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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등정기
대묘참관(岱廟參觀)
아침을 먹고 나니 차는 오늘도 여덟 시에 출발한다. 짐을 들고 호텔을 나서는데 문 좌우의 꾸밈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른쪽 벽면에는 윤기 나는 까만색 돌판 위에 수백 개의 황금색 벽돌 문양들을 촘촘하게 붙여 놓았다. 중국 역사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벽돌의 문양들이다. 프런트 아가씨들의 등 뒤에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높이의 벽도 유리알처럼 윤기가 나는 까만 돌이다. 그 위에 금색의 초서 달필로 성당(盛唐)의 시인인 두보(杜甫, 712~770)의 <망악(望嶽)>을 새겨 놓았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고 웅장하다. 다시 한 번 한자의 예술성과 중국의 심오하고 광막한 문화 전통에 감탄한다. 오늘 내가 오를 태산을 두보도 스물아홉 살에 바라보고 또 올랐다. 시성(詩聖), 시사(詩史)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 한 편이 억만금에 값하는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되어서 해동의 나그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동악(東嶽)을 바라보며 望嶽
태산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岱宗夫如何
제나라 노나라에 푸른 기운 끝이 없어라. 齊魯靑未了
신령하고 빼어난 자연의 기운 모아 이루어졌으니, 造化鍾神秀
산은 앞뒤로 아침저녁을 갈라놓네. 陰陽割昏曉
뭉게뭉게 층층이 이는 구름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蕩胸生層雲
눈을 부릅뜨니 새들이 날아든다. 決眦入歸鳥
절정에 꼭 올라서, 會當凌絶頂
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눈에 굽어보리라. 一覽衆山小
차창 밖 경치가 부옇게 낀 안개에 묻혀 있다. 공기 중의 미세먼지가 아침 안개와 섞여서 스모그처럼 시야를 가린다. 태안(泰安) 시청도 희미하고 그 뒤의 태산 줄기도 실루엣만 드러낸다.
버스가 선 곳은 벽돌로 쌓은 높은 성문 앞이었다. 정양문(正陽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 위의 누각에 대묘(岱廟)라는 웅장하고 힘찬 황금색 글씨의 예서체 편액이 붙어 있다. 산악을 뜻하는 대(岱) 중에 마루가 되는 산악이 태산(泰山)이다. 그래서 태산을 중국 오악 중에서 홀로 존귀하다는 뜻으로, 사람들은 태산을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 부른다. 대묘는 곧 태산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고 태산에 올라 하늘에 봉제(封祭)를 올리고,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의 신에게 선제(禪祭)를 지냈다.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旅祭)를 지냈다. 공자께서 염유(冉有)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느냐?” 염유가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 슬프도다! 일찍이 태산의 하느님이 임방(林放)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논어>> <팔일>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5년 전에 김용옥 교수가 번역한 방대한 분량의 <<논어>>를 밑줄 치며 흥미롭게 읽었다. 이 대목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분이 두터운 박 선생님의 자료 번역 요청을 받았다. 정규욱(鄭奎煜)이 1890년에 쓴 내연산 산신당인 백계당 숭봉계의 취지문이었다. 이 글에서 ‘然先聖曰泰山不如林放乎(연선성왈태산불여임방호-그러나 공자님이 말씀하시었다. 태산이 임방만 못하겠는가)’라는 글귀가 나오지 않는가! 우리겨레에게도 공자님은 성인이었고 <<논어>>는 제일의 고전이었다. 보내온 다른 분의 기존 번역문은 이 구절을 오역하고 있었다.
서세동점, 식민지배, 전쟁과 분단이라는 20세기 우리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전통은 단절되고, 공자는 푸대접을 받으며, 한문 고전은 케케묵은 책으로 치부된 결과일 것이다. 한글 전용 어문 교육정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까막눈이 되고 존재의 뿌리인 전통문화와 한문문명권에서 소외되었던가!
오늘 아침에 태산신의 사당에 발걸음이 이렇게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 공자님 시대 이전부터 태산은 중국인의 자궁과도 같은 시원의 산이다. 역대 천자의 정통성은 모두 태산신에게서 나왔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시절,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은 국권의 회복을 당부하고 구월산 단군사당에서 자결하였다. 우리나라도 통일이 되어 백두산에 단군사당을 짓고 개천절에 대통령이 참배하면 좋겠다.
