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익숙한 당시엔 어떤 당나라 사람들의 삶이 펼쳐졌는지
些我们熟悉的唐诗里 铺展了怎样的唐人生活画卷
2021년03월05일 11:03 시나 컬렉션 소스:이페어케이
출처: 문회보
원제:신동,전거와혼가:그 우리에게 친숙한 당시그 안에 어떤 당인의 생활 그림이 펼쳐졌는가?
구레나룻은 구레나룻을 탐내고, 옷과 눈은 성당이다.최근 한 무리의 당나라 뚱보들이 전국으로 퍼졌다.그대들이 춤을 추면하이테크놀로지 수단에 편승하여 오가다.오래된 두루마리 그림과 국보 문화재 사이에, 마치 당나라 사람들의 생활 두루마리 한 폭을 펼쳐 놓은 것처럼, 짙은 연기와 불꽃이 튄다.네티즌들 사이에서 폭넓고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한때 성당 문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저장대학 예술 및 고고학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낙거장안: 당도장안인의 생활" 전별장당시와 문물이 한데 이어져 있다.오늘날 사람들은 당나라를 이해할 때 독특한 시각을 제공한다.확실히,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당조가 하나 있지만, 동시에 나는.잘 알겠다고 우쭐대는 당나라는 실상은 흐릿한 역사였다.대당 이후 수많은 문사학자들이 당시 전장에서 거대한 역사 속에 산재한 당나라 사람들의 생활조각을 건져내 당 이래 1300여 년의 문화적 맥락을 찾을 수 있게 했다.우리에게 친숙한 당시들이 당대의 역사적 이미지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신동
동자과의 존재가 당나라를 신동으로 키우는 옥토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암기 위주의 동자과는 혹시나 하는 바람과 유치한 양심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당시 여야의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거위 거위 거위 곡조는 하늘을 향해 노래한다.흰 털은 푸른 물이 떠있고, 붉은 손은 맑은 물결을 헤친다."몽동도 외울 수 있는 이 당시는 '초당사걸(初唐四杰)'의 하나인 로크빙왕( 骆賓王)이 불과 일곱 살 때 쓴 것이다.그런데 바로 우리가 시인이 된 '어린 혜'에서심생감탄(心生 感叹 感叹)할 때 같은 '초당사걸(初唐四杰)'인 양형(楊形·양형)은 '10살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을 만든다.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 두 시인은 당나라 신동에 대한 후대의 순위 발표에도 실패했다.당대의 '신동'은 과연 얼마나 '신'이었을까.
명나라 가정연간의 호시는 《사고전서》에 수록된 저서 《진주선·권6》에 당대의 신동을 한 줄로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이백·두보·왕발과 같은 당나라 시인, 권덕여·장구령·유안 등이 많이 있다.글에는 "당세유혜자가 가장 많다…왕발구세작(王 岁九) 한서지결(漢書指 十三), 13작(三作) 등왕각서(阁王閣序) 이백은 10세에 백가를 관람하고 13능문사(十能文史)…"라는 당나라 연하(年代) 신동(新洞)이 배출됐을까?당 문화연구자 스융타오(永波)는 저서 『당인시대(唐人時代)』에서 과거 제도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에는 10세 이하의 응시 어린이가 구경 중 하나를 능숙하게 외울 수 있도록 신동에게 특정한 '동자과(童子科)'가 있다는 것이다.응시할 때 책 한 편당 10편씩 암기하고 모두 외운 자는 관직, 일곱 편 이상 외운 자는 진사 출신에게 준다.동자과의 존재로 당나라가 신동을 키우는 옥토가 됐지만 동시에 암기 위주의 동자과의 유아가 잔꾀로 벼슬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도 여야의 논쟁거리였다.당숙종보(唐肅宗寶)의 경우 예부시랑(禮部市郞) 양완(楊 。)이 '요행길( 恐行路)이 될까 두렵다'며 동자과를 폐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대종(代宗)에 이르러 3년 만에 다시 개설되었다.예부 시랑 이백옥이 남송 말 아동과를 그만두고 뛰어다니며 유치한 양심을 기르자는 글을 올리면서 동자과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중국인들의 '자자성룡(子成龍)'에 대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한다.거신동을 향한 당인들의 열망은 오늘날 출발선에서 이기는 것으로 바뀌어 어린이들의 유치한 양심을 해치고 있다.
