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내내 힘들게 했던 바쁘고 아픈 일이 끝나 비로소 자리에 앉는다. 아니다. 아픈 일은 끝나지 않았다. 아픈 일은 진행중이고 착실히 속도를 높여 갈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그 일,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일이며 이미 알고 있는 그 일이 급경사를 내려가듯 점차 빨라진다. 당연하다고 해서, 알고 있다고 해서 아픔이 가시지는 않는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그러나 인간임도 어쩔 수 없는 것.
금요일 오전에 서울에 올라가 저녁 나절에 아버지를 뵈었다. 아버지는 지난 달부터 노인 요양병원에 계신다. 집에서 멀지 않은 요양병원은 번잡한 거리에 있었고 좁았다. 몸이 불편한 엄마와 자식들이 찾아뵈려면 멀지 않아야 하니 누구라도 탓할 일은 못 된다. 지난 달이었던가, 지지난 달이었던가.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며칠 계속.
사흘 연속 전화를 받지 않으셔 운동을 가셨는지 외출을 하셨는지 혼자 궁금해 했다. 병원에 가셨을까. 전화기를 놓고 가셨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애가 타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며칠 뒤, 드디어 전화를 받으시긴 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제대로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허공에 대고 말을 하는 느낌, 아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느낌, 아니 아니다, 말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누군가 전화를 건네 받았다. 집에 오는 간병인이었다. 그녀는 이제 아버지는 전화를 못 받으신다고 알려주었다. 전화받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하릴없이 전화를 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는 동생에게서 소식이 왔다. 아버지가 노인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참이 흐른 후 오빠에게서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이려 했다고, 목을 졸랐다고 했다. 때리기도 했고 언니도 때렸다는 것이었다. 치매로 인한 폭력증상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는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누군가를 때리는 일도 없어졌고 누구보다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식사도 잘 하신다고 했다.
지난 주 화요일, 깊은 밤에 전화가 왔다. 오빠였다. 당뇨성 치매라 혈관이 막힌다고 했다. 당뇨성 치매의 특성상 진행이 빠르다고 아직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때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밤에 온 그 소식은 내내 우울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진행이 빠르면 벌써 얼굴도 못 알아보실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 사람이 그처럼 빨리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금요일 오전, 온천행 살렘 버스를 타고 광천에 내릴 때만 해도 명랑했다. 기차역까지 동행이 있었고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올라온 김에 볼일을 보았고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병원에 가면서도, 할아버지 치매가 심해지니 함께 가야한다고 가면서도 그다지 슬프거나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시설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병원이 불만이었을 뿐.
6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서 불안이 시작되었다. 내가 보아온 병원들은 건물안에 따로 칸막이같은 것으로 구분짓지 않았다. 이 병원은 일반 건물의 일부를 병원으로 개조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규모가 적어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들어서니 왼족은 간호사들이 있는 카운터, 오른쪽은 병상이 있는 병실이었다.
"이 기자 환자 어르신 찾아왔는데요." "이기환님이요. 저 안쪽에 계세요." 병실이랄 것도 없었다. 요양병원은 가보지 않았지만 청주 꽃마을, 말기 암환자들 시설에서 한동안 지냈던 적이 있어 대강은 안다. 병실마다 환자들이 여덟명 혹은 여섯명씩, 더 많을 수도 있지만,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구분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그 구분이 없었다. 아니 구분은 있었지만 벽이 아니었다.
병상이 양편으로 주욱 놓였고 그 사이는 좁았다. 의자 하나 간신히 갖다 놓을만큼, 아마 간호인의 편의를 위해서 그랬으리라. 그처럼 붙여놓은 것은. 아버지는 칸막이 옆, 병상에 누워계셨다. 머리를 바싹 깎고 몹시 마른 모습으로. "아버지." 아버지가 눈을 뜨셨다. "저 왔어요. 일어나실래요?" "응." 손을 등 뒤로 넣어 아버지를 일으켜 드렸다. 그랬는데.
"저녁은 드셨어요?" "먹었어." 환자복은 헐렁했고 짧은 머리칼 속으로 피부병처럼 각질이 더께져 덮여 있었다. 침대에는 살피듬이 온통 떨어져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눈빛은 집에 계실 때보다 맑았고 표정은 편안해보였다. 찡그리고 욕설을 내뱉던, 불만 가득한, 예전과는 너무 달라 충격을 주었던 그 아버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누구예요?" 저 쪽에 있던 간병인이 물었다. "딸."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대답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나나나나나" 아버지는 뜻모를 단어를 계속 웅얼거리셨다. 웅얼거리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의 턱이 떨렸다. 턱은 마치 스위치를 넣은 기계 마냥 혼자서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나나나나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구예요?" 당신의 외손자와 외손녀를 가리키면서 다시 간병인이 물었다. "몰라." 주차시키느라 늦었던 남편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남편이 인사를 했다. "누구예요?" 다시 간병인이 물었다. "몰라. 사위." 사위까지는 아시는데 손주는 모르시다니. 아버지 손을 쥐었다. 검지 손가락 손톱이 무좀으로 인해 상해 있었다. 바짝 마른 손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손목이 가느다랗다니. 내 아버지가.
간병인이 의자를 가져왔다. 등받이가 없는 야외용 의자였다.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 아버지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그처럼 꼿꼿하게 자기 관리에 철저하시던 내 아버지가 이렇게 변하시다니. 당뇨를 삼십년 넘게 앓으면서도 아픈 엄마를 줄곧 돌봐오신 아버지가.