이층의 누각 지붕 아래에 용과 구름, 학 등이 새겨진 패방의 네 기둥 밑에는 돌사자가 있다. 정양문 안으로 들어가자 너른 마당에는 귀하다는 백송(白松)이 신도(神道) 좌우로 심어져 있다. 그 바깥으로는 늙은 측백나무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너른 뜰 곳곳에 서 있다. 전체가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처럼 되어 있다. 오른쪽 담장 아래로 가니 크고 작은 비석들이 곳곳에 서 있다. 그 중에는 귀부의 높이만 2미터가 되는 거대한 것도 있다. 황제가 봉선의식을 행하며 기념으로 세운 비석일 것이다. ‘登泰觀海(등태관해-태산에 올라 바다를 본다.)’, ‘簣爲山(궤위산-한 소쿠리의 흙을 모으는 것으로 시작하여 태산을 이룬다.)’이 있고, ‘第一山(제일산)’의 ‘第一’ 두 자는 미법산수화법을 창안한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巿)이 쓴 것인데, 이 두 글자는 이번 여행에서 여러 번 보았다. 7년 전에 갔던 아미산 만년사에도 있었다.
동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수령이 이천 년은 된다는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다. 푸른 잎이 나 있지만 둥치는 몇 아름이 넘고 껍질이 벗겨지고 속은 파였지만 기나긴 세월 동안 풍상을 견디어 온 나무는 고풍스러워서 성자를 닮았다. 돌난간을 두르고 국가에서도 나무를 국가의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 앞에는 유해율(劉海栗)이 쓴 ‘漢柏(한백-한나라 측백나무)’이라고 쓴 큰 비석이 서 있고, 옆에는 웅필의 ‘觀海(관해-태산에 올라 바다를 본다.)’, ‘漢柏凌寒(한백능한-한백은 추위를 이긴다.)’이라고 쓴 비석, 나무를 그림으로 새긴 비석까지 서 있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마천도 이 나무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한백 북쪽의 동어좌(東御座)라고 쓰인 편액이 걸린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건물이 있고 뜰이 나온다. 그런데 뜰에 벽돌로 사방을 보호하고 유리판을 비면에 붙여 놓은 현존 중국 최고의 비석이 있다. 진시황이 태산에 올라 봉선을 할 때 수행했던 재상, 이사(李斯)가 쓴 비의 비편이다. 문자 통일 이후에 쓴 소전체(小篆體) 글씨이다. 이 소전체는 이사 자신이 만든 것이며, 비석은 태산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2,200년 전, 고조선 시대의 비석을 오늘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판독되는 글자가 모두 10자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는 3번이나 나오는 ‘臣(신)’자 밖에 없다.
초나라에서 자라고 제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으로 가서 순자(荀子)에게 법가사상을 배운 냉혹한 현실주의자가 이사이다. 진나라에 가서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었다가 재상이 되어 6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책사로서 분서갱유와 문자통일을 주도한 인물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 28년에 노나라의 유생들과 상의하여 진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새기고, 봉선과 산천에 대한 망제의 일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태산에 올라서 비석을 세우고, 토단을 쌓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중 비바람을 만나서 나무 아래서 잠시 피하였다. 이 일로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로 봉하였다. 이어서 양보산에 올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워 글을 새겼다.
이사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뜰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꽃이 한겨울 찬 날씨에 꽃망울을 한창 터트리고 있다. 언뜻 보면 영락없는 개나리꽃이다. 가까이로 다가서니 향긋하고 진한 냄새가 코끝에 묻어왔다. 여행 오기 한 주일 전에 기청산식물원의 아촌 선생님이 휴대폰의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사진을 보며 난생 처음 알게 된 납매(臘梅)이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피어나는 이 신비로운 꽃을 보러 식물원에 찾아가고도 싶었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태산신의 뜰에서 납매의 꽃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방으로의 여행은 모험과 새로움과 발견의 연속인가 보다. 여행은 타성에 젖은 나의 감성을 깨어나게 하고, 가슴속의 온갖 시름들을 내몰며, 무디어지는 지성을 날 서게 한다. 게으르고 나른한 몸을 긴장시키고 활기를 불어 넣는 최고의 명상이 여행임에 분명하다.
돌아 나와 ‘天下歸仁(천하귀인-천하는 어짐으로 돌아간다.)’이라고 쓴 편액이 걸린 큰 문을 들어섰다. 태산은 동악이니, 오상(五常)의 인에 해당하고,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동악의 인덕(仁德)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대묘의 중정(中庭)이다. 역시 마당에는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룬다. 섬돌 아래에는 중국의 보물로 지정된 노백이 서 있다.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시, <노백행(老柏行)>에 나오는 그런 측백나무이다. 그 아래의 괴석(怪石)은 사람들이 상서로운 기운을 얻고 싶어 만진 자국이 반질반질하다. 역시나 우리의 여자 선생님들도 주위를 빙글 빙글 돌며 즐겁게 돌을 만진다.