후대에 이해한 과거가 팔주문(八 。文)인 것과 달리 당나라 때 과거시험은 과목이 상당히 번잡했다는 점은 동자과의 설립에서 알 수 있다.《신당서·선거지》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에는 국방략을 시험한 《수재과》, 《대당개원례》의 《개원과》, 《춘추》의 《삼전과》, 《삼사》의 《사과》, 법조문의 《명법과》, 서예의 《명자과》, 수학의 《명산과》가 있었다.진사과는 북송왕이 안석법을 바꾼 뒤에야 유일한 취사 과목이 됐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가?왕중탈은 《수당오대사》에서 당나라 과거에 당고조 무덕 5년에서 당나라에 망할 때까지 진사를 선발한 사람의 수를 집계했는데, 과거 시험이 있는 279년 동안 모두 6762명을 선발했는데, 매회 평균 24명을 과거로 뽑는다.리자오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 "진사(進士)를 모르는 자는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과거시험이 어려운데도 평생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하층사(下層士)들에게 과거는 스스로를 등용문으로 도약시키는 길일 뿐 아니라 가정에 실리를 가져다 주는 길이다.상융량(尙永亮) 우한대 교수가 쓴 책 '시영대당춘(詩英大唐春)'에 따르면 전시에 합격하면 사자(士子) 본인이나 온 가족이 부역 등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오죽하면 만당 시인 이주파가 '장안감회(長安感會)'라는 시에서 "저희가 어느 날이면 온 가족이 이런 일을 할 줄 알았다"고 망연자실한 말투로 말했을까.왕건도 '송설만응거(送雪 应應擧)'
당 현종 때부터 잡문 대신 시부가 진사과 기출문제 3가지 중 하나로 등장하면서 이 같은 변화는 당나라 시가의 번영으로 이어졌다.지금도 《전당시》에서 당나라 사람의 과거시험에 나오는 동제시(同題詩)인 부득( 赋得)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오언육운(五言 六運)이 많다.흐르는 물은 상포에 흐르고, 비바람은 동정을 지나간다.곡예 끝은 아무도 볼 수 없고, 강상 수봉청(江上數靑)이다."시인 첸부터 덕종 정원 12년 동안 성에서 해 본 문제였다.특히 당나라의 과거시험은 정치, 문단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이 시험관에게 인재를 추천하고 명단 결정에도 관여하는 통방(通版)으로 동한에서 시작된 추천제도 그대로 답습했다.응시생들은 평소 자신의 시문을 두루마리 모양으로 만들어 시험 전에 지위 있는 자에게 추천하는 '행권(行 行)'을 많이 썼다.거의 모든 과학고시에 참여한 당나라 시인들은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까지 두루 섭렵했다.이백은 자천서 한형주서와 함께 시작부터 만호후는 평생 봉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형주만은 꼭 알아보고 싶다고 했다.두보는 '봉증위좌승장 이십이운'에서 "장안에 오래 갇혀서 벼슬을 구하는 마음이 아팠다"며 안타까워했다.응시생들은 평소 자신의 시문을 두루마리 모양으로 만들어 시험 전에 지위 있는 자에게 추천하는 '행권(行 行)'을 많이 썼다.거의 모든 과학고시에 참여한 당나라 시인들은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까지 두루 섭렵했다.이백은 자천서 한형주서와 함께 시작부터 두보는 봉증웨이 좌정승장 이십이운에서 장안에 갇혀 여러 해 동안 벼슬을 구하는 자신의 속 쓰린 심정을 애써 털어놓았다.
논밭에서 거주하다
소란과 전란을 멀리하고 전원생활을 하는 것은 당나라 사람들에게 마음의 신앙이었다.그들은 이런 생활을 시로 기록하여 역사에 남겨, 더욱 문화 유전자가 되었다.
백거이는 서주 고풍현 주진마을을 지나며 본 모습을 담은 '주진마을'이라는 악부시가 있다.시에는 "돈이 있으면 장사하지 못하고, 정이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는다.집집마다 촌업을 지키며, 머리가 희끗희끗하다.문밖 출입을 하지 않다. 백성으로 태어나서 촌락의 먼지가 되다.전장에서 어린이를 만나니 반갑다"고 말했다.땅에는 당나라의 일반농가들이 뿌리내리고 번성하고, 번성하고, 전성시대가 되려는 꿈을 담았을 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로움이 배어 있었다.당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대대로 서로 지켜나가게 한 것은 도대체 어떤 토양일까요?당대는 북위, 수 이래의 균전제를 계승하여 토지를 영업전과 구분전으로 나누었다.『통전』에 따르면 당나라 시대에는 18세 이상 남자만 논을 수매할 수 있었으며, 성인 남자 1명이 영업전 20무, 구분전 80무 등 모두 1경의 밭을 얻을 수 있었다.초당과 성당 때는 균전제 덕분에 당인의 삶과 상태가 풍만해졌고, 여류계절에는 물, 남채산 상봉의 안온한 삶이 당시의 정지된 화면처럼 남아 있다.
