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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불멸의 신화]
- 쉽지 않은 길-장산의 '모정원'
- "자식이 성장하면 청산리 전투서 산화한 독립군 위해
-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
- 강근호 지사, 구천 헤매는 무명 용사 추모 유언
- 1953년 강원도 양구서 연대장·정보요원 운명적 만남
- 이정희 여사, 가족 반대에도 결혼…1956년 부산 정착
- 1960년 사별 후 장산개척단 이끌며 남편 애국적 삶 조명
모정원(母情苑)은 독립운동가 강근호(姜槿虎) 지사의 부인인 이정희(李丁熙) 여사가
농장을 운영하며 살았던 집이다.
나는 모정원이 해운대 장산의 폭포사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 들은 채, 무작정 장산을 찾아갔다.
때는 가을이 치달아간 만추였으며, 해운대 장산은 등산객들로 붐볐다.
울긋불긋한 낙엽마냥 짙은 아웃도어 차림으로 장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늦가을처럼 행복해보였다.
그런데 폭포사를 지나 양운 폭포에 도착했건만 어디에도 모정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신선교를 지나 장산삼림욕장 체육공원에 이르자 길을 잘못 왔나하고 조바심이 났다.
어르신들에게 모정원 위치를 여쭤보았다.
"여기서 쪼매만 올라가면 됩니더."
어르신이 안내해준 삼림욕장 윗길은 갑자기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졌다.
등산화를 신고 올 것을, 후회가 됐다.
등줄기에 땀이 찰 무렵 산비탈을 따라 '돌의 강'처럼 암반들이 쭉 늘어진 너덜겅에 도착했다.
하지만 모정원은 없었다.
모정원을 가리키는 안내판도 보이지 않았고, 천제단과 장산마을로 가는 길까지 나눠졌다.
안달이 나서 길가는 중년의 여성들에게 물어보았다.
"아, 모정원요, 바로 위에 있심더"
장산마을 쪽으로 10여분을 더 올라가서야 반가운 모정원에 당도했다.
이렇게 모정원으로 가는 길은 숨도 가빠지고 땀으로 젖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 무명 용사에서 '독립운동가'로
강근호 지사와 이정희 여사가 살아간 삶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려운 삶을 선택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스스로 힘든 길을 따라 걸어갔다. 강 지사는 1898년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조양리에서 부친 강형석과 모친 신해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체격이 건장하고 심장이 뜨거웠던 그는 이미 함흥중학교 시절에 학생운동을 벌이다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도피 생활 중에 일본경찰을 죽이고 독립운동가의 피신을 도왔으며, 191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을 갔다.
만주에서 생활을 하던 강 지사는 1920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대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일제와 직접 전투를 벌여 싸우는
무장투쟁이 가장 힘든 길이었다.
매서운 추위와 험난한 지형, 그리고 간악한 일제의 군경과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무명용사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로 일컬어졌던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강 지사도
그의 독립운동을 입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느 독립운동가들처럼 망명 이후에는 본명을 버리고
'강화린(姜華麟)', '강화인(姜和仁)'이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삶을 챙길 여유가 없었으므로 1960년 작고 이후에 남은 유품이란
사진 몇 장과 6·25전쟁의 참전으로 받은 무공훈장 등이 전부였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광복군 출신의 안춘생 장군이 청산리 대첩의 참전용사임을 보증한 결과,
1977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생전 강 지사는 이 여사에게
"내 자식들이 성장하면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서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죽음과 마주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던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무명용사로 구천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강 지사 곁에는 남편이 걸어온 길을 끊임없이 발굴하려는 이 여사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의 노력 덕분으로 독립운동가 강 지사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졌고, 1990년
대한민국건국 애국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에는 강 지사의 전기인'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이 출간되어
비로소 그의 애국적 삶이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 청산리 대첩과 강근호 지사
지난 10월에는 강근호선생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강근호 지사를 통해서 본 청산리 전투와 한국전쟁 그리고 사랑'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강 지사의 삶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의미 있는 학술행사였다.
청산리 전투는 월등한 화력과 병력을 가진 일본군에 맞서 독립군이 크게 승리를 거둔 대첩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로 대한독립을 향한 열기가 커졌으며, 만주에서의 독립군 무장투쟁도 활발해졌다.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군도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그러자 1920년 독립군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두만강 상류 지역인 화룡현 일대로 집결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화룡현 청산리로 침입해온 일본군에 대항하여 10여 차례 일어난 격렬한 전투가 '청산리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를 수행한 독립군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부대가 합쳐진 연합부대였다.
만주에서는 소규모의 독립군 단체들이 항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일제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고
국내로 진격하기 위해선 연합전술이 필요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잘 갖춰진 일본군에 비하여 무장이 열악하고 수적 열세에 놓였다.
그나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체코 군대로부터 구입한 무기를 보유하였고, 병력도 많은 편이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가 큰 성과를 거둔 까닭은
이렇게 기관총과 수류탄 등 비교적 우수한 화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 지사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김좌진 장군의 요청에 따라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에서 교관으로 일을 했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1중대장 서리로 참전을 했는데, 중대장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다고 한다.
어떻게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한 중대를 이끌며 청산리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까.