돌계단 위에 올라가니 돌로 바닥이 깔린 마당에 큰 쇠 향로가 놓여 있고, 붉은 칠을 한 9칸 기둥에 주황색의 이층 기와지붕을 한 웅장한 전각이 서 있다. 공자님 사당인 대성전(大成殿)과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과 함께 중국의 3대 전통건축에 들어간다고 한다. 송천황전(宋天貺殿)이라고 쓴 붉은 편액이 지붕 사이에 세로로 달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금빛 휘황한 목조 감실 안에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홀을 두 손으로 잡은 금색 태산신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앞에는 ‘東嶽泰山之神(동악태산지신)’이라는 위패가 있다. 조화를 꽂은 화병과 제물이 차려진 붉은 바탕에 황금색 용을 그린 경상(經床) 모양의 제상이 앞에 놓여 있다. 감실 위에는 두 마리 황금빛 용 조각이 마주하고, 그 위의 천정에는 청나라 황제가 쓴 것으로 보이는 청색 바탕에 금물로 쓴 ‘配天作鎭(배천작진-하늘과 짝 지워지고 대지를 거느린다.)’ 편액이 걸렸다. 출입문 위에는 금빛 찬란한 용들이 테두리를 두르고 청색의 바탕에 금물로 쓴 ‘岱封錫福(대봉석복-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큰 복을 내린다.)’이라는 청나라 옹정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또 그 옆에는 붉은 글씨로 쓴 ‘大德日生(대덕일생-큰 덕이 날마다 생긴다.)’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바닥에는 높이가 일 미터는 되어 보이는 큼직큼직한 놋쇠 제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옆엔 비단에 수를 화려하게 놓은 당번(幢番), 일산(日傘)이 있고 도끼, 칼 같은 병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신상 좌우의 높이 솟은 기둥 사이로 보이는 높고 넓은 삼면 벽에는 ‘泰山神啓蹕回鑾圖(태산신계필회란도)’가 그려져 있다. 동벽에는 태산신이 천하를 순행(巡幸)하는 장면이고, 서벽에는 태산신이 대묘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생생한 표정의 홀을 든 문신들, 칼을 집고서서 투구 쓰고 황금 갑옷을 입은 무신들, 붉은 색 산호 가지의 화분을 진 사자와 향로를 등에 실은 코끼리, 갑옷을 입고 화살을 차고 말을 탄 무장들,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악공들, 가마를 탄 왕자, 4개의 바퀴가 있고 쨍그랑쨍그랑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금방울이 달린 수레의 비단 장막 안에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홀을 쥐고 앉은 태산신, 일산과 깃발을 든 수많은 궁중의 시종들, 돌다리, 나무와 산, 누각과 정자, 화려한 저택이 늘어 서있는 도심의 길거리, 황제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태산으로 봉선 제의를 봉행하러 오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북송의 진종(眞宗, 997~1022) 황제가 봉선의식을 올리기 위하여 태산으로 행차하는 장관을 모델로 한 송나라 때의 웅장한 벽화이다. 우리나라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으로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행차한 정조의 거둥 행렬을 그린 의궤의 그림과 닮았지만 규모와 그려진 시기가 우리를 압도한다. 설명문에는 그림의 길이가 62미터이고 높이가 3.3미터이며, 등장하는 다양한 표정의 인물들이 697명이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문화유산이다. 대묘는 세계 자연 및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전을 돌아 뒤쪽으로 가니 마당에는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그늘을 이루고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는 꼭대기에 네댓 개의 까치집들을 이고 있다.
전각으로 들어가니 태산신의 부인이 모셔져 있다. 황제들이 살던 자금성은 물론이고 이번 여행에서 가 본 모든 사당들에는 남신이 모셔진 본전 뒤에는 그 부인을 모신 전각이 있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생성하는 태극을 이룬다는 우주관이 중국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당의 처마 아래 출입문 위에는 청색 바탕에 화려한 테두리를 두른 ‘權與造化(권여조화-권세가 천지의 조화와 더불어 한다.)’라고 쓴 금빛 글씨에 건륭황제의 어새가 새겨진 큰 편액이 걸려 있다. ‘東嶽淑明之神(동악숙명지신)’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위패가 있고 역시 그 앞에도 분홍색의 작약꽃과 제물을 올린 제상이 있다. 좌우에는 두 명의 시녀들이 부채를 들고 서 있다. 시녀들 뒤의 벽에는 흑백으로 음양이 어울려 있는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수놓인 비단 당번(幢番)이 6장 걸려 있다. 분홍색 두 장에는 ‘大淑大明’(대숙대자-큰 맑음 큰 밝음), ‘大慈大悲’(대자대비-큰 사랑 큰 연민), 노랑색 두 장에는 ‘普天共仰(보천공앙-온 천하가 함께 우러름)’, ‘與聖同明(여성동명-성인과 같은 밝음)’, 주홍색 두 장에는 ‘至孝至慈(지효지자-지극한 효도와 지극한 자애)’, ‘廣靈慈惠(광령자혜-넓은 신령 자애로운 은혜)’라고 글자를 수놓았다.
