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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설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설교를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께 보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신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런 질문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신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왜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는가 그런 질문 말입니다. 바울의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사도였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를 번역한 것인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주님께서 보낸 자 그 사람들을 아포스톨로스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본 것처럼 우리 역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의 말씀이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보냄을 받은 자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보냄을 받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보냄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신앙해야 하는가 바울의 설교를 통해 살펴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설교를 한 바울은 어떻게 신앙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았습니다. 이 말을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평범한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살던 시대로 돌아가서 이 말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아주 심각한 말입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 유대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성경이 예언한 내용을 이룰 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내용입니다. 이사야서 60장 11절과 12절의 말씀인데요.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너의 성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서 밤낮으로 다치지 않을 것이다. 이방 나라의 재물이 이 문을 지나 너에게로 오며 이방 왕들이 사로잡혀서 너에게로 끌려올 것이다. 너는 섬기지 않는 민족과 너를 섬기지 않는 민족과 나라는 망하고 그런 이방 나라들은 반드시 황폐해질 것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세상의 중심으로 우뚝 세워줄 뿐입니다. 그래서 이방 나라들이 그 이스라엘에게 밤낮으로 종을 바치러 옵니다. 그 문이 닫히지 않는다 그래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 이것을 반대하는 나라들은 망하게 합니다.
이 말을 바울이 살던 당시 현실에서 생각해 보면 메시아께서 오셔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로마 제국마저도 이 메시아의 통치에 순종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그런데 그 식민지가 거대한 제국 로마를 다스린다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르게 보면 정치적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런 말씀을 붙들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였다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증거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렸다는 겁니다.
당시 일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관에 따르면 예수는 절대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로마를 물리친 적도 없고 오히려 그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바울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들은 이단이다 정죄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유대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박해하던 바울이 지금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아입니다. 그런 설교를 사람들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의 생각의 변화를 한번 살펴봅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나라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시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 그런 곳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로고스 즉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뜻대로 만들어졌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만족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갈 부분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라는 이 단어를 국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 나라를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국가가 아닙니다. 이 나라라는 말은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에덴을 창조하고 그 에덴을 아담과 하와에게 맡겼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이 세상도 사람들에게 맡긴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다스리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타락하자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싸움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은 물질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력의 싸움터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기쁨, 자기의 쾌락을 극대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세상에 향락의 싸움터가 이 세상이 향락의 싸움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세상, 그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세우는데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상한 행동을 했어요.
그게 뭐냐?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 대제사장을 임직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또 모세와 모세와 같은 예언자 혹은 지도자를 세울 때에도 그들이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처럼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 이들을 히브리말로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메시아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보통 명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사람, 그 사람들을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보통 명사가 고유 명사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는 특별한 분, 그런 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뀝니다.
용어가 이렇게 바뀌는 데는 지금까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 그들의 실패와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라고 사사들을 세워준 겁니다.
그런데 그 사사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사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그렇게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흐르는 가운데 21절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시대에 사람들이 왕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왕을 요구한 이유는 이웃 나라들과 같이 군사적으로 강력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에요. 왕 그 왕의 힘, 그 왕의 능력, 사람의 힘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세워진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울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사울을 물리치고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 22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운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22절을 보시면요.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이 부분을 헬라어 원문으로 읽어보면요. 직역하면 이런 뜻이에요.
그는 내 마음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여기에 카타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카타는 무엇 무엇을 따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거 진짜 그럴까요?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 즉 자기의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 바깥에 있던 그 언약궤를 자신의 성 다윗 성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표정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에게 실수도 있었고요. 심각한 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한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이 사무엘 화서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명 다윗 언약이라는 것인데요.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워주겠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좌를 차지하는 사람, 왕위를 차지하는 사람으로 세워주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습니다. 1차적으로는 솔로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지었지만 그는 타락했고, 그의 후손 유다의 왕들 역시 솔로몬과 같이 타락한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위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솔로몬의 후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그 사람이 메시아다. 그가 이 세상을 구원할 자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힌트도 주셨어요. 그는 2세의 줄기에서 다시 돋아나는 새싹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는 나귀를 타고 이 땅에 다윗 성에 입성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힌트들을 되뇌이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올 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에게서 이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37절을 보면 이 부활이 예수가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거부했던 그 가짜 메시아 예수를 참된 메시아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를 전하는 사도로서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그것을 설교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우리 현실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역시도 바울처럼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메시아이신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했나요?
