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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으로 평가돼 온 황씨는 단편 ‘별’(1941) ‘독짓는 늙은이’(1950) ‘소나기’(1953) 등과 장편 ‘카인의 후예’(1954)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4) 등 수십편에 이르는 명작을 남겼다. 1931년 시로 등단한 황옹은 그후 1982년 장편소설 ‘신들의 주사위’를 남길 때까지 거의 50여 년동안 주옥같은 명편들로 한국 문학사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소나기’는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로서 교과서에도 실려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에서 출생,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방직후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7년부터 경희대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쳤다./조선
[1982년] 그레이스 켈리(Kelly, Grace) 사망
← 켈리
1929. 11. 12 ~ 1982. 9. 14
미국 영화배우 출신의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가 전날 막내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타고 가던 승용차가 산길에서 전복되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던 중 1982년 9월 1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53세였다.
1928년 11월 12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켈리는 18세 때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의 아메리카 연극아카데미에서 연기수업을 마쳤다.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서 단역으로 출연 중 영화기획자의 눈에 들어 1951년 영화 '14시간'으로 은막에 데뷔했다. 그가 주목받는 여배우가 된 것은 '하이눈'에서 게리 쿠퍼 상대역인 약혼녀 '아미'역을 맡은 후부터였다. 이후 '다이얼 M을 돌려다' '상류사회' 등에 출연했고 1954년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56년 4월 모나코왕 레이니에왕과의 결혼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왕비로 변신했다. 생전에 3명의 자녀 캐롤란인 공주, 알버트 왕자, 스테파니 공주를 두었다. /조선
[1969년] 공화당, 3선개헌안 변칙 통과
← 박정희 대통령
1969년 9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목적으로 추진된 3선개헌안이 국회에서 변칙적으로 통과되었다. 민주공화당은 1967년 6월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개헌가능선인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민주공화당 내부에서도 개헌에 대한 반발이 심해 1968년 5월 국민복지회사건과 1969년 4월 4·8항명파동을 거치며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개헌 작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3선개헌에 동의한 의원들을 제명하기 위해 9월 7일 당을 해산하고, '신민회'로 국회교섭단체 등록을 한 후 적극적으로 개헌반대운동에 나섰다. 신민회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3선개헌안에 반대하는 농성을 벌였다. 야당 및 학생들의 치열한 개헌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인 9월 14일 새벽 2시 122명의 여당계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에 모여 기명투표를 실시해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헌안은 10월 17일 다시 국민투표에 부쳐져 총유권자의 77.1% 참여에 65.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 결과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브리태니커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 설립
OPEC, 즉 석유수출국기구가 1960년 오늘 결성된다. 이날 이라크 정부의 초청으로 열린 '바그다드 회의'에서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5대 석유 생산·수출국 대표가 모여 만든 협의체가 바로 OPEC다.
1950년에서 60년 사이에 중동과 아프라카에서 대유전이 발견돼 원유의 공급과잉 사태가 일어남에 따라 국제석유자본이 원유 공시가격을 인하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 5개 산유국들이 힘을 모은 것이다.
실제로 OEPC는 공시가격의 회복과 인상을 주도하는 힘을 발휘하면서 회원국을 11개로 늘렸다.
결성 당시에는 '가격 카르텔' 성격의 기구였지만 1973년 제1차 석유위기를 주도해 석유가격을 상승시키는 데 성공한 뒤부터는 원유가의 계속적인 상승을 위해 생산량을 조절하는 '생산 카르텔'로 변질됐다.
오늘날 OPEC는 석유 이권의 국유화, 자연보호, 각종 석유산업 진출 등의 목표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현재 OPEC의 본부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 /YTN
[1956년] 국무회의, 국군의 날(10월 1일) 제정
한국 국군의 발전을 기념하는 날이다. 종전에는 육군기념일은 10월 2일, 해군기념일은 10월 11일, 공군기념일은 10월 1일 등 각 군별로 거행하였다. 이것을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 양양 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하였다.