동벽 밑에는 편종, 서벽 아래에는 편경이 놓여 있었다. 편종은 연주를 시작할 때 두드린 금성(金聲)이고 편경은 연주를 마무리할 때 친 옥진(玉振)이다. 역대의 황제들이 행차하여 금성옥진의 장엄한 제례를 태산신 부부에게 올리고, 천하의 만민들에게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큰 복을 내려주기를 빌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후원이 있다.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수석과 분재 화분들이 좌우의 정원에 나열되어 있었다. 후문을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태안시내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위로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줄기가 뻗어 있다. 차가 왕래하기에 불편하지만 여름이 오면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넓은 그늘을 이룰 것이다.
태산등정(泰山登頂)
태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돌을 다듬어 수석으로 만들어 파는 집이 자주 눈에 띈다. 로타리에는 검푸른 바위를 세워 놓았는데, 최근에 부근에서 발견한 옥돌이라고 하였다. 달리는 버스에서 박 단장님이 시조 한 머리를 읊었다. 시조창 열두 곡을 다 배운 나는 반가웠다. 곡조를 비슷하게 잘 읊는다. 금강산에도 그의 초서 달필이 새겨져 있는 봉래산인(蓬萊山人) 양사언(楊士彦)의 시조이다. 포항에서 버스 타고 인천항으로 올 때부터 천재적인 언어유희 감각을 가진 단장님이 이번에도 멋진 유머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케이블카 타고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타고 산만 높다 하더라!”
태산은 중국인에게 우리 겨레의 백두산과도 같다. 성스러운 하늘 호수, 천지가 있는 백두산에 법륜 스님 따라 두 번이나 올랐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마치 천상의 화원과도 같았던 서쪽 비탈로 올랐을 때는 운무가 자욱하여 천지를 끝내 보지 못하고 하릴없이 북중국경비의 경계를 넘어서 나의 다른 반쪽 땅, 북한 땅을 밟고 나왔다.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웅장한 장백폭포가 있는 북쪽 가파른 계단으로 다시금 올라서 거대한 하늘 호수, 너무나도 장엄하고 성스러운 천지를 보고, 바지를 걷고 물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중국과 한국이 땅을 맞대고 살아온 문명의 역사가 적어도 이천 년은 된다. 중국 문명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도 태산은 누구나가 오르고 싶은 성스러운 산악이다.
태산 입구의 터미널에서 텔레비전 영상으로 태산의 전체 모습을 보았다. 뭇 봉우리들이 가득한 큰 산이다. 산둥성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가 1,532미터, 총면적이 426평방킬로미터이다.
입장권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가는 셔틀 버스를 탔다. 산 속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이름이 채석계(彩石溪)이다.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바위 봉우리 속에 흐르는 작은 계곡이다. 창밖으로 작은 사당도 보이고 절도 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물은 말랐다. 사방이 암봉으로 둘러싸인 산중에 있는 도화원삭도(桃花源索道) 마당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삭도(索道, 케이블카)를 탔다.
6명이 타는 케이블카를 타고 암봉 사이로 가파르게 난 골짜기 위로 올랐다. 아래를 굽어보니 희미하지만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보이고, 산중턱에 암자도 있다. 폭포가 얼어 있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앙상한 상고대가 피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나뭇가지마다 안개와 서리가 얼어서 산호 숲을 이루는 은세계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준다. 천상의 신선경이 홀연히 펼쳐진다. 나무를 흔들자 눈꽃 송이가 화르락 떨어지는 것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이파리들 같다. 식당과 찻집이 어깨를 붙이고 50미터는 넘게 길 양쪽에 늘어 서있는 길거리를 지나자 남천문(南天門)과 만나는 마당이 나온다.
중국인 가이드 왕씨의 설명을 들었다. 정상까지 다녀오는 시간은 한 시간이 주어졌다. 천가(天街)라고 쓰인 석패방(石牌坊)을 지나자 김이 술술 나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길가에 있다.
