한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 있는 고구려비
이 석비는 돌기둥(石柱) 모양의 자연석(自然石)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滿洲)의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비슷하나 크기에서는 그것보다 작다. 비문(碑文)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官職)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高句麗碑)임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비전시관
고구려 영토(領土)의 경계(境界)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百濟)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陷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中部地域)까지 장악(掌握)하여 그 영토(領土)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擴張)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歷史的)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歷史的) 가치(價値)를 지닌다.
이 비는 1979년 4월 5일 발견 되었고, 1981년 3월 18일에 국보 제205로 지정되어 지금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展示館)에 잘 보관되어 있다. 고구려의 무덤, 충주 고구려비와 탁본(拓本), 비석(碑石), 벽화(壁畵)등 다양한 자료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백제 신라의 자료가 함께 전시되고 있어 충주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최전선(最前線)으로 지리적(地理的) 중요한 요충(要衝) 지대(地帶)임을 다시 말해 주는 것 같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250여명에 달하는 인무들로 이루어진 대행렬도
대행렬도- 말에탄 주인공, 주변의 남녀시종, 보병악대
대행렬도-기마악대, 기마기수, 호위병과 기병들로 구성되어있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로 높이 203cm, 폭 55cm이다. 이 자연석을 비면(碑面)으로 하여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推定)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磨滅)이 심해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高句麗)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高句麗碑)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意義)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등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이곳 중원지방(中原地方)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收穫)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獨自性)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비문 내용을 소개하면, 충주지역(忠州地域) 향토사(鄕土史) 연구단체인 <예성(藝城) 동호회>의 보고에 의하면 완전 판독(判讀)은 불가능하나 현재 앞면 서두(序頭)에는 고구려왕(高句麗王)이 신라왕(新羅王)과 대대로 형제와 같이<如兄如弟> 지내기를 원하고 이에 신라왕이 공손(恭遜)히 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비는 남한의 유일(唯一)의 고구려비로 역사적(歷史的) 가치(價値)가 매우 크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쪽 경계선(境界線)을 이루는 기념비(紀念碑)로서 당시의 삼국관계(三國關係)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충주시는 고구려비가 서있던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280-11번지 일원에 78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전시관과 역사공원 등을 조성하는 충주 고구려비 정비사업을 공사를 마무리하여 2012년 7월 19일에 개관 했답니다. 전시관 건립으로 그동안 임시 보존 처리실(處理室)에서 보관된 고구려비는 원래 자리인 전시관(展示館) 내부로 옮겨졌으며, 이 외에도 전시관에는 고구려 시대의 생활풍습(生活風習)과 장군총(將軍塚)의 모형물(模型物), 충주 고구려비 탁본(拓本) 등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태동(胎動) 과정과 고구려비가 발견(發見)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동영상(東映像)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 확장의 경계비인 고구려비가 있었던 입석마을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가 충돌(衝突) 할 때 마다 이 곳 백성(百姓)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苦痛)과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을 감내(堪耐)하고 살아야 했던 인고(忍苦)의 세월이 생각난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제천 박달 휴게소에 들러 <안국환>회원이 우리 안사11회 까페 <대구소식 1009번>에 게재한 <고목에 새긴 오백 나한상(羅漢像)>을 감상하고 대구로 발길을 옮겼다.
목불전의 부처-고사목옹이 구멍을 통해서 본 부처
목불전의 부처 - 고사목 내부로 들어가 본 부처
오백나한전 - 고사목 내부에 조각된 목각불 1
오백나한전 - 고사목 내부에 조각된 목각불 2
오백나한전 - 고사목 내부에 조각된 목각불 3
오백나한전 - 고사목 내부에 조각된 목각불 4
|
첫댓글 고구려비가 전에는 단아한 비각 안에 있었던데
지금은 고구려비 전시관 안에 잘 보존 된 점 처음 알았습니다.
감상 잘 하였습니다.
작년엔 서암정사에서 동굴암벽에 부조한 부처들을 구경했는데 올핸 고목 안쪽에 부조한 부처들을 구경했네...
한 인간의 오랜 집념의 결과 아니겠나....그 집념에 찬사를 보냅니다...수행의 한 방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