이날은 육군·해군·공군·해병대 및 3군 사관학교 생도들의 사열과 시가행진 등 각종 기념행사가 있다. /naver
[1955년] 대구매일신문 최석채 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괴청년 40여명 신문사에 난입
← IPI가 뽑은 ‘언론자유영웅 50인’에 선정됐던 몽향 최석채선생
대구매일신문에 괴청년 40여명이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1955년 9월 13일 대구매일신문 주필인 최석채씨가 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때문이었다.
이 사설은 임병직 대사가 대구를 방문할 때 당국이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환영한 처사를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사설이 나간 다음날인 9월14일 국민회 경북도지부 총무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 검찰부장 홍영섭은 괴청년 40여명을 이끌고 신문사에 난입, 인쇄시설을 파괴하고 발송중인 신문 뭉치를 탈취해갔다.
당국은 가해자들을 가려내지 않은채 오히려 최석채 주필을 ‘이적행위’로 몰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9월 17일 전격 구속했으나 1956년 5월 8일 대법원의 무죄확정판결로 일단락되었다./조선
[1910년] 작가 이상(李箱) 출생
← 이상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날자.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이상, <날개>에서
이상은 실험정신이 강한 작품을 남긴 한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3세 때부터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큰집에서 살았는데, 권위적인 큰아버지와 무능력한 친부모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런 체험이 그의 문학 전반에 깔린 불안의식의 뿌리를 이루었다. 건축을 공부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技手)가 되었으나 1933년 결핵이 발병해 퇴직했다. 그후 요양차 황해도 백천온천에 머물렀는데,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금홍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4년 '구인회'에 가입했으며,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했다. <오감도>를 비롯한 시작품에서 그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뒤섞거나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숫자를 빌려 쓰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관념을 표출해냈다. 또한 소설에서는 객관적인 현실을 반영한 인물들간의 갈등과 대립을 그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객관적인 현실을 관찰하는 자의식 강한 인물의 내면세계를 주로 그렸다. 특히 대표작 <날개>는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한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이상문학상'을 1977년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해 매년 10월 시상하고 있다./브리태니커
[1901년] 월리엄 매킨리(McKinley, William) 미국 25대 대통령, 한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
← William McKinley Library of Congress, Washington, D.C.
1843. 1. 29 ~ 1901. 9. 14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재임 1897∼1901). 오하이오주(州) 나일스 출생. 남북전쟁에 종군하였으며, 1867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지방 검찰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877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1890년 매킨리 관세법(關稅法)을 기초하였다.
1891년 오하이오 주지사가 되었으며, 1896년 미국 공화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 유지와 보호관세를 내걸어 산업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전개하였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전쟁을 일으키고, 극동에 대해서는 문호개방정책을 취하였다. 1900년 재선되었으나, 다음해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였다. /naver
[1901년] 미국 데오도르 루즈벨트, 제26대 대통령에 취임
← 루스벨트
루스벨트(Roosevelt, Theodore, 1858~1919)는 1858년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23세 때 뉴욕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진실과 공정을 존중한 공화당원이었으며 정치적 부패를 강력히 비난하여 당수와 맞서 혁신파를 주도하고 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884년 일시 정계를 물러나 서부지역의 목장에서 집필을 하다가, 1889~1894년 관리제도 개혁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이어 뉴욕시(市)의 경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정계의 숙정에 노력하였다.
1896년 해군차관보가 되어 해군강화에 공헌하였으며, 미국-스페인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관직을 사임하고 의용군을 조직하여 쿠바에 출정하여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대전(大戰) 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1900년 대통령 W.매킨리 밑에서 부통령으로 있다가 매킨리의 암살로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04년 재선되었다.