운무에 휩싸인 길을 걸어가니 다시 ‘중승(中昇)’이라 새겨진 석문이 나온다. 산 아래쪽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에 묻혀있다. 상고대가 가지마다 피어서 태산의 풍경이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눈앞에 그야말로 신선경을 펼쳐 놓는다. 천하제일의 명산인 태산은 정말로 알뜰하고 조촐한 모습으로 해동(海東)의 속객(俗客)을 맞이해 준다. 우리들은 모두가 구름 위에 펼쳐진 천상의 길거리를 걷는 신선, 선녀들이었다.
‘백운공예(白雲工藝)’라는 현판을 건 단청이 곱게 칠해진 가게를 지나자 정상 아래로 햇빛이 들고 상고대 숲이 은세계를 이룬 풍경 속에는 공자님 사당이 멀리 바라보이고, 그 위의 정상 부근에는 호텔이 있다. 호텔 이름이 재미있다. ‘신식빈관(神息賓館)’, 신들이 쉬어가는 여관이다. 수백 계단을 올라 서신문(西神門)이라고 새겨진 성문을 들어서니 태산의 여신을 모시는 도관(道觀)인 벽하사(碧霞祠)의 중문 앞이다. 남쪽으로 난 무지개 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일 미터는 될 붉은 색 굵은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으며 향을 올린다. 그 위의 바위 밑에는 ‘萬代瞻仰(만대첨앙-만대에 우러른다)’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분향대(焚香臺)가 보인다.
계단 위의 벽하사 중문을 들어서니 붉은 칠을 한 건물들로 에워싸인 작은 마당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홍색 헝겊이 다닥다닥 묶여져 있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비석과 집 모양의 향로가 있다. 사당에는 태산의 성모신(聖母神), 벽하원군(碧霞元君)의 상을 모시고 있다. 사람들이 그 앞에 놓인 둥근 방석에 꿇어 앉아 절을 하며 소원을 빌고 있다. 사원 앞마당에 상투를 틀고 검은색 도복을 입은 젊은 도사가 서있었다. 다가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였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없이 사무실로 들어 가버린다.
벽하사 동문을 지나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길가의 상고대 핀 수풀 속에는 콩알처럼 작고 빨간 열매를 따 먹는 참새 떼가 종알종알 지저귀며 나뭇가지를 옮겨 다닌다. 오르막 입구에는 신비롭게도 성수정(聖水井)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고 돌난간으로 보호한 샘이 보였다. 다가가서 속을 내려다보니 물은 말랐고 바닥에는 지폐가 뿌려져 있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바닥에 돌을 다듬어 벽돌처럼 깔아 놓은 큰 마당이 있다. 그 북쪽 테두리에는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대관봉(大觀峰)의 비석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는 당나라 현종이 여기 태산 꼭대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그 일을 천고에 길이 남기고자 직접 지은 비문을 새긴 비가 장관이다.
당 개원 13년(725)에 현종이 국력을 과시하려고 각종 말 1천 필을 뽑아 호탕한 행렬을 지어 태산에 와서 성대한 봉선 제전을 거행하였다. 태산신을 ‘천제왕(天齊王)’으로 봉하고, 비문을 황제가 직접 짓고 썼다. 이듬해, 726년에 여기 대관봉(大觀峰) 아래에 바위를 자르고 비명을 새겼다. 이 비명은 일명 ‘당마애(唐磨崖)’라고 한다.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장식하고 그 아래에 ‘天下大觀 紀泰山銘(천하대관 기태산명)’이라는 제목 아래에 ‘朕宅位十有四載(짐댁위십유사재-짐이 즉위한 지 14년)’으로 시작하여 ‘大唐 開元 十四年 九月 十二日(대당 개원 14년 9월 12일)’이라는 날짜가 끝에 새겨져 있다. 모두 일천여덟 금빛 찬란한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는 웅장한 마애비(磨崖碑)다. 비의 높이는 12.3미터, 너비는 5.3미터이고 비문은 51자의 24행이다. ‘기태산명(紀泰山銘)’ 4자는 글자 크기가 가로 45센티미터, 세로 56센티미터의 대자이다.
황제 한 사람이 무능하면 일만 지방이 그 재앙을 받는다. 한 마음의 시작과 끝이 있어서 상제가 나의 마음 씀을 안다. 짐은 3덕의 실행을 보배롭게 여긴다. 3덕은 인자, 검약, 겸허이다. 인자함은 끝이 없이 억조창생을 품는다는 말이다. 검약은 궁핍한 장래를 준비하라는 가르침이다. 자만하는 자는 남이 헐뜯고 스스로 겸허한 자는 하늘이 이롭게 한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법도는 쉽게 준수될 것이고 왕업은 쉽게 지켜질 것이다. 석벽을 갈아서 금빛 글을 새기어 뒷사람이 나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서 나의 마음을 보고, 말단의 일을 살피어 정치의 근본을 알게 한다.
