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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32
1월11일[연중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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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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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EZlE1D3tXY
[한국외방선교회 권효준 탈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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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남도 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짠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하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같은 말과 동의어입니다.
얼마 전 자주 다니는 한적한 길목에 누군가가 유기를 한 반려견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영문도 모른체 버려진 강아지는 언젠가 주인이 데리러 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졌는지 모릅니다.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것 저것 주렁주렁 팔에 달고 있는 한 아이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황을 보니 어린 암환자였습니다. 아이를 챙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젊은 엄마까지…… 제 마음이 얼마나 짠해지던지요.
오늘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다양한 병고와 한계를 지닌 우리 인간을 향한 짠한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짠한 마음은 곧 연민의 마음이요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영어로 적합한 단어는 compassion일 텐데, 이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괴로워하다’ ‘함께 고통당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compassion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한 가련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던 대표 인물이었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의 나병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사람들이 다들 고개를 저으며 피해갈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인간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하며 살아왔던 그는 이번이 자신의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며 마치 들짐승처럼 울부짖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즉시 짠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손이 썩어 문드러진 나병 환자의 환부에 가 닿습니다. 그리고 외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련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느끼신 연민의 마음은 피상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도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근원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것은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한 사랑의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부족한 인간의 머리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당신 존재 전체로, 혼신의 마음을 다해 우리 각자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보내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던 나병 환자였습니다. 치유, 회복, 귀향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일상이었는데, 비참하고 어두운 그의 삶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병 환자의 적극성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꼭 치유되어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자신을 치유시켜주실 능력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확신이 그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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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kXnqwrq7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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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많이 받는 유일한 방법>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바로 은총은 계약을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에 쥐가 들끓었습니다. 이때 얼룩무늬 옷을 입은 신비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쥐잡이 꾼이라 말하며 일정 비용을 내면 마을에서 쥐를 없애주겠다고 말합니다. 시장은 별생각 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조건에 동의합니다. 그는 피리를 불어 쥐들을 마을 밖 강물에 빠트려서 죽입니다. 쥐 떼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후 그는 보상받기 위해 돌아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쥐가 사라진 것을 본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어깁니다. 그들은 전액 지불을 거부하고 단지 미미한 액수만을 제안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다른 곡을 연주합니다. 하멜린의 모든 아이는 음악에 매료되어 그를 따릅니다. 그는 그들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은총은 주는 이가 나에게 해로운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받는 이가 말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은총은 요구하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은총을 주는 이를 자기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순종은 감사의 열매입니다. 내가 감사하는 이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이 고쳐진 사람은 주님의 함구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이 다시 도졌다는 말은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진 사람이고 그러면 다른 고을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인간 안에 은총을 받고 싶은 욕망과
그 은총을 주는 이 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함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맥베스와 그의 친구 뱅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가 마녀들을 만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가 코더의 영주가 되어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또한 뺑코에게도 예언해줍니다. 자신이 왕이 될 수는 없지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맥베스는 실제로 임금이 새로운 영지의 영주로 자신을 임명했음을 알게 됩니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부인은 맥베스보고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합니다. 또한 마녀의 예언을 기억하고 뱅코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게 시킵니다. 뱅코는 살해되지만, 아들은 탈출합니다.
어쨌든 맥세스에게 이제 은인은 던컨 왕이나 뱅코가 아니라 마녀들과 자기 욕망을 자극하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맥베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마녀들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들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또 여성에게서 태어난 누구에게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왕궁 앞 숲이 왕궁까지 올라오게 되기 전까지는 안전하겠다고 말해줍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맥베스는 예언을 과신하고 자기 친구 맥더프의 가족을 학살하라고 명령합니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맥베스 부인은 광기에 빠져 결국 죽습니다. 맥더프와 던컨의 아들 말콤이 이끄는 군대가 버남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하여 맥베스의 성으로 진격하여 마녀의 예언 일부를 성취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맥베스는 맥더프와 대결하게 됩니다.
맥베스는 자신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살해될 수 없다고 자랑하지만, 맥더프는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에 힘이 빠진 맥베스는 맥더프의 칼에 죽습니다.