대통령 재임시 내정면에서는 혁신주의를 내걸고 트러스트 규제, 철도통제, 노동자 보호입법, 자원보존 등에 공헌하였으며, 외교면에서는 먼로주의의 확대 해석에 의하여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해 문제, 파나마운하 건설 등 강력한 외교를 추진하였다. 또 러일전쟁의 조정, 모로코 문제 중재 등에도 적극 힘써, 190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10년 정계로 복귀하여 1912년 제3당인 진보당을 조직하고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의 복지향상을 지향한 ‘새로운 국민주의’에 입각한 정강을 내걸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로운 자유’를 주창하여 출마한 민주당의 T.W.윌슨에게 패하였다. /naver
[1847년] 미국, 멕시코시티 점령
1847년 9월 14일 미국 원정군이 멕시코시티를 함락했다. 미국과 멕시코 간의 분쟁은 1845년 일어난 미국의 텍사스 합병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자국의 영토를 빼앗긴 멕시코인들은 분개했고, 이후 국경선 문제로 인한 분쟁이 계속되었다. 멕시코가 주장하는 국경선이 뉴에이서스 강인 데 반해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주장했다. 미국이 텍사스를 합병한 직후인 1845년 3월 멕시코는 미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같은 해 9월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는 텍사스 국경 분쟁을 협상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시민에게 진 빚 문제를 해결하며 최고 3,000만 달러에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사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멕시코시티에 비밀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사절을 만나주지도 않자, 이를 빌미로 포크 대통령은 1846년 1월 분쟁지역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1846년 4월 25일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테일러군을 공격하자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미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이 맺어졌으며, 미국은 리오그란데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130㎢가 넘는 멕시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브리태니커
[1927년]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사망
←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년 5월 27일 ~ 1927년 9월 14일)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무용수이다. 현대 무용(모던 댄스)의 어머니(개척자)로 여겨져서 '던커니즘(Duncanism)'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던컨이 제창하고 실천한 현대 무용의 새로운 무용정신은 발레의 전통이 빚어내는 속박이 적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하나밖에 방법이 없었던 발레를 습득했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던컨은 이윽고 고도로 세련되기는 했으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 본위의 무용에 의문을 품고, 더욱더 자연과 자유에의 동경이 강렬해졌다. 그 결과 던컨이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는 토우 슈즈(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추었다. 그것이 기교본위의 발레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다.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던컨은 그 해 파리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무용을 발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많은 공명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지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선전했으며, 그러는 가운데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은 '발레가 없는 나라'라고 불려, 육체문화운동이 활발했는데, 던컨은 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던컨이 그러한 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그녀는 그 뒤 프랑스, 미국, 소련 등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던컨이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 곳에서 디아길레프나 포킨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던컨은 현대 무용의 융성을 촉구하고, 특히 독일의 현대 무용에 힘찬 목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무용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무용계에 준 영향은 큰 것이었다.
이와 같이 던컨에 의한 '자유댄스'는 현대 무용의 선구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은 첫째로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로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셋째로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1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이며, 자유 정신의 찬가(讚歌)였다. 그 결과는 그녀의 로맨틱한 정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건강미에 대한 강렬한 사모(思慕)로서 나타났다. 그녀는 또한 기성의 음악곡을, 악보를 분석하거나 음표를 더듬거나 하는 일 없이 그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감정적으로 정서깊게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쇼팽이나 브람스, 베토벤의 교향곡조차 자기 멋대로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성적인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으며, 기법(技法) 그 자체, 표현 그 자체에도 창의를 주장하여, 그 결과로 무용예술을 한정된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길을 개척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의 전부에 영향을 미치어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렸으며 1927년에 프랑스의 니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던컨은 정열을 다하여 새로운 무용 미학의 실천에 힘썼다.
[1769년] 독일 지리학자 훔볼트(Humboldt, Alexander von) 출생
← 훔볼트, Freidrich Georg Weitsch가 그린 유화(1806)
정식 이름은 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
1769. 9. 14 독일 베를린~1859. 5. 6 베를린.