비문은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연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의 웅혼한 기상과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하지 못하고 욕망에 굴복한 연약한 인간이었다. 며느리였던 양귀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안록산의 난 이후 대당제국도 쇠망의 역사를 되풀이하였다.
당마애비 서쪽에는 ‘壁立萬仞(벽립만인-만 길의 벽처럼 공자님의 경지를 느끼게 하는 산)’, ‘天地攸(천지동유-하늘과 땅이 함께 어울린다.)’, ‘彌高(미고-두루 높다.)’, ‘星辰可摘(성신가적-별들을 딸 수 있다.)’, ‘置身霄漢(치신소한-몸이 은하수에 있다.)’, ‘巖巖(암암-바위, 바위)’, ‘呼吸尊 宇宙崇(호흡존 우주숭-존귀함을 호흡하고, 우주를 숭배한다.)’, ‘五岳之尊(오악지존-오악 중에 존귀하다.)’, ‘與國同安(여국동안-태산과 더불어 나라가 함께 평안하다.)’, ‘雲峰(운봉-구름 봉우리)’, ‘與國咸寧 體乾潤物(여국함녕 체거윤물-나라와 함께 모두 안녕하고, 하늘을 몸 받아 만물을 윤택케 한다.)’ 같은 대자 문구를 대관봉 병풍 바위들에 새겼고 글자들은 붉은 칠을 하였다. ‘靑壁丹崖(청벽단애-푸른 절벽 붉은 벼랑)’, 이 네 글자만은 청색을 칠했고, 작은 글씨로 시나 문장을 적은 곳도 많다.
대관봉 마당에서 다시 옥황정(玉皇頂) 사당이 있는 태산의 정상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계단 좌우에는 허연 바위가 가득하고 바위마다 붉은 칠을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五嶽獨尊(오악독존-오악 중에 태산이 홀로 존귀하다.)’, ‘登高壯觀天地間(등고장관천지간-높은 곳에 올라 천지간의 장관을 살핀다.)’, ‘仰觀俯察(앙관부찰-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핀다.)’, ‘擎天捙日(경천예일-하늘을 받치고 해를 끈다.)’, ‘昻頭天外(앙두천외-머리를 들어 하늘 밖을 본다.)’, ‘登峯造極(등봉조극-봉우리에 오르는 과정을 거쳐 학문이나 인품이 최상의 경지를 지어낸다.)’, ‘奇觀(기관-기이한 경관)’, ‘孔登巖(공등암-공자가 오른 바위)’, ‘果然(과연-과연 태산이다.)’ 같은 문구들 옆에는 특이하게도 ‘萬法唯識(만법유식-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산물)’이라고 새긴 것이 보인다. 현장법사가 전한 유식불교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산에는 공자님이 올라 천하를 굽어보았고 공자사당이 있다. 태산 성모신을 모신 벽하사와 옥황상제를 모신 옥황정 같은 도교사원이 있다. 유불도 삼교의 문화유산이 태산에는 공존하는 것이다. 위로는 진시황이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사(李斯)가 쓴 비가 남아 있고, 아래로는 중화민국 시대의 관리와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의 지도자들이 남긴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바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새겨놓은 시를 읽어본다. 1927년에 중화민국의 한 장군이 추석에 올라 남긴 것이다. 그 거친 기상이 진시황을 닮았다.
눈 아래 천지가 작고, 眼底乾坤小
가슴 속 응어리 많다. 胸中塊疊多
봉우리 꼭대기에 서서, 峰頭最高處
칼을 빼어들고 미친 듯 노래를 부른다. 拔劍縱狂歌
중화민국 십육 년 정묘 중추 民國十六年丁卯中秋
다시 계단을 올라 ‘칙수옥황정(勅修玉皇頂)’이라는 글자가 가로로 새겨진 작은 석조 아치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마당 가운데에는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태산을 뜻하는 ‘雨(우)’자를 닮은 도교의 부적 글자 밑에 ‘泰山極頂(태산극정) 1545米(미)’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가 태산의 꼭대기이다. 그 둘레의 돌난간에는 무수한 놋자물통이 채워져 있고 붉은 천이 울긋불긋 달려있다. 사당에는 옥황상제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玉皇大帝(옥황대제)’라고 쓴 위패가 있다.
사당 곁에는 ‘古登封臺(고등봉대-옛날부터 황제들이 올라와 봉제를 지낸 대)’ 넉 자가 크게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당 현종의 봉선기념비에는 자신의 앞에 72명의 역대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공자님 시대부터 청나라 때까지 여기 태산 절정에 올라 토단을 닦고 하늘에 봉제(封祭)를 올렸다.