맥베스가 예언을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예언한 이를 은인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주가 되고 왕이 된 것이 그들 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맙고 그들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이 고쳐진 이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당이 쓰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대학에 붙는다든지 하는 일이 잘 되게 될 것이란 말을 던져 그대로 되면 사람들은 무당을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 감사하게 되고 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하게 됩니다. 어차피 50%는 맞을 것이기 때문에 그 50%가 나중엔 주요 고객으로 돈을 뜯기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에게 주던 은총을 계속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은총은 좋아지라고 주는 것인데 그러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은총은 바보가 되면서까지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항상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악으로 이끄는 이에게 감사하고 순종하게 되어 참 은총이 끊기고 멸망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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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인구가 오천만이니 5명 중에 1명은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역대 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는 명량을 비롯해서 열아홉 개가 있었으니 서울의 봄은 20번째 천만 관객 영화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장충동에서 신문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주보에 ‘광주’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딘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자들은 매일 성당에 모여서 본당 신부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형은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나중에 ‘국난 극복 훈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온 동네 형들도 있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과외 금지를 실시하였습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교복 자율화와 두발 자율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제가 기억하는 서울의 봄입니다.
영화는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그 권력의 빈자리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채우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의 빈자리는 몇몇 정치군인들의 총과 칼에 의해서 탈취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 비판적인 언론은 통폐합 되었습니다. 권력에 비판적인 민주인사들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청년들은 고문을 당하였고,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저항하는 국민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 신문은 폭도들에 의한 혼란이 있었고, 정부는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권력은 막강했고, 민주시민들의 저항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들풀처럼 시민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87년 저항하는 국민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 ‘6.10 항쟁’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를 부활하였습니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많은 민주인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의 제단 위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병환자의 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병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에게는 긴 겨울이 계속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죄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육체가 병들어가면서 절망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져서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주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예수님께 다가와서 간절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에게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나병환자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우리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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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한센병 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마태 8,4; 마르 1,44; 루카 5,14)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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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다가오거나 누군가 자신의 주변에 있으면,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 하고 외쳐야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서도 안 되고, 그 또한 누군가와 접촉하여서도 안 되었습니다. 진영이나 도시 밖에 살아야 하는(13,46 참조) 나병 환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경멸과 모욕하는 마음으로 그를 피하였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병으로도 고통받았지만,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겪는 깊은 단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는 오늘 복음에서 결코 하여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이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옮긴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보면, ‘애가 타는 마음’, ‘심장이 찢어지는 마음’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그분께서 나병 환자의 몸에 몸소 손을 대시게 만듭니다. 사람들과의 단절로 상처받은 그의 마음과 영혼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 그가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체 앞에 머물 때마다 나병 환자에게 행하신 기적을 그대로 일으키십니다.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우리 영혼의 깊은 상처에 손을 대시며,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성체 앞에 머물러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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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과 순종>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만일에 이 이야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치유의 은총을 받은 어떤 병자의 이야기”일 뿐이라면, 해설하기도 쉽고 강론하기도 쉬울 텐데,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그 병자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긴 하는데,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지, 어떨지에 대한 믿음은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져야 ‘올바른 믿음’이 됩니다.>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 대해서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은, 그의 처지가 너무 딱했기 때문인데, 그의 믿음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도 가엾게 여기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라는 말은, “자비는 모든 장벽과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병자가 청하지 않아도, 또는 병자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가엾게 여기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구원을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부터가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신 일도,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들도,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도 모두 당신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끈질기게 간청하고 또 간청해야만 마지못해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간청하기도 전에 나의 사정을 먼저 알고 계시고,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라고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몸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하는 것을 막으려고, 즉 영혼의 구원은 바라지 않고 몸의 치유만 바라면서 몰려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릇된 방향으로 빗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단단히 이르셨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권고나 당부가 아니라, 어기면 안 되는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병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잊어버렸을까? 아니면 무시했을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너무 기뻐서’, 그리고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이 큰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왜 막으실까? 이해가 안 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의 불순종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음이란, 순종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납득이 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으니까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라는 말은, 그 병자가 예수님의 활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불순종 때문에 그는 본의 아니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라는 말에는, 사람들이 몸의 치유만을 바라면서 모여들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병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함께 원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얻으려고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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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호 다미아노 신부님]
<측은지심>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의 대가요 말씀의 탈렌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론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괴팍하고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가족에겐 짜증내고…. 그런 류의 사람은 참 힘듭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난 사람’은 되었지만 ‘인간됨’은 멀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살이가 ‘예수의 인간성 닮기’를 수덕생활의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됨에 완전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좋은 품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이 아니고선 그런 인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사람 됨’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의염치를 아는 인의예지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의예지의 품성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의 자양을 강조했습니다.
