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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語)는 언(言)이라는 즉 이야기라는 형태로 나(吾)를 표시하는 거예요. 타인에 대해서 내가 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語라고 해요. 그냥 그런 것 없이 떠들면 言이에요. 자기의 입장을 타인을 향해서 밝히고 있는 개념의 한자가 바로 語예요.
그래서 논어는 풀이하면 그래요.
“서로 다른 존재들의 차이를 찾고 그 차이를 화해시켜 공존시켜 나가는 것에 관한 나의 이야기!”
이게 論語예요.
그때 나의 주인공은 그 노래 안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공자라고 봐야겠죠. 그러면 논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도 느껴지는 선입견이 있어요.
아! 이건 체계적으로 썼겠다! 그냥 문장을 우르르 늘어놓은 게 아니라 1장부터 저 끝장까지 논리 정연하게 전개했겠구나! 단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까 논리성이 그때그때 확인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굉장히 논리적 정합을 갖추어서 풀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논어가 공존과 관련돼 있는 그런 뜻을 가진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공존을 해야 되는 이유가 뭐였을까요? 공존을 안 하니까 살기가 힘든 거예요. 내일의 내 생명도 보장받을 수가 없는 거죠. 내일의 내 밥도 보장받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공존이라는 것이 사실은 생존 자체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공존을 위한 첫 걸음
그래서 공존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게 무얼까? 생각을 한번 해본 거예요. 너무 불편하고 불안하고 그리고 지속 가능할지 안 할지가 확인이 안 되는 존재예요. 제일 먼저 시작되는 게 배움입니다. 배움은 배우고 싶은 본능 때문에 배우는 것도 아니고, 배우고 싶은 본능보다 배우기 싫은 본능을 가진 분들이 더 많아요.
농담이지만 여기 있는 분들은 지극히 예외적인 분야에 이 나이가 되어서도 배우고 싶은 본능이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사실은 그 본능은 자신이 불안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죠. 내가 안 배우고도 얼마든지 내 안에 있는 잠재성으로서 그게 발현되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이 확실하고 확신할 수 있었다면 굳이 배울 이유가 없죠.
문제는 배움의 시작이 나의 불안정성,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불안정성을 느낄 때 지금보다는 훨씬 강하게 느낄 때 그걸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일 먼저 택했던 것이 보고 베끼는 거예요. 보는 거죠. 보는데 본다는 것, 일단 보고 그걸 보기만 하면 안 되잖아요. 익히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지만 불안하니까 일단 배워보는 거예요.
배우는데 안 익힐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상황 상황에 따라서 익히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얼마만큼 배워야 되느냐? 내가 상황에 따라서 탁 튀어나올 때까지 배워야 되느냐! 그래서 반복도 하고 명심할 정도로 배우죠. 배우고 나서 내 불안감을 조금씩 조금씩 해소해 가는 거죠.
그 방법을 처음 생각한 게, 앞에 사람은 어떻게 했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지? 이 두 가지겠죠. 그래서 “앞에 사람이 어떻게 했지” 하는 배움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지”와 만나는 거죠.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의 영역도 확장을 하고 자신의 삶의 부족함과 불안성을 해소해 나가는 거죠.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
(논어) 처음에 나오잖아요. 첫 구절이, “배우고 시(時) 즉 그 상황에 맞추어서 익힌다면 기쁘지 않은가!” 라고 했는데, 기쁘다는 뭐고 즐겁다는 뭐예요? 기쁘다! 즐겁다! 우리는 자주 쓰고 있지만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요. 우리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언어를 자꾸 쓰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속이 허상으로 차요.
예를 들어 어떨 때 보면 감사하다 그러는데 감사가 그림이 안 그려져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감사는 거짓일 가능성도 많아요. 그리고 자기의 체면 유지를 위한 의례적인 발언일 가능성도 많아요.
그럼 기쁘다고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기쁘다(悅)의 뜻이 앞에 마음(忄)은 나중에 붙은 거예요. 나중에 논어 원문에서는 말씀 언(言)이 붙어 열(說)이 되었지만 원래 마음 심이 붙죠. 이 마음도 나중에 붙은 거고, 뒤에 있는 것(兌)만 보면 돼요.