왕유는 '위천전가'에서 "사양조허락, 가난한 골목에 소와 양이 돌아오다.들로들은 목동을 생각하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형구를 기다린다.꿩 울음소리가 보리싹이 나고 잠잠 뽕잎이 묽다.전부가 호미를 메고 인사를 나누었다.부러움에 허전해하며 실의한 듯 희미하게 읊조린다.석양의 여광이 마을을 비추고, 귀목한 소와 양이 마을 골목에 밀려든다.노인은 방목하러 간 손자를 걱정하며 지팡이를 짚고 사립문 밖에서 돌아오기를 바라보았다.꿩 울음소리 속에서 밀은 이미 이삭을 뽑았고 누에는 곧 실을 토할 것이다.속속 호미를 메고 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일상을 이야기했다.시인이 서글픈 가운데 시경 속 '식미(式微), 식미(式微), 왜 돌아가지 않는가'를 읊조리게 하는 풍경이다.사실 사서에 기록된 당나라 마을은 우리가 다 아는 당시(唐詩) 한 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맹호연의 『과고인장(過故 故人)』이다.푸른 나무 마을은 가락이 잘려 있고, 청산은 곽외사이다.헌가루 포장을 하고 술을 마시며 뽕나무와 삼을 빻다.중양일이 되면 국화꽃을 피운다"고 말했다.특히 당나라의 폭넓은 중외교류 덕분에 당중후반에 이르면 동식물의 수입품이 황실이나 민간포장에 대량으로 나오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서역에서 온 포도와 수선화, 그리고 남쪽에서 온 보리수나무와 연꽃이 포함된다.당나라의 수입품을 전문으로 연구한 서양 한학 명작 사마르칸트의 금도에는 7세기 강국(사마르칸트)이 당나라에 진상한 금도가 언급돼 있는데 이 복숭아 가지를 감나무에 접목한 생산기술은 유종원의 '곽낙타'도 잘 알려져 있다.
시끄러움과 전란을 멀리하고 전원생활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 당나라 사람들의 마음의 신앙인 사영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당나라 사람들은 많은 양의 전원시를 써서 그들의 전원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다.사실 소란스러웠던 2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귀원 전거를 꿈꾸고 있다.전원, 작은 배, 흐르는 물과 농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애착은 우리가 수천 년 농업 전통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전원에는 마음이 스며든 정적이 자리 잡고 있다.이런 뼛속까지 스며든 문화 유전자는 안정된 삶을 향한 동경에서 비롯됐고, 자유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됐다.
문인들에게서 그리움과 갈망은 독서삼림형 '귀원전거(歸園田居)'로 거듭났다.당대의 저명한 산수전원 시인 맹호연은 평생을 책을 읽으며 산림 속에서 살았다.《시영대당춘(詩英大唐春)》에 나오는 맹가(孟家)는 양양성 밖에 있으며, 그 집터를 간남원( 南南園)이라고 한다.시인은 간남원즉사유영상인 이 시에서 폐루는 곽 밖에 있고, 소업은 전원이다.좌우에 숲이 넓고 넓어,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못한다.낚싯대가 북쪽 골짜기를 드리우고 나무꾼은 남헌으로 노래한다.맹호연이 왜 양양을 택했는지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후한서》에 의하면 양양성 밖의 사슴이다.문산은 동한 후기의 유명한 은사인 방덕공의 은거지로, 시인이 '녹문산 회고에 오르다'에 쓴 '옛날 방덕공에 들으니 약초를 캐고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평생 산림을 공부하며 관직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맹호연은 동진 말년 '국화채동울타기, 유유히 남산을 만나다' 도연명과 얼마나 닮았는가.이 풍류와 소탈함은 이백까지 부러워한다.이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황학루는 맹호연의 광릉을 배웅한다.홍안은 왕관을 버리고 흰 머리는 송운에 눕는다.거나하게 취하면 자주 거룩해지지만, 꽃에 취하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높은 산은 어찌 우러러볼 수 있으랴, 빈손으로 맑은 분을 빈다.'열 살 연상의 이 친구를 높이 평가하다.
