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대 형상
이미지가 이러한 숭고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서양의 합리주의 전통은 담론 혹은 언어를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실상 이미지를 철저하게 억압해왔다고 리오타르는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초기 저서 《담론, 형상》(Discours, Figure, 1971)에서 언어를 나타내는 담론과 이미지를 나타내는 형상을 구분하고 서로 대립시킨다. 이 저작은 리오타르 자신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난삽하고 난해한 특성 때문에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저작에 나타난 담론(언어)과 형상(이미지)의 이분법은 서양의 정신사를 새롭게 보는 틀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리오타르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서 리오타르는 궁극적으로 담론과 형상을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철저하게 구분하고 지금까지의 역사가 형상을 억압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곧 담론의 우위에서 벗어나 형상(이미지)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리오타르는 우선 담론의 기초가 되는 언어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한계를 밝히고 형상의 세계를 복원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여기서 리오타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언어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관련이 있다.
소쉬르 언어학의 특징은 언어를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실재 세계와 관계없는 자족적인 영역으로 자립화했다는 것이라고 집약적으로 말할 수 있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이때 기표란 말, 불, 자동차 등과 같은 소리 기호이다. 한편 기의란 이러한 기표가 나타내는 개념 혹은 뜻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쉬르 언어학의 특이성은 이러한 기표나 기의가 세상에 있는 실재 대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데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를 두 가지 차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우선 ‘말’이라는 기표는 실재하는 말이라는 대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살, 불, 물 등의 다른 기표들과 음운적으로 변별적인 차이를 두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또한 기표가 나타내는 개념인 기의의 경우에도 그것은 실재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분류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령 파란색을 지칭하는 단어가 하나밖에 없는 언어 체계에서 남색, 코발트 블루, 청색, 군청색 등은 모두 그냥 파란색일 뿐이다. 남색이라는 기표의 기의는 파란색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청색, 코발트색, 자주색 등과의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우리가 만들어낸 언어의 세계라는 것이 소쉬르의 언어학적 결론이다. 코발트색이라는 언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코발트색에 대한 경험이 없을 것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러한 소쉬르의 언어학은 세계를 언어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언어가 사실상 감각의 세계를 추방함으로써 세계를 추상화하고 투명하게 만들어버린다고 비판한다. 그는 “담론의 의미화가 모든 감각을 다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령 나무가 푸르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푸른색 자체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담론은 푸른 나무를 보고 푸르다고 말하며, 그에 반하는 ‘푸른 나무는 붉다’는 명제를 비진리로 배격한다.
하지만 푸름이라는 단어 자체 혹은 그에 대한 어떠한 담론도 정작 푸름 자체를 재현하거나 지시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푸름에 대한 경험은 언어적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또 다른 경험이다. 인간은 언어적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다른 방식의 경험이란 형상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는 방식을 말한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언어 혹은 담론은 세계의 표피만을 드러낼 뿐 정작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우리의 세계 자체를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못한다.
이에 반해서 형상은 언어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출현한다. 푸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때 푸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미지가 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보기에 형상은 언어로 드러나지 않는 표면의 배후에 있는 깊숙한 영역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이미지란 언어처럼 투명하지 않고 뭐라고 단언하여 규정할 수 없는 불투명한 심연의 세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미지란 언어와 달리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파편성은 이미지가 비체계적이거나 무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자체가 재현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파편성은 무능함이 아니라 진리라는 파편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는 진리 자체의 역능(puissance)적 표현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형상, 즉 이미지를 억압하고 담론을 숭상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면 이는 곧 거짓의 진리를 숭배해온 것과 다르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담론 대 형상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