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치 : 하남시 초이동 연 대 : 대한제국 고종 광무 8년(1904) 개수 크 기 : 전체 높이 300cm, 비신 192cm, 폭 69cm, 두께 36cm 찬서전 : 서거정 찬, 안침 서·전
묘역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들어가면 오른쪽 비각 속에 밀성군의 신도비가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밀성군의 부부 합장묘가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은 대형 봉분과 곡장 그리고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단에는 문인석과 장명등, 그리고 제일 하단에는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비록 규모와 석물의 아름다움 등 기교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틀에서는 왕릉의 무덤 조성 형태와 유사하다. 묘소는 뒤쪽으로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곡장이 있고, 앞으로는 혼이 머무는 공간인 혼유석과 무덤에 불을 밝혀 주는 장명등이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이 가운데 곡장은 현대에 와서 만들어졌으나 그 기단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묘역 조성 당시에도 곡장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장명등과 망주석은 현대에 만들어 세운 것이며, 혼유석과 문인석만이 당시의 석물이다. 고석(鼓石)이 바치고 있는 석상은 두 개가 붙어 있으며, 문인석은 장대한 체구로 4구가 서 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쪽에 있다. 신도비가 있는 비각에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본래의 비문과 1904년에 다시 세운 비문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본래의 비문은 최근 공사 중에 발견되었으나 많은 글자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면에서 고려 때의 신도비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통비 형태이며, 상륜부가 원형으로 남아있고, 이수부분이 조선시대 흔히 사용하는 용문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도비의 변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후 1904년에 세운 신도비는 오석(烏石)에 높이 192cm, 너비 68cm, 두께 36cm의 해서체로 쓰였다. 화려한 조각이나 문양이 없이 수수한 모습이며, 비문은 조선 초기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이 지은 것을 음각하였다. 밀성군은 1430년(세종 12)에서 1479년(성종 10)까지 살았던 인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의 12번째 아들이며 이름은 이침(李琛)이다. 어머니는 신빈김씨이며, 7살 때 밀성군에 봉해졌다. 전주이씨 왕족으로 도총관을 지낸 그는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집에 있는 종들이 허물이 있어도 꾸짖거나 화내지 않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홀로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여막살이를 하였다. 이에 그가 죽은 후 성종이 효성이 지극함을 인정하여 시호를 장효(章孝)라 하였는데, 정조 때 장릉의 휘호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하여 시호를 효희(孝僖)라고 바꾸었다. 밀성군 묘역은 조선 초기에 왕의 가족, 특히 대군(大君)이 아닌 군(君)에게도 봉분에 곡장을 두르고 각종 석물을 치장하여 묘역을 만들었다는 점, 고려시대 신도비의 건립 형태를 보여주는 통비 형식의 신도비가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 조선시대 신도비 윗부분, 즉 이수에 흔히 사용하는 용문양이 보이지 않고 있어 신도비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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