농업의 풍족함은 당나라 사람들이 동경하는 전원생활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당나라 전성기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당대의 군대 진취와 시천하, 르네상스, 수공업의 번영은 막대한 식량이 국본(國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대 삼백 년의 국운은 농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이 국본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 전기 130여 년 동안 전국에 수리공사를 160여 건에 이르고, 게다가 통로차나 끌채 쟁기 등의 관개·경작 "이기"의 발명과 함께 중원 지역의양곡 생산량이 대폭 증가하다.당 현종이 재위한 천보년 동안 조미(粟美) 한 조목의 연간 납입량만 740여만섬에 달했다.조정에서는 수나라를 낙양에 세운 함가창( 含嘉倉)을 다시 짓고, 장안의 동쪽 곡식을 모두 이곳에 보관했다가 점차 장안의 태창(太倉)으로 옮겼다.천보 8년 동안 전국의 주요 곡창 저장량은 총 1266만 섬으로, 이 중 가창 저장량이 583만 석을 포함하여 명실상부한 '천하제일곡창'이 되었다.
'벼는 기름지고 쌀은 하얗고, 공(公)과 사(私)창고는 풍족했다'는 성당(盛唐) 때의 농업 부(富)는 두보의 '추석'이라는 시에서 알 수 있다.그러나 이후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성쇠에 분수령이 됐다.천보 14재 11월 9일 안록산기병 후 낙양으로 곧장 달려갔던 것은 아마도 제국의 식량의 절반을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사서는 가창을 포함한 양곡당인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당인시대』는 안록산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안사의 난이 8년 동안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농업사회에서는 양식이 생명의 근원이다.사학자들은 흔히 안사의 난이 당 제국의 원기를 소모시켰다고 말하는데, 이런 원기를 실물화하면 그것은 식량이다.
혼가
혼례를 마치라고 재촉하는 화장시를 소리 높여 낭독하는 신랑의 모습이 어쩌면 문 틀어막기의 전신이 아닐까 싶다.대당시의 성대하고, 생활의 고상함은, "시를 재촉하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임천팔대가(林川八大家)의 한 사람인 양즈젠(楊志堅)은 시로 '송처'를 짓고 결혼을 마무리한다."평생 지업은 거문고에 있었고, 머리에는 지금 두 가지가 있다.어부는 계곡이 어둡다는 것을 알고, 산처는 출신을 믿지 않았다.형녀가 제멋대로 머리를 쓸어올리고, 명경은 그에게서 눈썹을 그리지 마라.오늘은 하산할 때 함께 가는 손님"이라고 말했다.책 읽기에 푹 빠져 성인이 됐을 때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가난할 때는 공명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이불충'으로 휴서를 요구했던 아내가 옛정을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거취가 결정되면 두 사람은 앞으로 남남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이혼 소송의 결말은 당시 자사의 안진경이 이 여자가 가난하고 부자를 좋아하고 "마을을 모욕하고 풍속을 해쳤다"며 개가를 허락했지만 20대 판에 처해졌다는 것이다.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결혼과 여성에 대한 당대의 개방적 태도는 이 대목에서 드러났지만, 개방은 중국 역사에서 잠시 주춤하는 데 그쳤고, 당 이후에는 절부열녀(節夫熱女)의 관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인들은 예절에서 '예기' 44편인 '혼의'를 따랐다.'혼의'라는 이름은 저녁 해질 무렵 결혼식을 올렸던 옛사람들이 '혼'이라는 글자에서 유래한 것이다.하지만 아직도 남쪽 지방에서만 '혼의' 전통이 이어져 대다수 북쪽 사람들은 정오에 피로연을 한다.이처럼 밤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말이 아니라 한인의 결혼 풍습의 정통이다.
결혼 당일 관신이 있는 집에서는 신랑은 아버지 품위 있는 관복을, 백성들은 결혼하면 신랑에게 진색공복, 즉 9품 관리의 암적색 관복을 빌려 입힐 수 있다.후세에 신랑을 '신랑관(新郞官)'이라 부른 것은 신랑이 성혼일에 관복을 빌려 입을 수 있게 한 데서 유래했다.신부의 예복도 격식을 갖추었는데, 그중에서도 서민가의 신부는 청색 소매인 연상을 입었다.당나라 때 혼례, 남홍 여녹색,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남홍여록(男紅女 绿)'과도 관련이 있어야 한다.