마당 담장 아래에는 높이가 5미터는 되어 보이는 글자가 없는 사각형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한 나라 무제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무제는 소금과 철, 술을 전매하면서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벌였다. 동으로 우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서로 장건을 보내어 대월지와 군사동맹을 추진하고 중앙아시아 지역을 경영하여 비단길이 열렸다. 남으로 베트남을 정복하고 북으로 흉노와 싸웠다.
한나라 제국의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은 황실이 처음 봉행하는 무제(武帝)의 태산 봉선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 장엄한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끝내 죽었다. 죽으면서 아들 사마천의 손을 잡고 울면서 당부하였다.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것처럼 태초부터 당대까지의 역사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행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하였다. 흉노와 전쟁하다 패배한 친구,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궁형(宮刑)이라고 하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서도 사마천은 끝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다.
그는 태초의 황제(黃帝)부터 당대의 무제 때까지의 장대한 황하문명의 역사를 신운이 감도는 필치로 이루어내었다. 불멸의 기록, <<사기(史記)>> 130편을 완성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페르시아 전쟁사를 기록하였고,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지만, <<사기>>는 그들을 훨씬 능가하는 역사서였다. 서양에서는 18세기 영국에서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흥망사>>가 나오고서야 비로소 <<사기>> 수준의 역사서술이 가능하였다. 중국문명의 인문학의 전통이 얼마나 심원한가를 <<사기>> 한 책이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한나라 무제의 무자비(無字碑) 아래에는 현대 중국의 저명한 인문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의 작은 시비가 보였다.
새벽에 일어나 일출을 보는데, 夙興觀日出,
별과 달이 하늘 가운데 있네. 星月在中天
안개가 고갯마루에 급히 날리고, 飛霧嶺頭急
가득한 구름은 바다 위를 돈다. 稠雲海上旋
새벽해의 빛은 그믐 같고, 晨曦光晦若
동쪽을 보니 바위가 우뚝하네. 東閱石巍然
무자비를 어루만져보며, 摩撫碑無字
한나라 무제 당시를 돌이켜 생각한다. 回思漢武年
-1961년 여름 태산에 올라서 일출을 보았지만, 해를 보지 못하고, 곽말약
一九六一年夏登泰山觀日未遂 郭沫若
사당 뒤로 가서 담장 바깥을 보니 구름에 휩싸여 산 아래 풍경은 아예 볼 수 없다. 광활한 산동(山東) 평야의 한 가운데에 이 태산이 우뚝 솟아 있어서 이곳에 서면 아스라이 바다가 보이고, 발아래에 뭇 산들이 올망졸망하며, 궁궐과 인가는 개미굴보다 더 작아 보였을 것이다.
여기 태산의 마루에서 <<맹자>> <진심장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말을 다시 음미해 본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공자께서 노나라의 동산에 오르시니 당신이 생장한 터전 노나라가 너무도 작게 보였다. 그런데 다시 태산에 오르시니 천하가 작게 보였다. 그러므로 바다를 맛본 사람은 시냇가에서만 논 사람들 앞에서 물에 관하여 말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은 학문의 경지를 시골 서생들 앞에서 형언하기 어렵다. 대저 물을 본다는 것은 방법의 차원이 다양한 것이니 반드시 그 장활한 파란을 보아야 한다. 해와 달과 같은 거대한 인격을 갖추게 되면 그 빛은 아무리 작은 틈새의 공간이라도 반드시 비춘다.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라! 앞에 웅덩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다 채우고 난 후에야 앞으로 나아간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둔다고 하는 것은 기초적 실력을 완비하여 문채(文彩)를 이루지 아니 하면 통달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옥황정에서 나와 벼랑 끝에 서서 바라보자니 구름이 뭉게뭉게 오르고 그 위로 백색 바위 봉우리가 성자의 얼굴처럼 솟아 있다. 공자님도 지평선 아득히 솟은 태산을 어린 날부터 바라보며 자랐다. 너새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소년처럼 말이다. 공자는 자신을 태산에 비유하였다. 공자는 태산의 기운이 잉태한 인물인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탄식을 최후를 맞은 백조의 울음처럼 애제자 자공 앞에서 토해내는 거인, 인간 공자의 모습을 어제일인 듯 그려내고 있다.
