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사츠 온천2 - 도쿄 북쪽 군마현의 쿠사츠온천에서 일찍 일어나 마을을 구경하다!
어제 4월 12일 도쿄에서 벚꽃을 보았는데 우에노공원 과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 천초사)
그리고 지하철 구단시타역에 치도리가 후치 (千鳥ヶ淵 公園) 와 고라쿠엔 (後楽園)
후락원역의 도쿄돔과 묘가다니역 茗荷谷駅 에 분쿄 文京 (문경) 의 벚꽃 을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도쿄역 에서 16시 16분 니가타행 신칸센을 타고 타카사키 高崎(고기) 역에
도착해 18시 10분 JR 오처선 대전행 (吾妻線 大前行) 재래선 기차를 타고
나가노하라쿠사츠구치 長野原草津口 에 내려 19시 39분 JR 버스 로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20시 04분 쿠사츠 온센 草津溫泉(초진온천) 에 도착해 하룻밤을 잤습니다.
여행 10일째인 4월 13일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쿠사츠 온천마을을 구경 하는데
고도가 높은데다가 깊은 산속으로 4월 중순 인데도 온통 눈 천지
인데다가 바람이 매우 차가운데... 높은 산들로 둘러쌓인 고원이라
매년 4월달에도 비가 아닌 눈 이 내리니 5월 까지도 잔설 을 볼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호텔 앞에 자리한 온천수 원천 인 유바타케(湯畑 탕전) 는 물을 끌어 올려서는
길게 이어지는 나무통에서 보관 하는데 온천물이 너무 뜨거운지라 저 나무
통에서 좀 식혀서 온도가 좀 낮아지면 호텔이나 여관으로 보내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쿠사츠 온천 은 온천수가 강한 산성 이라 처음엔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나 1분 후면 정상이
되며 좀 뜨겁게 느껴지는데 공중탕 고사노유 御座之湯 는 요금이 600엔이라고 합니다.
쿠사츠관 목욕탕 과 온천수 백기원천 을 지나 쿠사츠산 광천사 를 절을 보려고
올라가는데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오늘이 4월 중순인데도 온통 눈 천지 입니다?
붉은 천에 흰색 글씨로 된 南武藥師如來(남무약사여래) 라는 깃발 이
펄럭이기에 쳐다보니 언덕에는 약사여래상 이 보이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천은 질병을 치료하는 곳 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사여래 는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신앙 의 대상이 되는 부처로 약사유리광여래
(藥師瑠璃光如來) 라고 하는데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 에 있으면서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 시키며, 부처의 원만행 (圓滿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 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 라고 합니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藥王) 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웠으니 그 대원은 ①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 이 가득하게 하려는 원, ② 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③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에...
④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大乘敎)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業)을 지어 삼취정계 (三聚淨戒)를 갖추게 하려는 원, ⑥ 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기관을 완전하게 하려는 원 ⑦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보리를 증득 하게 하려는 원, ⑧ 일체 여인으로 하여금 모두 남자 가 되게 하려는 원,
⑨ 천마(天魔)· 외도(外道)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知見) 으로
포섭하려는 원, ⑩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 부터 일체
중생을 구제 하려는 원, ⑪ 일체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⑫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갖게 하려는 원 등입니다.
이것이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이며,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고 또 한량없는 중생
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것이다. 이 십이대원 속에는 약사여래가 단순히 중생의
병고를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등의 의식주문제는 물론
사도나 외도에 빠진 자, 파계자, 범법자 등의 구제에 까지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십이대원 이외에도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 악귀를 물리쳐서 횡사를
면하고 싶은 자,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자들이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서 발원 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외적의 침입과 내란, 성수(星宿)의 괴변, 일월(日月)의 괴변, 때아닌 비바람, 가뭄,
질병의 유행 등 국가가 큰 재난에 처했을 때도 약사여래의 본원력 을 통하여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약사여래본원공덕경”에 근거하여 약사여래를
신봉하는 약사신앙 은 한국과 일본의 고대에서 뺄수 없는 중요한 신앙형태였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을 외우고 가호(加護)를 빌면 재액이 소멸되고 질병이 낫게 된다는 신앙 은
민중들 사이에서 설득력과 호소력 을 가졌으니 전쟁중 희생자와 병자를 냈던
상황 속에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 했던 것인데 왕이 병에 걸려 의약의
효험이 없었을 때 스님이“약사경”을 염송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고사 가 있습니다.