아버지는 항상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쓰셨다. 철이 든 이후, 아니 웬만큼 나이 먹은 이후 늘 그 소리를 들었다. 내 하루는 아버지의 비질 소리로 시작했던 것이다. 휘경동 살던 시절, 아버지의 그 쓰레질소리는 나를 깨우곤 했다. 한지 미닫이 문밖으로 들리던 그 소리는 든든한 울타리였다. 담배 냄새를 좋아하는 것도 아버지 탓이다. 일년에 서너번씩 나는 꼭 앓아 누웠다. 계절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둑한 저녁, 아버지는 찬바람을 옷깃에 묻혀 퇴근하셨고 오자마자 아랫목에 누운 내 이마부터 짚어보셨다. 이마에 얹힌 아버지 손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햇살 찬란한 휘경동 한옥집이 그리운 것은 아버지가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추레한 사당동 집이 이토록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안방 아랫목에 누워 열에 시달리면서 비몽사몽간에 이마를 짚은 아버지의 시원한 손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오는 골목길을 좋아라 뛰던 , 그 어릴 적 광주 변두리 집이 아름다웠던 것은 아버지가 아이들 먹이려고 집안에 닭장을 짓고 닭을 키우셨기 때문이다. 한밤중 귀가 아파 울던 나를 업고 시내 병원으로 달리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내 아이들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은 내 안에 남아 내 삶을 결정했지만 어어쩌면 그것들은 나보다는 내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영향을 느끼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으므로 의식에 떠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나타났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원이 존재하는 방식은 바로 이것, 삶이 다음 삶으로 흘러내려가고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며 우리는 서로의 안에 살아남기 때문이다.
시골, 없는 집에서 자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집을 일구셨던, 말없이 할 일을 묵묵히 하셨던. 아버지는 곳곳에 계셨다. 다섯 명의 아이들 모두의 장소에, 모두의 마음속에 계셨다. 형제들은 다들 그만그만 했고 다들 나름대로 걱정을 끼쳤다. 잘 되는 자식도 없었지만 크게 잘못 되는 자식도 없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자식은 아무도 없었으니. 나는 아무 걱정도 안 끼쳐드렸어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지금 여기 혼자 쓸쓸히 계시는 것을. 기어이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울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남편이 나를 밀쳤다. "아버님, 식사 잘 하시고 운동 열심히 하세요. 꼭 나으실 거예요. XX가 기도 열심히 할 거예요." "응." 우느라 꼼짝 못하는 나를 밀어내고 딸아이가 아버지 이불을 덮었다. "할아버지, 이제 주무세요." "응." 아버지는 도로 누워 눈을 감으셨다. "저희는 가볼게요. 시골에서 올라와서 가봐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돌아나왔다. 눈물은 여전히 앞을 가렸고 아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세월은 간다. 사람은 늙는다. 아버지도 늙으셨다. 생명이 있는 한 시간은 멈추지 않고 우리 역시 사라진다. 알지만, 그 모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인간임은 어쩔 수 없는 것, 늙고 병든 아버지를 두고 돌아나오는 마음은 우울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집에 들어서서도 내려오는 새벽길에도 우울은 발톱 세워 마음을 후비고 아픔은 가시지 않는다.
첫댓글 인간의 영원이 존재하는 방식은 바로 이것, 삶이 다음 삶으로 흘러내려가고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며 우리는 서로의 안에 살아남기 때문이다.=>절창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버님이 편찮으시니 마음이 더욱 아프시겠어요. 힘내세요.
상실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멸과 친해지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약한 마음은 어쩔 수 없네요. 고맙습니다.
살아간다는 것,..가족이 서로를 보듬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 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 젊은 날의 삶은 이렇듯 치열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 치열함을 내려놓고...누군가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존재방식을 좋든 싫든 간에 받아들여 내 삶의 기초를 다지고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을 바탕으로 나는 또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네 모두의 삶의 모습일진데. 그래도 위안이 된다면 희야님께서는 좋은 기억들, 따스한 기억들로 아버지의 지난 날을 회상할 수 있음이 너무나 고마운 일이네요. 힘내세요. 가족 모두의 안위와 건강함을 위해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려 놓으면 나의 성장을 도왔던 기억들입니다. 고맙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김장할 때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며 큰 몸살을 앓으시는 우리 엄마 올해도 어린이집 김장 어떡할거냐고 걱정하시다가 또 배추를 절여놓으셔서 또 모른척 가서 버무려 왔습니다. 친정에 가면 꼭 엄마 아버지 옆에서 잡니다. 밤새 기침과 함께 끙끙 앓으시는 부모님..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몸져 누우시지 않은데도 친정 다녀오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희야님, 힘내세요!
받는다는 것은 곧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삶의 마지막까지 우리 자신도 역시 부모로 존재하겠지요.
희야님처럼 내내 숨죽여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내내 희야님 마음이 비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전 형편없는 딸이랍니다. ㅠ.ㅠ 나 자신만으로도 버거워하며 살아왔지요. 지금도 그렇고. 모든 자식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이제서야 읽게 되네요. '아버지는 곳곳에 계셨다.'는 그 한마디가 저를 때리네요. 맞아요. 우리가 보고 들은 것, 우리를 기른 그 모든 것들이 부모님의 것이었어요. 그걸 우린 또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더 큰 고통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본 아버지는 다소 나아지셨어요. 그럼에도 내 아버지는 어디 있지 하고 자꾸만 생각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