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가락의 언어(言語)이다. 가장 원초적인 희로애락의 커뮤니케이션으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다. 노래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국가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다. 각국 원수들은 어떤 노래를 좋아할까. 아시아 전-현직 국가 원수들의 애창곡을 보도한 외신을 보니 미국의 흘러간 팝송이 단연 인기였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Mahathir)와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애창하고, 필리핀의 아로요는 카펜터스의 ‘난 너를 갖고 있어(I Have You)’를 잘 부른다고 한다. 일본의 고이즈미는 2006년 미국을 방문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까지 찾아가 ‘러브 미 텐더’를 부를 정도였고, 일찍이 1979년에 미국을 처음 방문했던 중국 덩샤오핑이 역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그후 장쩌민도 미국 클린턴을 만나 ‘러브 미 텐더’를 불렀다고 하니 외교를 위한 ‘립서비스’로 노래만한 것도 없는 모양이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Mahathir)총리
메가와티(Megawati)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사열하고 있다. 메가와티의 아버지다. 그는 그후 정적 수하르토에 의해 축출되고 말았다.
1965년 김일성과 메가와티
메가와티 수카르노 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김일성 전 북한 주석 간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는 40년전 사진이 한 재미교포에 의해 공개됐다. 문제의 사진은 지난 65년 4월 김일성 주석이 아들 김정일(당시 24세)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으로, 김일성(왼쪽 세번째)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인도네시아 전통의상 차림의 여성이 메가와티(당시 19세)로 추정된다. 오른쪽 끝의 남자는 당시 노동당 지도원 자격으로 부친을 수행했던 김정일인 것으로 보인다. 재미교포는 최근 북한 방문시 우연히 이 사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들은 좀 다르다. 외신이 보도한 김영삼과 김대중의 애창곡은 ‘선구자’였다. 어지간히도 노래를 즐기는 우리네 한국사람들인지라 역대 대통령들의 애창곡도 우리 언론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언론 보도를 보면 최규하는 노래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비 내리는 고모령’을 가끔 불렀고, 전두환은 애창곡인 ‘방랑시인 김삿갓’을 ‘…전삿갓’으로 바꿔 불러 자신의 백담사 생활을 자조적으로 풍자했다고 한다. 노태우는 ‘베사메무초’를 즐겨 불렀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은 ‘선구자’ 외에 각각 ‘메기의 추억’과 ‘목포의 눈물’을 곧잘 불렀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던 노무현의 애창곡은 의외로 ‘울고 넘는 박달재’였고, 그리고 이명박은 유심초의 ‘사랑이여’라고 한다. 한국 대통령들의 애창곡은 미국 편향적인 아시아 국가 원수들과 달리 대체로 ‘한국적’이다. 역대로 박정희만큼 술자리의 여흥을 노래로 즐긴 대통령도 없다. 술자리의 풍류는 국가경영의 고독한 정열로부터 해방된 큰 위안이고 윤활유 같은 것이었다. 그의 애창곡 ‘황성옛터’, ‘짝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역시 느릿한 가락에 애잔한 감정을 풍부히 삭이고 풀어내는 흘러간 노래들이다. 그는 ‘동백아가씨’ 같은 당시의 신곡도 좋아했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노래에는 ‘금지곡’이라는 그늘이 드리워 있다. 대표적인 금지곡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그래서 대중에게는 못듣게, 못부르게 하고 권력자는 멋대로 부른다며 이중성을 비난하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노래가 나온 지 얼마 안되어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금지곡 딱지가 붙어 1984년에야 해금이 되었으니 가수에게는 그만큼 한맺힌 노래도 없다. 금지곡이 된 이유에 대해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기에 애조 띤 노래가 국민교육상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는 신문기사도 있었지만, 대체로 한일국교 정상화의 시기와 겹치던 정치외교적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는 끽소리 못하니까 대통령이 죽은 후 “박정희가 왜색가요라며 금지곡을 남발했다”면서 그 이유를 한일회담이 저자세 외교로 비춰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또는 그 자신이 만주국 장교 출신이라는 ‘친일’의 약점을 지우기 위해서라고 말들을 했다. 한마디로 ‘동백아가씨’는 박정희가 금지시켰거나 적어도 박정희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지곡인 ‘동백아가씨’를 이미자가 청와대 만찬에서 부르는 동영상을 KBS가 1995년에 방송한 적이 있다. 1979년 5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일본총리의 방한을 기념하는 청와대 영빈관 만찬 장면이다.
“아니, 대통령이 금지곡을 즐기다니…….”
이런 소리가 당연히 나올 법했다. 대중에게는 듣지도 못하게 하면서 혼자 즐길 수 있는냐 하는 것이다. 이미자는 대통령이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인 줄 몰랐다는 말을 언론에 수차례 밝혔다.