그 다음해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공자가 병이 나서 자공(子貢)이 뵙기를 청하였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에 의지하여 문 앞을 거닐고 있다가 물었다.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그리고 탄식하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泰山壞乎
기둥이 부러진다는 말인가! 梁柱摧乎
철인이 죽어간다는 말인가! 哲人萎乎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또 자공을 보고 말하였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으며,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이어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그 후 칠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일흔셋으로, 그것은 노나라 애공 16년 4월 기축일의 일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긴 오봉산 바위 봉우리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남모를 실존의 경험이 있다. 서른다섯 해 전 고등학교 이학년 시절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순간에 공자님 사당에 참배하는 꿈에서 깨어나 기사회생한 일이 있다. 내 존재의 심연 속에는 성인 공자님이 살아 계시는가보다. 칼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 우리문화의 원형질 속에 만고의 스승이 태산의 저 봉우리처럼 우뚝 서 계시는 것이다. 태산을 내려온 그날 밤은 취푸(曲阜)의 궐리(闕里)에서 묵고 새날이 밝아오면 ‘만인궁장(萬仞宮牆)’ 안의 성인, 공자님의 묘소와 사당을 참배할 것이었다.
‘오악독존’ 비석 앞에서 태산 등정 기념 소주를 한 잔씩을 들었지만 나는 사진만 한 장 촬영하고 술은 마음으로만 마셨다. 다시 대관봉 앞을 내려와 벽하사 동문을 지나 서문을 내려왔다.
백운빈관을 지나자 길가의 바위에 새겨진 ‘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태산에 올라 조국 산하의 장려함을 본다!)’라는 글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년필 글씨체에 감탄사 문장 부호까지 붙은 문구이다. 젊은 날 5.4운동에도 참여하였던 팔순의 원로 여성혁명가이고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鄧穎超)가 1984년 6월에 썼다.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미려한 글씨지만 굳센 느낌을 준다. 대묘의 비석에 새겨진 같은 글씨를 보았지만 태산의 수많은 바위 각서 중에 여성의 글씨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강경파 정치인으로 1995년에 ‘전국인민대회의장’으로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석(喬石)의 글씨, ‘海岱繼目(해대계목-바다와 태산이 한 눈에 이어진다.)’도 보인다. 태산성모(泰山聖母)가 꿈속에서 내린 글자를 새긴 비석도 새겨져 있는데, 무슨 글자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중승문 아래의 천가(天街) 식당 앞에 걸음이 멈추었다. 차가운 날씨에 김이 술술 나는 만두나 기름기를 빼고 굽는 밀가루 호떡, 꽈배기, 밀가루를 엷게 펴서 부친 커다란 빈대떡을 판다. 무슨 맛인지 보기에도 구미가 당긴다. 울릉도에서 온 김 선생님에게 한 조각 얻어먹는 것으로 신선경의 식욕을 풀었다.
남천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태산 발치에서 여기 이 문까지 무려 칠천사백열두 개의 돌계단이 놓여 있다. 이 문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중간에 ‘오대부송(五大夫松)’이 있다. 진시황제가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내려가던 중 비바람을 피한 나무에 오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사기>> <진시황본기>에 나온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리자니 태산에 오면 보고 싶었던 그 소나무를 보지 못하여 아쉬웠다.
케이블카를 타러 다시 이층건물들이 늘어선 식당가를 걸어 나왔다. 태산을 등정하고 내려오는 33명의 남녀가 가이드 왕씨를 왕초로 삼아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주름잡았다. 우리는 신선들이 사는 하늘 거리를 그렇게 활보하였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6명이 타는 케이블카 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여선생님들의 성함을 물었다. 임 선생님은 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데 해외여행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번 중국여행이 전공과목과 불가분의 관계이니 역사교사인 나처럼 보람된 여행이 될 것이다. 다른 두 분은 인천에서 동참하였다. 두 사람이 단짝이 되어 표정이 참 밝다. 관포지교의 우정을 나누는 차, 윤 두 분 선생님과도 동승했다. 이 분들은 태산을 함께 등정하고 태산의 케이블카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만났으니 그 얼마나 고귀한 인연들인가!
도로 가의 태산 기슭에는 비석이 세워진 어느 문중의 묘역이 보인다. 묘마다 봉분과 비석이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이다. 산둥의 태산 아래에는 유교문화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귀에 익숙하였고 어른이 되면서 꼭 한번 오르고 싶었던 태산에 올랐다. 공기가 투명하여 하늘이 드높아지는 가을날에 산 아래에서 수천 계단을 걸어서 다시 한 번 태산을 오르고 싶다. 신들이 사는 태산의 마루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득한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새벽 해돋이와 해와 달이 비추는 천하와 우주의 장쾌한 풍광을 보아야겠다.
-보리수필 9호(2014)
첫댓글 선생님 무고하신지요? 오랜만에 안부 전합니다.
네, 전 별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큰 활약 기대합니다. ^^
좋은곳 다녀 오셨네요.
선생님 건강도 잘 챙기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