친정 행렬이 신부의 집에 도착하면 당나라 친정들도 신랑에게 '화장촉구'라고 부르며 신랑이나 들러리는 신랑이나 신랑 들러리가 큰 소리로 화장시 낭독, 승차 재촉, 신랑집에 가서 결혼하는 것이 오늘날 '문막기' 풍습의 전신일지 모른다.《전당시》에는 중당시인 육창신이 들러리로 나서 당순종의 딸 운안공주가 시집갈 때 읊은 《촉매백자장( 催 百百子子), 장애칠향차( 七障七香車)》와 같은 수많은 화장시들이 수록되어 있다.동녘 하늘이 밝아온다'는 글을 남겼다. 시는 화려하지만 시가는 흥성하고 생활은 아름다워 보인다.'전당시'에는 "예전에는 옥경유람에 놀러갔는데 제1선인 허상두(許相頭)가 있었다.다행히 오늘 진진회를 위해 난새와 봉황의 혼수를 미리 가르쳐 드렸다"고 전했다.노비라는 진사가 신하인 이나라를 향해 빙빙 돌다가 마침 이나라 날고 있는 딸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후자는 흠모하게 되었고, 노자는 조중 대신의 사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 급제하게 되었다.이른바 '동방화촉야(洞房花 夜夜, 金榜)'다.
당대의 '육례'에서 납정은 '예물보내기'로 이어졌다.당나라 사람의 '납정'도 오늘날처럼 천하의 예물을 요구하는 악습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이스족이 딸을 시집보내는 일이 매우 심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태종 이세민(世宗)은 특히 그 사대부들을 업신여김으로써 "딸에게 시집갈 때마다 돈을 더 많이 받아내고 더 많이 벌어서 장사를 한다"고 하여 장사꾼들의 비위를 거슬렀다.고종 이치(高宗)은 사족(士族)의 시혼인 광소(廣索)가 재산을 모셔오는 관습을 억제하기 위해 사족예(士族禮)의 한도를 강제로 정하도록 조서를 내려야만 했다.
결혼 생활 풍습은 당대에도 마찬가지였다.당나라 필기소설 '유양잡도'에는 갑의 결혼식에서 을, 병 두 사람이 연합해 갑을 농락하고 한 궤짝에 집어 넣어 죄수를 감금한다고 웃긴 '굴방 난동'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기록돼 있다.을, 병 두 사람은 지방 사찰에 장작을 3년 동안 찍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하는 귀신의 형벌을 받았다.
문벌사족 역시 당대의 결혼 적폐에 한몫을 했다.동한에서 발원한 문벌사족들은 당후기까지 전통을 고수하던 가문의 풍교를 결혼에 있어 스스로 고귀함을 자랑하고, 자신과 같은 현세의 망족과 결혼하는 것은 물론, 황족까지도 하찮게 여겼다.성인이 된 해 당 문종은 헌종의 두 딸에게 각각 한 명씩 사족을 찾아 시집을 보내려 했으나, 후자가 이를 미루자 "민간에서 하는 결혼은 관직을 따지지 않고 벌집에 나가 본다.우리 집 200년 천자가 최, 루야를 못 봐?"당 이후 800년간 이어져 온 문벌사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문당호대(門黨戶對家)의 결혼관념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가문의 관념이 당나라 각계각층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 문인들이 이 관념들을 시문에 표현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상영량의 입장에서 본 당나라의 벼슬길은 결혼에 의한 치맛바람, 즉 '한 사람이 득도하고, 닭과 개가 승천하는 풍조에 있었다.이 점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서상기(西相記)'에 나타나 있다.
《서상기》의 전신은 당나라 원진의 진이 지은 전설적인 소설 《앵앵앵전》인데,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장생은 원진의 화신이라고 한다.그가 발처를 버리고 태자 소보(少保) 위하경의 딸 위총(威丛)을 아내로 택한 것은 위씨 가족이 원진에게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당시 '성남 웨이두, 천척오(天尺五)'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원진(元稹)이 《몽유춘칠십운(夢遊春七十韵)》에 쓴 '고송녀 뤄푸(高松女羅 附)'는 마치 덩굴처럼 웨이씨네의 다카마쓰를 올랐다는 뜻이다."갑제가 등청지( 鸣淸池), 명추( 鸣驺)가 주로(朱辂)를 이끈다.광사춤은 유유( 长筵)이고, 장연(長 杂)은 잡채"라고 썼다.세력이 이와 같으니, 원정진도 당연하다.꾀꼬리를 버리고 위문을 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