‘기쁘다’는 ‘兌’ 자의 위에 있는 건 그냥 화살표예요. 그 다음 밑에는 사람(人)이 하나 있어요. 사람 중에 무언가 강조되고 있어요. 뭐만 강조하느냐? 입만 강조한 거예요. 입이 쩍 벌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쁘다는 것의 그림은 무언가를 얻거나 깨달았거나 획득해서 그냥 입이 쫙 찢어지는 것! 이게 번역이고 그래야 돼요.
외우는 거는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뭔가에 따라서 그림의 종류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외우고 그때 나에게 주어진 상황 상황에 따라서 그것을 풀어낸다면 적용해 내서 내 불안감이 해소된 거죠. 그러면 입이 쫙 벌어지겠죠. 그걸 ‘기쁘다’라고 하잖아요.
여러분 다 그렇죠. 무언가 얻고 뿌듯하고, 환한 새로운 것을 보거나 또 다른 어떤 것에서도 우리가 기쁘다고 할 수 있을 때, 그때 표정은 입이 쫙 벌어집니다.
위에 있는 이 (화살표) 글자는 방향이에요. 입이 벌어지고 있는 방향이에요. (가운데) 이게 입이에요. 밑에 있는 건 사람이에요. 사람 중에서 입만 강조한 것이고 입의 방향성이에요. 화살표는 제가 그린 겁니다. 옛날에 있지 않았고 그리고 입이 쫙 이렇게 벌어지는 거죠.
그게 기쁜 거죠. 기쁜데 입도 안 벌어져요. 그건 뭐죠? 거짓인 거죠. 참을 수 있는 기쁨은 거짓입니다.
참을 수 있는 감정은 거짓입니다. 정말 기쁘면 사람이 사람의 껍질을 갖고 태어난 이상 기쁘면 입이 벌어지게 돼 있어요. 찢어지게 돼 있어요. 지금도 그렇게 입이 찢어지는 거 많아요. 소소한 것도 있죠. 문제는 무얼 얻고 입이 찢어지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달라지죠. 그게 개성이죠.
원래 개성이라는 게 뭐죠? 개별적인 성격이잖아요. 인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우리 개성은 뜻이 달라요. 개성은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 공존의 배려를 하는 방식의 차이예요. 누구와 공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른 거예요. 그러나 그 출발점은 공존이고 배려예요.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는 나만의 특징은 개성이 아니라 폭력이죠.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나만의 방식 그게 개성이어요.
어떤 옷을 특이하게 입고 생각을 특이하게 하고 욕도 특이하게 하고, 이러는 게 개성이 아니어요. 그렇게 개성(個性)이라고 쓸 때, 성(性) 자에서 그 말의 뜻이 결정될 수밖에 없어요. 개별적이라는 거예요. 영어로 인디비주얼(individual)이니까 뒤에 나오는 성을 캐릭터로 변해가면 안 된다는 거죠. 성과 캐릭터는 달라요.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 삶의 영역을 늘려가면
아무튼 이 얘기는 오늘 하지 않고요. 이제 방법이 나오는 거예요. 시간적으로 흘러간 것을, 배우는 것은 흘러간 것 외에는 못 배워요. 미래의 것을 배울 수는 없어요. 추측은 배우는 게 아니죠. 1초 전에 지나갔더라도 지나간 거예요.
그래서 무언가 다른 사람 하는 것을 따라하는 것, 배운다는 건 따라하는 것이죠. 아까 제가 객담이라고 했는데 한국에 왜 꼰대들이 많은 줄 아세요? 어떤 분들은 꼰대 어원을 일제시대 때 들어온 프랑스의 백작 계급인 comte(콩트)로 드는데, 그거는 어느 여행 전문가가 붙이고 나서 진짜처럼 됐어요. 그건 전혀 근거 없는 말이고요.
그러면 일제시대 이전에 쓰인 꼰대는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리고 그게 꼰대가 일본 말에서 왔다면 오늘날 일본 말에 남아 있어야겠죠. 일본 말에는 꼰대라는 것에 해당되는 단어는 오야지 밖에 없어요. 꼰대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느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진 그런 분이 어딘가 인터뷰를 하면서, 일제시대 때 백작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던 짓거리를 꼰대 짓을 한다! 그래서 그와 유사한 걸 꼰대라고 한다는 것인데, 이건 전혀 상관없고요.