그는 현재의 지구과학·생태학에 속하는 과학분야인 자연지리학과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우주 Kosmos〉라는 책을 저술해서 과학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훔볼트 해류(지금의 페루 해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초기생애
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에서 장교를 지냈고, 그의 어머니는 1685년 루이 14세의 프로테스탄트 금지령 이후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문 출신이었다. 1779년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와 형 빌헬름은 엄격한 칼뱅주의자인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알맞는 자격을 갖추도록 정치사·경제학·고전문학·언어학·수학 등을 배우도록 했다. 1789~90년 괴팅겐대학교에서 보내면서 광물학과 지질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작센 주의 프라이베르크에 있는 광산학교에서 이 분야를 철저히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이 학교는 1766년에 설립되어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아침에는 광산에서 보내고 오후 5, 6시간 수업을 받은 후 저녁에는 식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1792년 프라이베르크에서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한 뒤 학위수여를 받지 않고 이곳을 떠났다. 1개월 후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광산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후작의 영지(領地)인 안스바히바이로이트에 있는 피흐텔 산맥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쉬지 않고 광산에서 광산으로 돌아다녔으며, 버려진 갱(坑)들을 재정비했는데 이 갱들에서는 주로 금과 구리가 생산되었다. 그는 모든 광산 활동들을 감독했고, 안전 램프를 발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돈으로 젊은 광부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설립했다.
남아메리카 탐험
그는 과학탐사가 인생의 진정한 목표라는 생각이 들자 1797년 광산부 일을 그만두고 측지학·기상학과 지구자기장 측정법을 자세히 공부했다.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격변으로 훔볼트가 참여할 수 있었던 몇몇 과학탐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스페인 당국의 허락을 얻어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들 식민지는 그 당시에는 스페인 관리들과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만이 방문할 수 있었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던 그곳은 과학탐험가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였다. 1799년 여름 그는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에메 봉플랑과 함께 마르세유에서 출항했다. 봉플랑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만난 인물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 상속받은 재산으로 그는 이 탐사의 비용 일체를 댔다. 1799~1804년 동안 그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도보로 또는 말과 카누를 이용하여 9,650㎢의 지대를 탐험했다. 이 탐험에서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궁핍한 생활을 했다.
카라카스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초원지대와 관목지대를 지나 오리노코 강의 지류인 아푸레 강의 둔덕까지 간 뒤 카누를 이용해서 오리노코 강까지 갔다. 아푸레 강과 카시키아레 강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그들은 카시키아레 강이 아마존 강과 오리노코 강의 수계 사이에서 이 둘을 연결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3개월 동안 그들은 모기 떼에 시달리고 고온다습한 기후를 견디면서 열대우림을 헤쳐나왔다. 그들은 식량이 곤충과 비 때문에 못 먹게 되자 야생 카카오 열매와 강물로 연명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새롭고 놀라운 경관에 흥분되어 건강하고 활기찬 상태였으나 심한 열병을 일으켜 돌아와야만 했다. 쿠바에서 잠시 머문 뒤 이들 두 사람은 안데스 산지를 탐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로 돌아왔다. 보고타에서 페루의 트루히요까지 안데스 고산지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지금은 이곳에 팬아메리칸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나 그당시에는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바위와 매우 좁은 길이 연속적으로 있었다. 그들은 에콰도르의 키토 주위에 있는 모든 화산들을 포함해 많은 봉우리를 등반했다. 훔볼트는 침보라소 산(6,265m)을 5,784m 높이까지 등반해 그후 30여 년 간 세계 최고의 등반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로프·아이젠·산소통 등의 현대적 등산장비 없이 이런 모든 등반을 이루어냈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고산병을 심하게 앓았는데, 훔볼트는 고산병이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산소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혀냈다. 그는 또한 지금은 페루 해류라고 불리는, 원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해류를 연구했다. 이들 두 사람은 키토에 도착하여 총독과 스페인의 사회지도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803년 봄에 두 사람은 과야킬을 출항하여 멕시코의 아카풀코까지 항해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중 가장 발달되었고 문명화된 아카풀코에서 그들 탐험의 마지막 1년을 지내면서 이 지역을 탐사했다. 미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제퍼슨 대통령의 환대를 받은 뒤 프랑스를 향해 출항했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에는 막대한 양의 새로운 식물 표본, 위도·경도의 확정, 지구자기장 분야 구성요소들의 측정법, 기온·기압의 일일측정, 멕시코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대한 통계자료 등이 포함되었다. 훔볼트는 미국의 상업 중심지에 머물 때마다 기록들과 그의 수집품들의 복제품을 저명한 문헌학자인 형 빌헬름과 프랑스 과학자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국 함대에 의해 대륙이 봉쇄되어 그의 우편물들 대부분이 도착하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삶