김 장군이 젊은 강근호 지사를 크게 신뢰하여 중대장으로 발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보다 뛰어난 체력과 전투 지략, 그리고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지녔던 강지사의 됨됨이가
아마도 발탁의 배경이었을 게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후, 강 지사는 다른 독립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압박을 피해 시베리아로 떠났다.
1921년 수십 개의 독립군 부대가 대한독립군단으로 개편되었을 때, 그는 제1여단의 장교로 근무를 했다.
그런데 같은 해 6월에는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침통한 사건이었던 헤이허(黑河) 사변이 일어났다.
강 지사도 여기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러시아 적군에게 대항하다 포로가 된 강 지사는 1년간 수형생활을 하다 풀려났다.
적군의 포로 84명 가운데 24명만이 살아서 돌아온 처절한 감옥 생활이었다.
이후 강지사는 고려혁명군사학교의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화요회와 조선인청년동맹에 참가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정희 여사와 운명적 만남
강 지사는 해방이 되자 귀환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일을 하다가
1947년 남한 땅으로 귀환하였다.
삼십 년 이상 다른 나라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돌아온 고국이건만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당시 미군정은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군 경력자들을 흡수하여
단기 교육을 시킨 뒤에 육군 장교를 배출하였다.
강 지사도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여 특별 교육을 받은 뒤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 때 나이가 이미 52살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강 지사는 다시 참혹한 전쟁터로 나서야 했다.
1932년 충청남도 대덕군 진남면 송정리에서 태어난 이정희 여사는
1950년에 대전 대동여고를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증조부가 이시영 부통령이었으니 이 여사는 뼈대 있는 가문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 여사는 대구로 피난을 왔다가 학도의용군에 자원 입대하여 방송요원으로 활동을 했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여군으로 입대하여 국군 제1군단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의 여학생이 삶과 죽음이 늘 엇갈리는 전쟁에
스스로 나서서 싸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1953년에는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103사단에서 정보요원으로 일을 하였다.
이 전장에서 강 지사와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강 지사는 103사단의 122연대장으로 복무를 하였으므로 자연스레 이 여사와 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파티에 함께 참가를 했다가 연인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고 한다.
적극적 성격의 이 여사가 먼저 제안을 하여 파티에 함께 갔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미8군의 밴 플리트 사령관이 강 지사와 같이 있는 이 여사를 보고
'당신 부인이 요정처럼 아름답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말은 곧 드라마틱한 실화가 되었다.
이 여사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34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 넘고 결혼식을 올렸다.
강 지사는 1956년 제대를 한 후 부산 영도에 내려와서 살았으며,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었다.
하지만 단란했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선동 판잣집에서 살던 강 지사는 1960년 향년 63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강지사의 묘는 잠시 영도 봉래산에 두었다가 1964년에 해운대 장산으로 옮겨갔다.
1990년에는 다시 대전국립묘지로 이장을 하였다.
■해운대 장산을 일군 '여장부'
모정원은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란 뜻이란다.
이 여사가 애틋한 어머니 심정으로 가꾼 농원이건만 그녀가 병상에 누운 뒤부터 빈집이 되어 쓸쓸했다.
그래도 집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니 이 여사의 부지런한 손길이 남아 있었다.
부뚜막에는 솥이 걸려 있고, 냉장고와 항아리 등 세간이 그대로 있어
이 여사가 훌훌 병마를 털고 돌아올 것만 같았다.
이 여사가 살던 집에서도 강직하고 담백한 성품이 느껴졌다.
굵은 돌과 시멘트를 섞어 만든 벽체,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 건물이었다.
집 앞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계단식 밭들이 쭉 펼쳐있다.
이 밭에서 이 여사는 농작물을 심고 키워 수확했으리라.
그런데 왜 이 여사는 강 지사가 운명한 이후로 장산의 깊은 산골까지 들어와 살게 된 것일까.
남편이 숨진 후로 이 여사는 생활고를 겪다가 미군의 도움을 받아 고아원에서 일을 했다.
한 동안 보육원을 운영했던 이 여사는 1964년부터 장산개척단장을 맡으면서 여장부로 변모를 했다.
지금의 장산마을이 장산개척단에서 활동했던 주민들이 모여 살게 된 동네이다.
이 단장은 장산 일대의 50만 평의 개간 허가를 받고, 이 땅을 불하받은 주민들과 함께 자갈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무와 배추, 감자와 고구마 등을 심어서 재배를 했고, 젖소를 사육하는 낙농업에도 뛰어들었다.
미국복지재단에서 외래종인 홀스타인을 장산개척단에 기증한 게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외래종 젖소는 화젯거리가 되어 뉴스 방송에 보도되었다.
우유가 나오는 얼룩소를 처음 봤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장산개척단이 조성했던 목장은 1990년대까지 젖소를 키우다가 해운대 신시가지의 개발에 따라 사라졌다.
나는 여장부가 걸어간 쉽지 않은 길을 떠올리며 모정원을 뒤로 한 채 장산을 내려왔다.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왔던 그 길에서 다시 너덜겅과 마주쳤다.
수천 만 년 동안 풍화작용의 길을 걸어 결국 바위 군락이 된 너덜겅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지난한 길을 걸었던 부부의 삶을 웅변하는 듯,
너덜겅의 바위들은 듬직하고 굳건했다.
유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학예사
※ 공동기획: 부산해운대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