꼰대는 한자에서 온 것입니다. 쿤밍(昆明)할 때 곤(昆) 자 있죠? 맏이 昆 자예요. 대장이라는 뜻이죠. 중국에서 첫째 아들을 지금도 뭐라 그러죠? 라오따(老大)라고 그러죠. 둘째를 라오얼(老二)이라 하고요. 라오따처럼 옛날에 그 집안의 가장을 쿤따(昆大)라고 그래요. 쿤따가 우리 발음으로 ‘곤대’죠. 조금 경화되면 꼰대이죠. 근데 이상하게 프랑스 어원설이 너무 널리 퍼져 있어요. 이게 정설처럼 돼 있어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예요. 어느 여행 가이드가 처음 한 말이어요.
그래서 이런 짓 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맏이 노릇한다는 거예요. 중국에 가서 보면, 모든 맏이를 지금은 노대(老大)라 그러죠. 곤대(昆大)라 안 그러고 노대(老大)라 그러죠. 라오따라 그러죠. 라오따가 되잖아요. 바로 꼰대 근성이 나와요. 말을 해도 말투부터 달라져요.
아무튼 꼰대처럼 되지 않고 사람이 자기가 안전하게 되려면 시간적으로 자기 삶을 더 늘리는 수밖에 없어요. 과거를 더 많이 알고, 용례를 더 많이 알고, 그래서 자기 삶의 시간적 영역을 늘릴 수밖에 없어요.
“이 삶의 시간적 영역을 늘릴 수 있다면!” 이것은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논어에서는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서 풀어내고 해결할 수 있다면 입이 벌어질까 벌어지지 않을까 했는데요.
조금 그림 없는 식으로 표현을 하면은 “나의 삶을 시간적 영역에서 확장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 아닐까!” 왜냐하면 위험성이 그만큼 해결됐기 때문에! 부딪힐 충돌의 가능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늘었어요. 조금 더 평화로워졌고 조금 더 안전해졌어요. 기쁘죠!
벗이 찾아온다면
그 다음에 먼 곳에서부터 친구가 찾아온다는 건 뭐죠? 친구라는 게 이렇게 벗 붕(朋) 자를 쓰잖아요. 벗 朋 자의 뜻이 이렇죠. (그림)처럼 한 줄에 꾸러미가 주렁주렁 똑같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呼朋約友호붕약우 - 동무에서 벗으로! / 2022 박현 선생님 고언어전시 작품)
이게 벗 朋이 돼요. 이 朋은 달 월(月)이 두 개가 있거나, 고기 육(肉) 두 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꾸러미가 하나에 같이 달려 있는 것에서 朋이 됩니다. 우리가 오늘날 달 월(月)이다 해서 최초의 모습도 그랬겠 지가 아니라, 이 달 월(月)이라고 하는 것은 부수화가 되면서, 즉 한자의 부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이런 다양성들의 상형적 내용들이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부호화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부호화된 걸 갖고, 이걸 이렇게 몸이 두 개야! 그래서 형제 같은 사이야! 또 일심동체 같은 사이야!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원래 글자에서는 이제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감 달려 있듯이 뭐 달려 있듯이, 같이 한 운명에 한 삶에 달려 있는 존재 혹은 그걸 서로 인지하는 것이 벗 朋이어요.
우리 말로 벗이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벗이기보다는 동무라고 하는 게 맞아요. 동무라는 말이 같을 동(同)에 힘쓸 무(務)를 쓰는 게 아니고 순 우리 말이어요. 순 우리 말이고 그 말에서 ‘ㅇ’가 사라지면, ‘ㅇ’ 발음이 잘 안 되는 지역에서 사라지면 ‘도모’가 되겠죠.
아무튼 동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에요. 보통은 그래서 벗이 있어요. 벗이 멀리서 찾아와요. 가까이에서 올 수도 있겠죠. 찾아와요. 찾아오면 뭘 하죠? 지금도 과거 청동기부터 내려오는 문화를 유지시키고 있는 민족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손님들에게 제일 먼저 해주는 게 뭐죠?