그중 품성론의 으뜸은 측은지심입니다.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자기 처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바로 이 측은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품성은 하늘이 알아주는 덕이고, 긍휼한 마음은 기적을 끌어내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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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 신자 분들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어떤 밥일까요? 바로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 주신 따뜻한 밥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쌀과 같은 반찬이라도 서로 다른 맛과 향을 느끼는 것은 비단 기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이 해 주신 밥을 먹어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이후, 신학교에서 해 주는 밥과 반찬, 그리고 사제가 되어서는 사제관 식복사 자매님께서 해 주신 밥과 반찬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신학교의 밥과 사제관의 밥을 먹다가 보니 오랜만에 어머님이 해 주시는 음식을 먹었더니, 전에 느껴졌던 맛과 향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많은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처한 환경과 그 느낌들이 달라져서이기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신학교 1학년 때, 교수신부님께서 한 신학생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비치는 하느님은 어떠한 하느님이냐고. 한 신학생은 구약성경에서 비치는 하느님은, “분노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 그리고 정의의 하느님, 질투의 하느님”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신학생이 일어서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라고. 교수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상 여러 가지 모습의 하느님을 대답한 그대로 그 신학생들의 하느님 관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신자분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앗이 뿌려진 밭과 더불어 그 열매의 결실들에 대해서도 듣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간혹 어떤 신자분들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해서 하느님께서 이러이러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을 들어서 벌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지만, 결국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떠날 때,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다른 이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시를 해 주셨고, 세상이 어지러워 홍수로 멸하실 때,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들까지도 당신은 방주에 태우고 손수 문을 닫아주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지어 악의 늪에 빠져들 때, 당신의 외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사랑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당신 외아드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마음 좋은 토양에 뿌려져서, 복음에서 나오듯 커다란 결실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제가 대령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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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1, 44)
오늘날 나병을 일컬어 ‘한센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게르하르트 한센은 노르웨이 베르겐 의대 교수였습니다. 베르겐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센인 요양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센은 그곳에서 나병 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마침내 나병으로 생기는 혹 안에서 나병균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나병은 유전이 아니라 전염병임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이후 나병은 그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헌신했던 한센의 사랑이 많은 나환자들에게 사랑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도 나환우들뿐만 아니라 여러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와 치유하면서 사랑의 기적을 실천하고 계시는 모든 종사자에게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나환자의 목소리에 곧 고통받는 자의 목소리에 제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화답송의 후렴인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시44,27)라는 기도가 더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슬람의 예언자 ‘루미’라는 분은 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울어라. 당신의 고통에 둔감하거나 침묵하지 마라. 슬퍼하라, 그래서 당신 안으로 사랑의 젖이 흐르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곧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고통을 자비로 감싸 안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비는 본디 함께 있고, 함께 느끼고, 함께 괴로워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가슴이 먼저 자신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느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수용할 때 자비는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함께 머물 수도, 함께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인내patience라는 단어는 라틴어 patior고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은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고통을 염려합니다.”라고 표현하도록 제안하셨더군요. 이는 타인이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본인에게 향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자기 자신을 자책하거나 자학하기보다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먼저 자신의 고통을 자비로 끌어안기가 참으로 필요하고 요구된다고 봅니다. 저의 아픈 허리와 다리도 저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나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나환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스스로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고 어려움을 준다고 생각하여 자책과 자학으로 지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고립되어 혼자라고 뼈저리게 느낄 때,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와 인정 많고 관대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가슴에 어린아이처럼 안기고 싶어 합니다. 어쩜 나환자는 어머니시고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의 품 곧 예수님의 품에 안겨 “저는 제 영혼을 가다듬고 가라앉혔습니다.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 같습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131)라며 노래하고 싶었으리라 느껴집니다. 자신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주고 치유해 주려는 품에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맡기듯이 나환자도 역시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의 육신적이고 심리적인 아픔과 고통을 내맡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심정을, 특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내적 아픔을 릴케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안기기를 갈망합니다. 당신 가슴의 위대한 손에 오, 지금 그 손으로 나를 안아주오. 그 안에 나는 이 파편들과 내 삶을 내려놓습니다.』
‘존 오도노휴’라는 켈트족 시인은 「영원한 메아리」라는 책에서, 『기도는 열망의 목소리다. 그것은 오래된 소속감을 찾기 위해 밖을 향해 그리고 내면을 향해 손을 뻗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환자는 잃어버린 소속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향해 자비와 구원의 손을 뻗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내면을 향해 ‘자신의 상처 받은 몸과 마음’을 진심으로 끌어안고 경청하면서 화해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상처받고 무디어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은 정말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며 청하고 어떤 존재로 살기를 원하는가? 이럴 때 나환자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는 마음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참으로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고, 깨닫는 만큼 진솔하고 절박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1,40)라는 청함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청함이었기에 ‘자신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실 분’으로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간청합니다. 