한 기사를 보자.
“올해로 노래인생 40년째를 맞은 가수 이미자 씨(59)가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자신의 노래 ‘동백아가씨’와 고 박정희 대통령에 얽힌 비화를 공개했다. 이씨는 최근 녹화한 케이블TV Q채널의 대담프로 ‘김기평의 토크&토크’에 출연,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였던 시절 청와대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 노래를 직접 불렀다고 밝혔다. 이씨는 박대통령은 애창곡 ‘황성옛터’와 함께 ‘동백아가씨’를 가장 좋아했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동백아가씨’가 금지됐지만 대통령은 모르고 있었다며 일본 총리 등 외국 국빈이 올 때 청와대 만찬이 열리면 내가 많이 갔으며, 거기서 나는 ‘동백아가씨’를 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1999년 10월4일)
박정희가 자신의 ‘친일 논란’ 때문에 ‘동백아가씨’를 금지시켰다거나 금지곡을 알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즐겼다는 말들은 맞지 않는다. 박정희 시대는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의 세월이었다. 동네 확성기에서는 ‘새마을노래’, ‘잘살아 보세’ 같은 노래가 크게 울려퍼졌고, 라디오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힘찬 건전가요들이 꽤 흘러나왔다.
박정희 전대통령과 악수하는 ‘국민가수’ 이미자. 1965년 5월 31일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파월장병을 위문하고 돌아와 청와대를 예방했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박대통령 관련 사진 7만여매 중에서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희귀 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경제성장에 힘입어 대중문화가 활성화되면서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해 생맥주와 장발의 문화코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양희은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왜 불러’, ‘고래사냥’ 등이 사회의 건전 분위기를 해친다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으로 묶였고, 퇴폐 경향과 마약 등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록 음악의 대가(大家)로 불리는 신중현이란 사람이 있다. 대중문화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신식의 멋진 음악을 만드는 사람, 뭔가 남다른 음악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대중은 기억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72년 청와대 직원으로부터 “박대통령을 위한 노래를 만들라”는 전화를 받았고, 공화당 인사로부터 같은 내용의 전화를 또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군사독재를 증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와대와 공화당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였고, 해금이 되었을 때는 대중음악의 흐름이 바뀌어 그가 설 곳이 없었다는, 결국 박정희 때문에 자기 음악인생이 큰 상처를 받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전 청와대 비서관(김두영)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말했다. 첫째, 박대통령 시절의 ‘대통령 찬가’는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만들어져 이미 1972년부터 공개되고 있었다는 것, 둘째, 대통령을 위한 노래라면 정통 순수음악의 장르여야 하는데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하는 식의 록 음악풍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셋째, 설사 작곡을 부탁한다 해도 작곡가를 직접 만나 충분한 설명을 하는 것이 청와대의 관례이므로 전화를 걸어 억압적으로 의뢰하는 일은 없었으며, 넷째, 관련 부서인 청와대 공보비서실에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수소문해 봐도 그 일을 아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의 노래가 금지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기 위해 한국에 온 미국 히피들에게서 마리화나와 LSD라는 환각제를 소개받아 한동안 복용했고, 미국 히피들이 다량의 마리화나를 남겨놓고 돌아가 한국의 음악인들이 호기심으로 그의 집에 모여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 소지죄로 4개월을 복역했다고 말했다. 그의 노래가 왜 금지당했을까. 권위주의 시대의 문화 탄압일까 마약 때문일까. 양쪽에 다 걸쳐지는 사안일 수도 있다. 문화예술의 규제, 탄압과 저항은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마찰 과정이다. 먹고 사는 형편이 나아지니까 장발에 청바지, 미니스커트 등 새로운 문화 욕구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저항과 단속으로 표현되는 이런 마찰은 시일이 흐르면서 타협과 조화로 해소되는 과정을 거쳐 사회발전 양상으로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 시절 퇴폐적인 노래에다 마리화나 사건으로 쫓겨나다시피 고국을 떠난 가수 한대수가 있었다. 그는 히피족 같은 장발을 하고 미국에서 돌어와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며 자유와 평화에 목마른 가객(歌客)으로 다시 나타나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박 전대통령을 존경한다. 전반적으로 크게 봐서 좋아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핍박받았다. 하지만 음악을 못하게 한 것은 작은 문제이다. 먹고 입을 것이 없었던 시대에는 우선 잘 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30년 동안 작고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급성장한 예는 없었다. 엄청난 업적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내 노래 ‘물 좀 주소’보다 줄 물조차 없었던 가난 극복이 더 절실했다. 우리나라에는 기본적으로 영웅이 없다. 모든 위대한 인물은 나쁜 일도 많이 했지만, 그가 이루어낸 좋은 일의 영향력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도 영웅이 필요하다.”