약사여래상 7구 를 조성해서 그 상 앞에 각기 49일 동안 7개의 등을 밝히고 5색 당번
(幢幡)을 49척쯤 되게 만들어 걸고 여러 종류의 중생을 방생 하면 여러 가지
질병의 위험을 면한다고 하는데, 국왕이 나라에 유행하는 질병이나 외적의 침입
등 재난이 있을 때도 위와 같이 행하면 재난이 소멸되고 국토가 평안 해진다고 합니다.
또 선남선녀가 약사여래상을 조석으로 모시어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면 장수하게
됨은 물론 부귀와 관위(官位) 를 얻게 된다고 하니 사찰에는 약사여래 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 (日光菩薩) 과 월광보살 (月光菩薩)을 모신
약사전(藥師殿) 을 부속시키고 있어 약사신앙의 통속성을 대변 하고 있습니다.
쿠사츠 마을 은 유명 관광지이다 보니 온천과 여관에 기념품 숍과 식당
그리고 군것질을 할수 있는 작은 가게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중에 가게 치치야 ちちや 의 흰색 온센 만쥬 가 맛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호텔 유바타케 소우안 湯畑草庵(탕세초암) 으로 돌아와서는 공중 온천탕 으로
들어가 온천욕 을 하고 나오는데 그 옆에 족욕탕 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1층으로 내려오니 테이블 위에 아침이 차려져 있기로 잘 먹고는 체크아웃을 한후
배낭을 메고 나오는데 버스를 타고 가루이자와 를 보고는 우에다 를 거쳐 나가노 를
구경하고 멀리 다카다 로 가서는 밤 벚꼿 축제인 하나 마쓰리 야자쿠라 를 볼 생각 입니다.
언덕길에서 문득 2차대전때 일본에 원자폭탄 이 투하되지 않았으면 일본은 미군과 본토
결전 을 했을 것이고 그럼 깊은 산속 마을 쿠사츠온천은 도쿄 결전 전투에서 부상 을
당한 병사들이 후송되어 와서 치료와 요양을 하는 동네 로 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본은 원자폭탄 두발을 맞고 항복했으며 미군이 일본 각지에 주둔 하는 중에
1950년에 한국 전쟁 이 발발하니 주일 미군 이 신속하게 한국으로 보내져서 6.25
발발 불과 1주일 만에 미군은 북한군과 경기도 오산 전투 를 벌이는데 역사학자
임용한 씨는 D 일보 ‘임용한의 전쟁史’ 칼럼에 “미군의 패배” 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중국은 6·25전쟁에서 자신들이 세계 최강의 미군에 승리했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세계 최강 미군을 웃음거리로 만든 군대는 북한군이 먼저 였다. 한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미군은 일본에 주둔하던 주일미군 이었다. 목적은 경찰 임무이며 미군이 한국에
왔다고 하는 순간 전쟁은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렇게 듣거나 믿었다."
"하지만 주일미군은 전 세계의 미군 중에서도 장교에서 부터 병사까지 군기가 제일 엉망
이었고, 훈련도 형편없었다. 야전 상황에 풀어놓고 보니 소총 수리도 제대로 못하는
병사가 절반 이상이었다. 미군 병사들은 다리가 길어 한국의 거친 산악지형에 적응
하기 어렵다는 말이 오랫동안 돌았지만 진실은 훈련 부족으로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었다"
"미군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주일미군은 기동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1948년
주일미군사령관이 된 월턴 워커 는 이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부대
단위의 기동훈련을 지시했지만, 일본의 반발 과 미국의 소극적 태도 로 대대
단위의 훈련에 머물렀다. 이건 사람으로 치면 한손 운동, 무릎 운동만 하는 식이다."
"미군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동양의 작은 병사들 이 ‘겁 없이’
달려들었다. 미군은 연대가 무너지고 사단이 무너지고, 사단장 까지
포로가 되는 극도의 수치 를 당했다. 당시 북한군 기록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신들이 세계 최강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환호 했을 것이다."
"사실 세계 최강의 군대라는 명성 은 일본에 주둔 중이던 주일미군 병사 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 병사들은 제대해 본국에서 제2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훈련 없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
현대전이 아무리 하이테크 전쟁 이라 해도 첨단 무기와 장비가 승리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둘째, 세계 최강에서 오합지졸로 전락하는데는 불과 5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임용한 씨는 같은 칼럼에 “나라 잃은 군인” 이라는 글도 썼으니....
