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선포 활동의 두 축: 구마와 치유의 사도직
1열왕 2,1-12; 마르 6,7-13 / 연중 제4주간 목요일; 2024.2.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인류를 영원한 생명에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사도 훈련을 시키고자 장차 당신이 가시려는 여러 지방으로 파견하시며 당신께서 평소에 하시던 직무를 위임하시는 장면을 소개하는 대목이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공생활의 초기인데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등 적대적인 무리들이 당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는 분위기가 감지되시자, 이 악의 야합에 대항하는 선의 연대로써 일찌감치 제자들을 열두 명이나 불러서 사도 훈련을 시킨 후에 둘씩 짝지어 지방으로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만 살고 일하는 체험을 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당신이 살고 일하던 원칙과 방식을 처음으로 밝히셨는데, 이것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지켜야 할 윤리에 따른 수칙이었습니다. 즉, 청빈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 같은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되, 그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어 주고 병을 고쳐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빈의 생활양식을 기본으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되 사회악에 맞서고 공동선에 투신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도직과 선교활동이 기본적으로 청빈해야 함을 뜻하는 것인 한편, 그렇게만 해도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토박이 지지자들이 얼마든지 넉넉하게 제자들을 맞아들이고 도와줄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얼마간 활동하면서도 또 다른 제자들을 예순 명이나 더 모아서 두 번째 파견 때에는 모두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루카 10,1-12). 말하자면 첫 번째 파견활동의 성과로 성소자를 다섯 배나 더 늘린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대를 이어 지속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도 초대교회가 세워져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지속적으로 선포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는 40년 동안 왕위에 앉아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면서 국권을 튼튼히 한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장면을 소개하였습니다.
다윗은 선임 왕인 사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때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고, 또 아들 압살롬의 반란도 겼었던지라 자신의 왕위를 내정해 놓은 왕자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일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고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흔히 직무가 다음 세대와 후계자들에게 넘어가는 전환기는 자칫하면 직무가 단절되거나 축소 내지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는 특별한 윤리와 이에 따른 수칙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치세에 이스라엘 왕국은 강성해졌습니다. 비록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무죄한 부하까지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 후에는 죄를 뉘우치고 더욱 조심하여 임금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 내치에서 안정을 이루었고 주변 민족들을 물리쳐서 외치에서도 국력을 크게 키워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말년의 다윗은 솔로몬에게,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야 한다.”(1열왕 2,3)는, 다분히 자기반성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덕분에 후계자 솔로몬은 하느님께 청해 받은 지혜로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릴 수 있게 되어 더욱 부강한 나라로 번영시켰습니다.
여기에 다윗이 국가를 잘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 치세에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한 비결을 알게 해 주는 다윗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여 나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
야훼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또 없나이다’
주께서는 그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로, 내 마음이 쏠리게 하셨나이다
다른 나라 신들을 붙좇는 자는, 저희들 고생을 더할 따름이오나 ―나만은 그들처럼 피의 전제를 아니 올리리이다,
신들의 이름을 입에 아니 올리리이다
주님은 나의 기업, 내 잔의 몫이시니, 내 제비는 오로지 당신께 있나이다
측량줄 내려져서 좋은 땅이 내 몫이니, 내 기업 흐벅지게 마음에 드나이다
깨달음을 내게 주신 야훼님을 기리오니, 밤에도 이 마음이 나를 일깨우나이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그러기에 내 마음 즐겁고, 영혼은 봄놀고, 육신마저 편안히 쉬오리니
내 영혼을 지옥에다 버리지 않으시리이다, 썩도록 당신 성도를 아니 버려 두시리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을 모시고 흐뭇할 기꺼움을 당신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을 보여 주시리이다”(시편 16,1-11).
이렇게 다윗은 죄를 저지른 후에 깊이 뉘우치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길에서 더욱 거룩하게 살고자 몇 배 더 애를 썼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예형이었는 바, 그분께서는 당신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충실하셨고, 그 비결을 파견윤리와 수칙으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청빈의 생활양식과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기, 그리고 사회악에 맞서며 공동선에 투신하기. 이는 또한 직무전환기는 물론 냉담자 증가 및 성소부족사태에 필요한 해법이기도 합니다.
파견된 사도들이 지켜야 할 윤리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의 죄를 없애는 지향을 준수하는 것이라면, 그 수칙은 청빈의 생활양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연후에 세상의 죄를 조장하는 마귀를 쫓아내며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즉, 청빈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구마와 치유의 사도직이 세상에 파견된 교회의 주요 활동 범주입니다.
구마 사도직 활동은 영혼이 병들과 정신이 취약해진 개인들을 괴롭히는 개별 마귀를 영적으로 쫓아내려는 구마 의식을 거행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사악하게 타락시키는 구조악을 몰아내는 정의평화 사도직 활동으로 나뉘어집니다. 특히 후자의 활동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이라는 우상에 대한 숭배가 만연되면서 사회교리를 형성시켰고, 그래서 정의평화 사도직 활동의 기반은 이 사회교리를 가르치며 구조적 사회악 현상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구조악 덕분에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에 의한 박해와 비난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만, 사도적 교회는 용기를 잃지 말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교리의 실천 활동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살거나 일하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약자들이 입은 상처와 피해를 보듬어주는 한편, 근본적으로 이들도 공동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고 또 증진시키는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치유 사도직 활동은 좁은 의미에서는 의료와 간호 그리고 원목 활동으로 전개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직접 돕는 모든 사회복지 활동은 물론 이들을 영적이고 전례적으로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사목 활동이 다 포함됩니다. 일반적으로 본당에서 행해지는 신심활동 역시 그러합니다. 신심 활동과 전례 참여 그리고 사목 활동으로 인하여 신자들의 영혼이 치유되고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 청빈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구마와 치유의 사도직이 세상에 파견된 교회의 주요 활동 범주여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요 복음선포 활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상적인 사목활동에서는 물론, 민족과 아시아의 복음화 과업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실천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복음의 영적인 차원과 선교적 차원의 균형과 조화야말로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해서, 교회와 신자들의 삶과 활동을 이해하는 통합적 관점입니다. 교회와 신자들은 세상에 파견된 제자 공동체이며 또한 사도직 공동체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