(2005년 1월27일 CBS 김어준의 저공비행)
자기 하나쯤의 상처는 아랑곳없다는 듯 개인의 감정을 넘어 박정희 시대가 주는 역사적 의미와 평가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수십년 전에는 물론 대중문화의 규제가 심했다. 그러나 박정희 이후 노무현, 이명박까지 예나 지금이나 대중가요를 금지시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회적 규제는 여전하다. 예컨대 ‘나를 뜯어 먹어’라는 제목의 노래 같은 것은 대중의 정서를 해치기 때문에 금지로 묶고 있다는데 그런 일을 포함하여 방송의 잔인한 장면이나 막말을 걸러내도록 규제하는 일을 방송윤리위원회나 방송 매체 관련의 조직에서 해오고 있다. 한데 ‘동백아가씨’의 경우 금지곡 딱지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애절한 그리움의 너울은 도도히 흐르고 흘러 숱한 사람들이 금지곡인 줄도 모르고, 또는 금지곡임에도 아랑곳없이 가장 많이 부른 ‘국민가요’가 되었으니 말이다.
위의 청와대 비서관은 대통령과 금지곡 ‘동백아가씨’의 악의에 찬 소문에 대해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대통령이 뭐 할 일이 없어서 노래 한곡 금지하는데 관여한단 말인가. 실상을 너무 모르는 백면서생들의 탁상공론이다.”
동백아가씨는 1964년 이미자가 부른 대한민국의 트로트 곡이다. 발표 당시의 기록적인 인기와 함께 금지곡으로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사연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작곡자는 백영호, 작사자는 한산도이다. 1964년 제작된 엄앵란과 신성일 주연의 동명 영화에 주제곡으로 만들어져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했다. 당시 이미자는 '열아홉 순정'으로 이름을 알린 신인급 가수였는데, 이 곡이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어 '엘레지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미자의 수백 곡에 달하는 히트곡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인기를 누린 대표곡이 되었다.
영화 '동백아가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인연을 맺은 섬처녀가 버림받고 술집에서 일하게 된다는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내용이다. 동백아가씨라는 제목은 여주인공이 '동백빠아'에서 일하는 여급이 된데서 유래했다. 주제가 음반 뒷면에 첫 번째로 실린 이 노래의 가사는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칠 때까지 연인을 기다리는 여성 화자의 서글픈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여인의 깊은 한과 애상적인 느낌을 잘 표현한 이미자의 노래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100만장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며 공전의 인기를 끌었으나, 이후 노래가 일본풍이라는 이른바 왜색 시비와 함께 금지곡으로 전격 지정되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인데 대해서는 당시 일각의 반대 속에 강행된 한일기본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정치적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주류이다. 반공주의 시대였기에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의 빨갛다는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른 이미자는 경쟁 음반회사의 입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되어 20여년 만에 다시 공식적으로 부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던 동안에도 입에서 입으로 널리 불린 노래였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대통령 박정희는 생활 법도에 관한 한 그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다. 청와대는 쌀의 자급자족이 안되던 시기에 철저히 혼분식을 했고, 유류파동을 겪던 시기에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다. 그런 면에서 그는 지사적(志士的)인 자존심의 소유자였다.
(데일리안 2008.5.20)
박정희와 술
1970년부터 9년간 대통령경제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박진환씨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시버스 리걸이 나오는데 그것만 보면 우리는 얼굴이 환해져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어찌나 농민다웠던지 술상에선 예사로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었고 김을 밥숟갈에 척 붙여서 먹었으며 닭고기를 먹을 때도 손을 잡고 먹음직스럽게 뜯어 먹었다고 한다.
1958년 6월 말 당시 기자였던 Y씨는 1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송장군이 없어서, 참모장인 박정희 장군을 대신 만났다. 박장군은 Y씨를 맞아 '먼길에 오셨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면서 중국집에 가서 술대접을 했다. 둘은 배갈을 먹기 시작했다. 둘은 누가 술이 더 센가 시합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빈병을 나란히 눕혀가면서 마셔댔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빈병이 24개가 될 때까지 마셨다. Y씨는 이것이 박대통령이 생전에 세운 최고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이렇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참석한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줬다. 박대통령은 가끔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맥탁'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박대통령은 흘러간 옛노래인 '짝사랑(으악새)' 이나 '황성옛터'를 불렀다.
박대통령 주량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쓰러진 74년 이후부터는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술과 함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그가 들었던 마지막 잔은 막걸리와 함께 좋아하던 시버스 리걸이었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