두 가지가 있어요. 술 권하는 것과 노래 불러주는 거예요. 만약에 연주를 할 수 있다면 연주까지 같이 하면서 맞이하죠. 멀리서 동무가 찾아온다면 즐거울 락(樂) 하지 않을까!
즐겁다(樂)는 것의 이미지
樂은 해석은 다양한데요. 이렇게 아래 (그림)처럼 돼 있죠. 나중에 여기 (가운데)에 흰 白(백)자가 들어갑니다. 이 白 자는 처음에 없었고요(그래서 x 표시). 그러면 이거는 입을 벌리고 있는 걸 말해요. 이거는 나무에 잎이 무성하게 따라 피기도 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음악으로 할 때 현악기를 상형화 한 거예요.
앞에 현악기를 연주해요. 가장 원시적인 악기는 타악기 아니면 현악기일 텐데요. 타악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과 현악기를 갖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동작이 춤이어요. 그게 관악기까지 오게 되면 춤으로는 잘 안 맞아요. 물론 현대에 오면 다 가능하지만요.
아무튼 멀리서 사람이 찾아오면 노래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 이게 즐거움의 그림이에요. 멀리서 찾아오니까 좋아서 막 노래 부르고 하잖아요.
엄밀하게 말하면 찾아와서 벗이 된 건지, 벗이어서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어요. 아무튼 새 친구도 있고 오래된 친구도 있으니까, 친구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내 삶이 확장될 수 있는 기회여요. 다른 데 얘기를 남들의 얘기를 듣고 배울 수가 있잖아요. 당연히 배우게 되죠. 그래서 가장 즐거운 것 중에 하나예요.
즐겁게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면서 맞이해요. 기분 풀려고 술도 한잔 내놓아요. 나중에 차가 생기면 차를 내놓죠. 그래서 저녁에 막 이야기를 해요. 밤새는 줄 모르고, 닭이 회를 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죠. 그 이야기는 여러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도 있겠지만 그런 것마저도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의 이야기는 달라요.
내 삶이 공간적으로 누군가를 더 이해할 수 있는 확장 가능한 삶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논어의 첫 번째 구절과 두 번째 구절은,
“내 삶이 시간적으로 확장되고 공간적으로 확장돼서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공존시킬 수 있으며, 그 공존으로 말미암아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입 벌어지게) 기쁜 일이고 (악기를 연주할 만큼)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왜?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완전해서 아팠기 때문에!
인류는 그 어떤 걸로도 공동체가 될 수 없어요. 사람마다 상황이 다 달라요.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어요. 인류는 아픔으로 공동체, 불완전함으로 공동체였어요. 서로 공존하려고 보니까 공존이 안 되어 아프고, 공존 속에 못 들어가고 내 자리가 없어서 아프고! 내 자신이 그렇게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라서, 삶과 죽음 넘어서서 삶의 영역에서 보더라도 너무 고독하고 외롭고 아프고 서럽고! 그런 면에서 그 모든 것을 아픔이라고 했을 때 인간은 아픔으로 공동체예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정 가능한 논(論)이 돼야 되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그래요. 오늘날의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 무슨 무슨 민주주의라고 하는데요. 공존의 식으로 말하자면 한 명의 왕이 모두가 왕인 시대로 바뀐 것뿐이어요.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떤 이론을 갖다 놓아도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냥 허울이어요. 그래서 공존이 안 되잖아요.
민주주의에서 누군가는 남아서 버려요. 누구는 모자라서 굶어요. 누구는 없어서 울어요. 누구는 남아서 처치 곤란으로 괴로워해요. 그러나 그 모든 인간들이 아픔으로 공동체이어요. 그 공동체이지만 그 공동체는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같은 처지다가 아니라, 결국은 공존 가능한 영역을 찾아야만 된다는 거예요. 공존 가능한 영역을 찾아 가는 거예요. 자기가 약하니까 배운 거예요. 자기가 완전한데 왜 배워요?
하느님께서 날마다 배우신다는 말이 있나요? 배워야 되는 것은 모자라기 때문에, 어찌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에, 배워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공존을 위한 방법 찾기로 하는 거예요. “그것은 시간적으로 내 삶을 확장시키고, 공간적으로 확장시켰을 때 해결된다”고 공자는 이야기합니다. 그게 선언입니다.