그 간청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고 먼저 예수님의 의지, 곧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신 예수님의 선한 의지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예수님의 자비에 온전히 자신의 치유를 내어 맡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그의 간절함과 겸손함을 마음으로 들으시고, 치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사랑의 연대 표지로 손을 대시고 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1,41) 고 치유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에서 자비로 그 나환자와 그의 간청함을 안아주시는 예수님과 예수님 자비의 품 안에서 젖떼는 아기처럼 참된 소속감과 하나됨을 체험한 나환자는 사랑으로 녹아들었으며,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그는 가장 강력하고 진솔한 복음 선포자로 변화되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상처받은 사람만이 참으로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자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1,44)고 당부하였지만,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1,45) 사랑받는 자는 때론 자신이 체험한 은총의 사건을 퍼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달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신 하느님께 대한 영광의 외침이며 또 다른 은총의 사건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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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세기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마흔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평균 수명의 두 배 가까이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지내는 연명 수명이 아니라, 삶을 활발하게 사는 건강 수명으로 팔십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 시절의 총명함과 체력을 유지했고, 뇌는 전혀 노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도 맑지 못해서 후손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계속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만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알고 따르는 것도 우리가 멈춰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을 알고 또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안에서 앞을 내다보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자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리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나병 환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모두 당신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지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주님 곁으로 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을 알고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르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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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기도>
마르코 1,40-45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참기도>
저와 늘 함께하시는
당신께서는
하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기에
그 무엇이든
제가
당신께 바라는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아오나
다만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제게서 이루어주시어
제가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오롯이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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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릎을 꿇어라>
저는 한때 허리통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 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이기도 하지만 견디고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시간이 단련의 시간으로 성화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 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 13,45-46)
그런데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 존엄을 말하면서 ‘개 식용 금지법’은 만들고 더 중요한 ‘낙태 금지법’, ‘사형금지법’에는 소홀할까요?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고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께 온전히 의탁합니다.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은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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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교회의 성사(聖事)로 양육(養育)되는>
-“우리 믿는 이들!”-
오늘 밤 꿈에 묵상 중 떠오른 강론 제목입니다. 연중시기 초반에 맞갖게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활발히 펼쳐집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공생애 첫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늘 새롭게 회개하여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살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복음선포와 더불어 온갖 치유활동이 펼쳐집니다. 앞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신 후 전도여행 중 또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주님은 고맙게도 오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주님께서 오늘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비단 전례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이들을 만나 치유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제 열심한 50대 자매들이 눈에 밟힙니다. 낮기도 때부터 저녁 끝기도 때까지 참 오랜시간 동안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몇 달 전에 피정하러 다녀간 인천 쪽에 사는 분들인데 주님이 그리울 때 수도원 성전을 찾아 마냥 머물며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다 가는 분들입니다. 이중 한분의 며칠 전 보낸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가도가도 또 가고 싶은 곳
어제는 꾸르실료 분단 모임이 있었는데
실컷 자랑했더니 다들 가자고 해서 6월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가도가도 또 가고 싶은 곳이 ‘주님의 집’ 성전이며,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분이, 만나고 또 만나도 만나고 싶은 분이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 보고 싶은 설레는 마음에 한밤중 잠깨어 쓰는 강론입니다. ‘가도가도’란 말마디를 보니 떠오르는 제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란 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호수하니 윤동주 시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정지용 프란치스코 시인의 '호수'란 시도 떠오릅니다.
“얼굴 하나야
손가락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이래서 주님 그리울 때 묵상중 저절로 눈을 감게 되나 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바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상징합니다. 나병이 상징하는 바, 각자 지닌 다양하면서도 고유한 병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건강한 이도 의인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그러니 치유의 구원을 위해 찾을 분은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왜 나병환자가 되었나? 물음 부질없는 답없는 질문입니다. 세상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원인은 몰라도 답은 압니다. 바로 답인 주님을 찾아 만나는 것이요,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를 제대로 주님을 찾아 만났으니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 마음입니다.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이런 마음을 지녀야 비로소 주님을 닮은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엾은 마음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는 깨끗하게 치유됩니다. 주님의 1.가엾이 여기는 마음, 2.따뜻한 스킨쉽, 3.능력의 말씀이 삼박자가 되어 나병환자의 믿음과 만나 일어난 치유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은 침묵을 당부했지만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이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니 저절로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나병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받았으니 나병 역시 전화위복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그 병자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삶도 깊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주님은 대중의 인기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았기에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십니다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분께 모여들으니 새삼 예수님은 우리 모든 병든 이들의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하늘이신 주님을 만나 치유받는 우리들이요 저절로 나오는 다음 감격의 고백일 것입니다.
