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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태어나 자란 동산마을 주변에는 허옇게 깔린 조개껍질뿐만 아니라 고인돌이 참 많았다. 청보리가 익어 가는 들판 한가운데에도 서너 개의 고인돌이 쉼터처럼 드러누워 있었고, 소를 먹이러 가는 야트막한 산 곳곳에도 네모 반듯한 고인돌이 마치 밥상처럼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 서너 개 드러누워 있는 고인돌은 진종일 논에서 일을 하던 마을어르신들이 틈틈이 이마의 땀을 식히거나 중참을 먹는 자리였으며, 야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은 우리 마을아이들이 소를 풀어놓고 소풀을 베다가 심심해지면 버찌와 오디를 따다가 가지런히 올려놓고 나눠먹던 자리였다. 그때 우리들은 정자나무 아래 놓인 평상처럼 널찍하고도 반듯한 그 돌이 고인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고인돌이 선사시대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며, 고인돌 아래에는 그 사람들이 묻혀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무도 그 고인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앞산가새 공동묘지는 몹시 무서워했지만.
가시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또래 가시나들은 우리들이 도랑가 둑 근처에서 소풀을 베고 있을 때 그 고인돌 근처로 몰려들었다. 가시나들은 고인돌 위에 빛이 반짝반짝 나는 조개껍데기를 반찬그릇처럼 올려놓고, 고인돌 곳곳에 동그랗게 홈이 패인 곳에 쑥과 냉이를 찧으며 소꿉놀이를 했다. 당시 우리 마을 곳곳에 드러누워 있었던 고인돌들은 우리 마을어르신들의 좋은 쉼터이자 우리 마을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또한 비음산에서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하늘 한가운데 오색 빛깔의 달무리가 예쁘게 지는 밤이 되면 여우 서너 마리가 그 고인돌 위에 올라가 밤새워 '우워~ 우워우워~' 울기도 했다. 철쭉이 피처럼 마구 피어나고 있던 4월 말, 나 홀로 까까머리 중학시절의 여러 가지 재미난 기억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걸어 찾아간 모교 남중학교(당시에는 남면중학교라 불렀다) 안에 있는 창원 외동지석묘도 내가 어릴 때 놀이터로 삼았던 그 고인돌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아니, 그 고인돌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남중학교에 있는 이 고인돌은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 고인돌처럼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고인돌이 원래 있었던 자리는 남중학교의 널찍한 저 운동장 어디쯤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학교 운동장을 만들면서 이 고인돌도 탯줄을 묻은 땅을 빼앗기고 지금의 자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창원공단 조성으로 우리 마을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에서 하루 아침에 쫓겨난 것처럼 그렇게. 그리하여 깡그리 사라진 고향 근처, 지금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길거리에 주저앉아 야채를 팔아 근근히 의식주를 해결하며 점점 늙고 병들어가고 있는 우리 마을어르신들처럼 그렇게. 고인돌, 그러니까 지석묘는 선사시대에 속하는 청동기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 계급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지석묘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석묘는 남방식(南方式)과 기반식(基盤式)으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남방식(탁자식)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땅 위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큼직하고도 납작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을 말하며, 기반식(바둑판식)은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납작한 덮개돌을 들어올린 것이다. 창원시 외동 357-13번지 남중학교 안에 남아있는 창원 외동지석묘는 기반식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약 2.8m, 두께는 1.2m, 받침돌의 길이는 0.88∼0.9m 정도이다. 그리고 덮개돌에는 6개의 작은 알구멍(性穴, 성혈)이 뚫려있는데, 이것은 풍년을 기원하거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지석묘는 1929년 처음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땅 속에 막돌로 쌓아 만든 돌덧널(석곽, 石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돌덧널 안에서는 선사시대 조상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돌칼, 돌화살촉, 붉은 토기 등 20여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지금 그 유물들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외동지석묘는 1929년 웅남소학교(熊南小學敎, 지금의 남중학교)를 세울 때 학교 주변에 흩어져 있는 여러 기의 지석묘와 함께 웅남소학교 교정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웅남소학교를 세울 때 거의 파괴되었으며, 그나마 몇 기 남아 있었던 것도 1952년 남중학교 교지 확장공사 때 모두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개발우선정책과 무지(無知)의 환상적인 결합이 빚어낸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까운 게 어디 이뿐이겠는가. 고인돌은 이곳 외동뿐만 아니라 내가 살던 고향 근처에도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그 고인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도 거무스레한 물이 고여 있는 저 상남천의 밑돌이 되어버렸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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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 한그루가 얄미워요 !!!
나무가 참 신기하게도 생겼네요
이게 학교에요??
학교에 고인돌이????
고인돌인가??
진짜 관리가 잘 된 나무 같네요..
여기가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