내 삶의 영역을 시간적으로 확장시켜라! 내 삶의 영역을 공간적으로도 확장시켜라! 그것이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나의 삶의 모습이고, 그 모습을 통해서 인류가 아프지 않고 아픔의 공동체를 건널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다.
따라서 외부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간에 그건 내 삶의 중요한 영역이 아니다. 내가 그걸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하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라! 그 또한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온(溫)자를 갖고 한번 풀어볼 게요. 온 앞에 있는 게 물(水)이에요. 글자는 이렇게 돼 있어요. 우측 위는 날 일(日)로 쓰기도 하죠. 원래 글자는 (그림처럼) 이래요. 이걸 원래대로 풀면 어떻게 되느냐? 밑에 있는 것은 그릇(皿)이에요. 그릇을 상형하다가 이렇게 바뀐 거예요. 그릇 명(皿)자가 이렇게 들어온 거죠.
그 안에 있는 물결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있어요. 근데 거기에 물이 있어요. 물론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 안에 물이 있는데 이게 데워지는 거예요. 바깥의 환경으로부터 무언가 데워지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죠.
옛날 그릇에 물을 담아서, 그 안에 뭔가 있겠죠. 밖에 내놓았어요. 볕을 받아서 데워지는 거죠. 즉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죠. 내부적 조건에 의해서 변하는 게 아니라,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뭔가 이렇게 데워져요. 그걸 溫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불온(不溫)이니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내가 변화하지 않는다!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해서, 그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내가 변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시간적으로 스스로 얼마나 확장해 내는가, 공간적으로 얼마나 내 삶을 확장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외부에서 이건 아니라고 하고 뭐라고 해서 화난다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 칭찬을 해도 벌게져요. 달아올라요. 욕해도 달아올라요. 사람의 슬픈 감정, 노한 감정, 다른 감정까지도 외부적 조건이 주어졌을 때 체온에 변화가 와요. 그래서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내가 흔들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의 확장의 정도와 확장의 모습이다! 그 과정이다! 그게 지속되고 있다면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내가 스스로 달아오르고, 좋아라 날뛰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다!
溫이라는 게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이렇게 물이 달아오르는 거죠. 그래서 이것(물)이 옮겨와서 이게(水)되고, 밑에 그릇(皿)이 되고 위에 담겨 있는 뭔가 물질로 이게(囚) 됩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溫 자의 위에 있는 것을 가둬져 있는 죄수라고 풀기도 해요. 죄수에게 밥과 물 주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게 아니어요. 그러니까 여기 갇혀진 죄수, 즉 죄인 수(囚)자죠. 죄수에게 밥도 주고 이렇게 물도 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건 아니어요. 그런 용례가 없으니까요.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아무튼 첫 구절은 그래요.
“배움과 만남은 너 자신의 문제이고, 인생에서 가장 먼저 자기 삶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만남을 하지 않고, 배움을 하지 않고는 늘어나지 않는다”에 대한 하나의 매니페스토(manifest)예요.
선언이 먼저 시작돼요. 그것이 너의 본 모습이고, 오늘 내가 하고자 하는 이 뒤의 모든 이야기에 기초라는 이야기예요.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너의 삶을 시간적으로 확장하라! 너의 삶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라! 그것은 너의 문제이며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공존의 방법을 찾아라! 아픔의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애써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도 없고, 삶도 없고, 우리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도 없다. 인간이라는 집단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여러 인류가 진화 과정에 있었는데)그들 과정에서도 배우는 게 없고 시간적으로 배우지 않고 공간적으로 안 배웠으면 진화가 없었을 거예요. 진화는 단순한 육체적 필요에 의해서만 생기지는 않아요. 그건 현대 동물학자들도 생물학자도 많이 다가가고 있는 거고요. 필요가 아니라 배움에 의해서 진화한다는 것, 모든 동물은 반복과 배움, 그게 더 중요하지 그 배움과 반복을 거듭하게 한 원인 조건이 진화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없었을 때 진화가 안 된 케이스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를 하게 되죠. 사람 노릇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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