1804~27년 훔볼트는 남아메리카 탐험에서 모은 자료들을 간행하는 데 주력했다. 베를린을 잠시 방문한 것 외에는 파리에서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과학자들의 협조를 얻었고, 그의 지도와 삽화들을 새길 조판공들 및 출판업자들을 만나 탐험의 과학적 성과들을 담은 30권의 책을 발간했다. 등온선(평균기온이 같은 지점들을 연결한 선)과 등압선(주어진 시간이나 시기에 동일한 기압을 가진 지점들을 연결한 선)이 표시된 훔볼트의 기후도와 밤과 낮의 평균기온을 비롯한 기상자료는 매우 중요하며 비교기후학의 기초가 되었다. 지리와 식물상·동물상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실험적인 연구는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변형에 의해 형성된 안데스 산맥의 역할 및 지각의 계속적인 발달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 그의 이런 주장으로 지표가 액체상태에서 퇴적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 수성론(水成論)의 가설들은 전면 부정되었다. 그의 저서인 〈뉴에바에스파냐 왕국에 대한 정치 수필 Political Essay on the Kingdom of New Spain〉에는 멕시코의 지리·지질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멕시코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 광범위한 인구통계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심하게 반대했으나 경청되지 않았다. 그러나 멕시코의 은광에 관해 그가 기술한 것은 영국 자본 및 광산 전문가들이 광산에 투자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훔볼트는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프랑수아 아라고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과 깊은 우정을 오래 지속했고, 일반인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사교적이었던 훔볼트는 파리의 사교계에 정기적으로 나타났고, 그곳에서 그는 대화를 주도했다. 그는 오래된 집이 많은 라틴 지구의 꼭대기에 있는 검소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탐험과 책을 출판하는 데 재산을 거의 다 썼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종종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그외에도 그는 일을 시작하는 젊은 과학자들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은 그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었고 또한 과학계로도 입문할 수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연구기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는 독일의 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와 스위스 태생의 동물학자인 루이 아가시 등이 있다. 그의 폭넓은 관심과 다정한 성품은 그가 쓴 많은 편지에서 잘 나타난다. 현재 8,000여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말년
1827년 그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났고 재정적인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파리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죽기 전 몇 해 동안 훔볼트는 황태자의 교사, 추밀원의 일원, 궁정대신으로 재직했다. 그는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어린 왕자와 황실 가족들에게 과학적 방법들과 그당시의 과학적 사고들을 주입시켰다. 과학을 대중화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베를린대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연지리를 강의했다. 그는 1,000명 이상의 관객들이 모인 공공강연에서 자연지리를 계속 강연했다. 1828년 베를린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과학 회담을 조직했다.
1829년 훔볼트는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마차를 타고 알타이 산맥과 중국 국경까지 여행했고, 그때 그들이 관찰한 지리학적·지질학적·기상학적 사실들, 특히 중앙 아시아 지역의 자료들은 그 지역이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기 때문에 서양 세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훔볼트는 그의 삶의 마지막 30년을 베를린에서 보냈다. 1년에 1번은 파리를 여행하며 프랑스의 과학자들과 친분을 새롭게 했고 친구인 아라고와의 대화를 즐겼다. 러시아를 여행하기 전 그는 남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지게 했던 '자기폭풍'이라고 하는 지구 자기장의 갑작스러운 변동을 조사했다.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베를린의 한 조용한 정원 정자에서 자력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나 이들 자기폭풍이 지구 내의 원인 때문인지 지구 밖의 원인으로 생기는 것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범세계적인 자기 관찰망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독일의 수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독일·영국·스웨덴의 몇몇 연구소들에서 자기 분야를 동시에 측정해내기 시작했다. 1836년 여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훔볼트는 영국의 해외 영토에 이 문제를 연구할 부설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런던에 있는 왕립협회에 요청했다. 결국 영국정부는 캐나다·남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에 영구 관측소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고, 남극탐험을 위한 장비를 갖추었다. 이같은 분야에 대한 국제적인 과학 협조체제에 의해 산출된 많은 자료의 도움으로 영국의 지구물리학자인 에드워드 새빈 경은 지구 대기에 있는 자기폭풍이 태양 흑점의 주기적인 활동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과 폭풍의 지구 외적 원인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죽기 전 25년 동안 〈우주〉를 집필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생존시에 4권으로 출간된 〈우주〉는 문학적인 문체로 씌어졌으며, 당시 알려진 우주의 구조에 관해 쉽게 설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견에 관한 흥분과 심미안적인 즐거움도 서술되어 있다. 훔볼트는 종종 그의 책에서 보여지는 산만한 경향을 정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런 노력들에 대한 보답을 받았고, 몇 년 안에 이 책은 거의 모든 유럽어로 번역되었다. 〈우주〉의 제5권을 집필하는 동안 여전히 왕성한 열정과 기억력을 보이다가 1859년 90세의 나이로 죽었다.(C.L. Kellner 글)/브리태니커
[1321년] 이탈리아 시인 단테 사망
← Domenico di Michelino가 그린 〈Dante and His Work〉(1465), Florence cathedral 소장
1265 이탈리아 피렌체~1321 이탈리아 라벤나.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西)유럽 문학의 거장.