“자리찾지도
자리탓하지도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하늘 사랑 송이송이
꽃피어내는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바로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이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상 이야기가 깊은 충격과 더불어 참 귀한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필리스티아인들에 참패한 이스라엘은 보병 삼만이 쓰려졌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으니, 엘리 아들들의 죄로 인한 업보요 그대로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탓할 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이요 하느님이 아님을 처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약 궤도 무력함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부터 부패하여 무너지면 하느님은 물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아마도 이런 패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느님을 떠나 부패했던 삶에 깊은 회개가 뒤따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참된 치유의 구원은 회개와 더불어 시작됨을 봅니다. 복음의 나병환자도 이미 주님을 찾았을 때 회개와 믿음으로 준비된 깨끗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 꽃자리 하늘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교회의 성사(聖事)로 양육(養育)되는 우리 믿는 이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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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도의 본보기>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의 기도다!”하고 뇌까렸습니다. 더 나아가 기도일 뿐 아니라 청원 기도의 본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와 주님 간에 오간 대화는 진정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지요.
왜 그런지 한 번 볼까요?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라고 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가지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청원 기도를 할 때 이 나환자보다 더 완벽한 청원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자기의 청을 아뢰면서도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절실하고 간절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청원기도라기보다는 신앙 고백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것도 주님의 능력뿐 아니라 주님의 좋으심까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어떻게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나병 환자도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믿을 수 있습니다. 허나 최악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좋으시다 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악까지 간 사람이기에 그는 진정 하느님의 좋으심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최악까지 간 사람입니다.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모든 걸 잃었습니다.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으며,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잃을 것이 남았을 때는 불안하고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앗아가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는데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 오히려 마음도 편안하고 어두운 밤에 별이 떠오르듯 도리어 선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최악의 선>입니다. 더 나쁠 것이 없는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악은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더 좋은 것을 바라기에 현재의 것이 악이 되는 것이고요.
이렇게 최악의 상태에서 최악의 선을 발견한 사람은 이제 최악을 허락하신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최악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더 진실한 기도는 말에 있지 않고 동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청하였다.”
무엇이 존재의 기도에 더 가까울까요? 입으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동작 또는 행위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제 생각에 당연히 동작과 행위가 더 존재적인 기도에 가깝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가 주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 자체가 존재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도 모든 기도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주님의 현존 앞에 현존하는 겁니다.
성당에 들어갈 때 그냥 성당에 들어간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도 그냥 기도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왔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병 환자처럼 겸손한 동작을 취할 것입니다. 제가 저희 수련자들에게 가끔 불만인 것이 성당에 들어와 털썩 앉는 겁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환자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겠지요.
이렇게 나아온 나환자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이 동작 하나에 나환자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모든 응답이 들어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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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부활의 삶!'>
오늘 복음(마르1,40-45)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병은 '피부병'입니다. 그리고 나병은 '소외병'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그러자 바로 그의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이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며 함구령를 내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그런데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단단히 이르신 함구령을 지키지 못하고, 나병이 치유된 기적 사화를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참기적, 참부활'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함구령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기적 사화'입니다. 이 사화는 '부활사화'입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부활로 나아간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부활의 삶, 곧 죽음의 상태를 이겨내고 부활로 나아가는 삶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삶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부활의 삶을 위해 오늘도 제대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화답송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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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6iFv3lmE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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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 42)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절박하고
각별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오늘은
깨끗하게 되는
믿음의
오늘입니다.
믿음 자체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 믿음을
믿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이
있으면
한순간
내려놓는
깨끗한 순간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울수록
깨끗하여지는
은총입니다.
간절함 속에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간절함과
아픔 속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들
믿음입니다.
사람의 길을
걷게하시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자아가 사라진
순간이 어찌보면
깨끗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이며
아무 말이
필요없는
순간입니다.
참된 치유는
우리의 삶을
치유합니다.
치유된 삶은
모든 순간이
기적의 순간임을
알기에
부여잡거나
떠벌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건강한 아침을
맞이하는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과 치유
주님과 믿음은
하나이며
받아들임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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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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