"1944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뒤 로마를 향해 진군하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 에
직면한다. 이때 벌어진 혈전이 몬테카시노 전투 다. 2차 세계대전사에서 가장 크고
격렬했던 전투 중 하나다. 1월부터 5월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적인 성소
로서, 독일군마저 보호하려고 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폭격하면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려 네 차례나 대공세 를 편 후에 간신히 몬테카시노 점령에 성공했다. 연합군에는
미군, 영국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구르카 부대 까지 참전했지만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부대는 당시에는 나라를 잃은 군대 였던 폴란드군과 자유 프랑스군 이었다."
"2차 세계대전 내내 폴란드군 은 좋게 말하면 전투의 결정적인 국면에, 다르게 말하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국면에 투입되곤 했다. 노르망디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거의 자루 속에 가두었고, 독일군은 마지막 남은 탈출구로 거세게 달려 나갔다."
"압력과 저항이 대단한 자루의 끝을 묶는 임무에 투입된 부대가 바로 폴란드군 이었다.
그렇게 극렬하게 싸웠음에도 폴란드군은 이미 나라를 잃은 상태였기에 국제사회
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없었다. 이후 자신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
하지도 못했다. 생존한 폴란드군과 폴란드 국민은 종전 후에 더 큰 비극 을 겪게 된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투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 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투입되었다.
‘옥쇄(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죽음을 말함)’를 강요하는 일본군
의 교리에 따라 미군에 생포된 포로는 극히 적었다. 타라와에서는 겨우 145명
이었는데, 그중 128명이 조선인 이었다. 이때 투입된 조선인은 모두 1400명 이었다."
"일본 군인 중에도 조선인 병사 들이 있었다. 미군은 조선의 사정을 알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해서 수용 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청년 중에는 미군에 입대
해서 일본과 싸우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미군은 제네바 협약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조선인 부대를 편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으면 싸울 수도 없다.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싸워도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3·1절의 계절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그런데....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 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에 들어가자 미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모두 강제수용소 로 보내졌으니... 그 수가 무려 12만명 이다.
미국은 1.2차 대전에서 독일과 전쟁했음에도 독일계 미국인을 수용소에 가두지는 않았다?
3년간 구금 중에 그들의 집과 재산은 이웃에 살던 미국인들에게 약탈당했지만 재무장관
보고에 루즈벨트 대통령 은“ 나는 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라고 일축합니다.
"1945년초 미국전역에 10개 수용소에 감금된 일본계 미국인 들은 3분지 2가 미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 인데 병력 자원이 부족해지자 1943년 1월 28일, 육군 장관
Stimson 는 미국 군대에서 재미 일본인 2세 자원병 을 받는다고 발표했을 때
2만명이 자원 했고 제442 보병대와 제100 보병대의 용맹은 유럽에서 전설적 이었다."
"일본계 부대 중 가장 유명한 제442 보병대 3천명 은 이탈리아에 출정해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3,000개의 퍼플 하트 훈장 과 500개의 청동 무공
훈장, 810개의 청동 성장, 47개의 수훈 십자 훈장, 그 외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전 해에 하와이에 거주하는 일본인 천여명으로 100대대 가 창설되어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지니 로마 점령을 위한 몬테카시노 전투 에서 일본인 대대는 60% 가 전사 하는데
잔여병력 650명 은 2차 전투에서 90% 가 전사 하자 60명만이 살아남아 442연대로 편입
되는데.... 다시 말하자면 하와이 거주 일본인 천명중에 940명이 전사 했다는 얘기입니다?
1944년 4월 21일 산토렌소 전투에서 442연대 3소대장 다니엘 이노우에 소위는 독일군 기관총
2대를 부수고 3번째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던지려다 총상으로 오른팔이 뭉개지자
왼손으로 오른손에 들린 수류탄을 낚아채 던져서 진지를 파괴해 의회 명예훈장을 수여합니다.
전무후무한 일본인 부대의 공훈 을 치하하기 위해 1946년 7월 15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
은 일본인 부대를 방문해 격려했으며 저 오른팔이 잘려나간 이노우에 소위 는
1958년 하와이주 의원을 거쳐 연방 상원 의원 에 당선되어 8선을 했는데....
하와이는 호놀룰루 국제공항을 "다니엘 이노우에 국제공항" 으로 명칭까지 바꾸었습니다.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용맹스럽게 싸운 이유 는, 국가에 충성을 보이면 강제수용된
가족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944년 말,
미국 대법원은 "정부가 배신행위에 대한 증거 없이 계속해서
태평양 연안의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수용하고 추방할 수 없다" 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이 돌아왔을 때는 자기 집에 보관해둔 많은 물건들이 도난당한 상태였고,
집과 농장, 가게 등은 California 백인들의 차지 가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아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일본인 2세 군인 들은 이발소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부
당했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후에 육군성의 홍보 활동으로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