고린도후서 5장 18절이 그분이 하신 일을 잘 말해줍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인데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메시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화해하게 하는 일,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흔히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그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저는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여기서 기독이라는 말은 헬라어 그리스도를 한자로 옮긴 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일, 그 일이 내게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한 일, 그 일을 하며 삽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로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는데요. 유럽에서는 종교를 랠리 기온이라고 합니다. 랠리 견이 무엇입니까?
락탄시우스라는 분은 이 랠리 견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레 다시 한 번 그리고 리 아래 묶는다. 연결한다. 이 두 단어가 연합된 것이 결합된 것이 랠리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겁니다. 결합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람들의 종교 생활을 보면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 분들이 꽤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셨겠지요. 사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서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는 종교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성공, 자기 뜻을 이루는 도구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껍데기만 있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자. 그는 그것을 통해 자기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울 나라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 그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서 무리수를 뒀습니다.
사울만 그랬습니까?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세아서 10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한번 봐주십시오.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 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재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 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
무슨 말입니까?
호세아 선지자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복을 주실수록 더 많은 우상을 섬겼다는 겁니다. 배운 망극한 행동이죠.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자. 그는 물질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그에게 권력을 주시자. 그 권력을 우상으로 섬겼고,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명예를 주시자. 그 명예를 우상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중에는 쾌락의 눈이 멀어 많은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그 이방 왕비들을 위해 다양한 우상 재단들을 만들어 섬겼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짜 화해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짜 화해되었다는 것은 늘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뜻을 질문하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려고 자기 스스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돈이 명예가, 때로는 권력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들이 내 자랑이 되고 내게 있는 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 붙들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겁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생겨나는 우상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역할이 뭘까요?
교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불화가 있는 곳,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곳, 또 사람과 사람끼리 불화가 있는 곳, 그곳에서 랠리 기온 다시 연결시켜준 것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요즘 한국에서 어린 세대들이 찐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찐따는 외모적으로 혹은 능력에 있어서 조금 부족한 이들을 왕따시킬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어 한 학급 내에서 공부를 잘 못하는 애가 있습니다. 찐따죠 운동을 잘 못합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아이를 찐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찐따들은 놀려도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어떤 글에서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 학급 안에 한 아이를 두고 다수의 아이들이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혐오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아이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반발을 했어요. 이런 찐따에게 이렇게 하는 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거는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이고 그냥 재미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을 촌스러운 꼰대로 치부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선생님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문화가 어린 세대 아이들이 자기들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까요? 아니면은 어른들로부터 배운 것일까요?
언젠가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계급 정하기가 유행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계급을 정한다는 거예요.
너 어떤 동네에 사냐?
강남에 살면 계급이 높고 강북에 살면 계급이 낮다는 거 지방은 아예 천민입니다. 어떤 직장에 다니냐 그 직장을 가지고 계급을 매긴다는 거예요. 너 학교 대학교 어디에 졸업했냐 그것에 따라서 계급이 정해진다는 겁니다. 이런 계급 정하기 놀이가 그냥 이런 개인의 스펙에서만 정해지는 게 아니에요. 심지어 젊은 어머니들이 유모차를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유모차가 어떤 메이커냐에 따라서 계급이 정해진다는 거예요. 비싼 베이크면 계급이 높은 거고 그러지 못하면 계급이 낮은 거예요.
유모차만 그럴까요?
옷, 신발, 자전거 여러 가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걸 가지고 계급 매기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왜 계급을 매깁니까?
나보다 못한 계급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서열을 매기는 거예요. 서열을 매기고 찐따로 대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문화가 되니까 어린아이들도 보고 학교에서 그러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이런 현상이 교회 밖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까? 교회 안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까?
우리 세대는 혐오 현상이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세대 간에 서로 혐오하고 지역 간에 혐오하고, 인종 간의 혐오함과 종교가 다르다고 혐오합니다. 다른 인종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조롱합니다.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을 자주 자주 경험합니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 말을 하고 독일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메시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일그러진 관계를 화해시키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일, 화해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메시아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렇게 산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제대로 믿지 않는 겁니다.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메시아께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믿고 살라고, 그 일을 세상 속에서 행하라고 우리를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메시아 예수님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은 랠리 기온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 속에서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자녀들을 가르치다 보면 잔소리는 많이 하는데, 그 잔소리가 소용없다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돌아서면 또 그래요. 왜 그럴까요?
자녀들은 부모의 잔소리를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부모들이 했던 행동, 자기도 모르게 보였던 그 반응, 그것이 그 자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의 홍수 시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으로 모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화해해야 합니다. 혐오가 넘쳐나는 이 세대에 화해의 일꾼이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