후에 〈신곡 La divina commedia〉으로 제목이 바뀐 기념비적인 서사시 〈희극 La commedia〉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寓話)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박학다식함, 당대 사회문제의 예리하고 포괄적인 분석, 언어와 시상(詩想)의 창의성 등은 놀라울 정도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시어(詩語)로 선택함으로써 단테는 문학발달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상어). 그는 조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시가(詩歌) 문화에 표현능력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가 수 백년 동안 서유럽에서 문학어로 쓰이게 되는 데 기여했다. 시 이외에도 중요한 이론적 저술들을 썼는데 그 범위는 수사론에서부터 도덕·철학 및 정치사상에까지 이른다. 고전전통에 매우 정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보에시우스의 작품들을 인용했으나 비전문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당대 최신의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박학다식함과 당대의 뜨거운 정치논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로 인해 중세정치철학의 주요 논문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 De monarchia〉을 썼다./브리태니커
[ 81년] 제11대 로마제국 황제 도미티아누스 즉위
← 도미티아누스
그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갖고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군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 85년에는 종신 감찰관이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 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하 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 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에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결국 살해당했다. 그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으나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밖에
2005년 노무현대통령 유엔총회 기조연설(뉴욕)
2002년 중국 난징에서 최악의 독극물사건으로 600명 중독-80명이상 사망
1998년 중국 양상곤 전 국가주석 사망
1990년 미국서 사상 최초 유전자 이식수술 실시
1986년 김포공항 폭발물 테러사건 발생
1984년 대한적십자사, 북한적십자사의 수재물자 제의 수락
1982년 7회 대한민국음악제 개막
1981년 프랑스, 중성자탄 개발계획 발표
1979년 한국-적도기니 국교 수립
1977년 남대문시장에 대화재(재산피해 20억 추정)
1974년 인도-파키스탄 공동성명 발표(국교정상화)
1973년 국무회의, 해병대 해체하는 국군조직법 개정안 의결
1972년 남북적십자 2차 본회담, 3개항 합의서 교환
1972년 서독-폴란드 외교관계 회복
1966년 한미 평화봉사단지위협정 체결
1962년 브라질 내각총사퇴
1962년 동부 터키서 지진으로 10만명 이상의 이재민 발생
1959년 소련 무인탐사위성 루나2호 발사. 인류최초 달착륙
1950년 트루만, 대일(對日)강화교류 개시를 지시
1949년 목포형무소 파옥사건. 350여명 탈출
1949년 중국공산당, 장개석 정부에 8개항 최후통첩(평화안) 제시
1948년 공출제수 폐지. 양곡매입법안 국무회 통과
1946년 프랑스와 월남, 정치-군사협상 체결
1945년 맥아더장군, 일본점령 특별성명
1941년 독일군, 레닌그라드 교외에 돌입
1938년 독일-만주 통상협정 조인
1926년 덴마크 천문학자 드레이어 사망
1913년 과테말라의 대통령(1951-54) 아르벤스 출생
1791년 프랑스 최초의 헌법인 ‘1791년 헌법’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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