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덕과 이어받는 덕.
박인서.2023/11/15
논어 2편 위언은 정치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법, 군자로 가추어야 할 것 등 여러가지를 말하지만 그중 단연코 가장 강조하는 것은 효이다. 웃어른과 부모를 향한 효를 당대 여러 정치인들과의 대화에서 강조하고 또한 설명한다. 헌데 항상 왜 효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얼마 안되었다 할 수도 있지만 옛날 한국은 2~3세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시대였다. 한 집에 적어도 4명 보통은 5~7명 정도는 모여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같이 살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일손이 많이 없어도 기술의 발전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빈도가 늘었으며 동시에 개인적인 사상이 발전하여 모여 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은 핵심 가족들 만이 모여 사는 핵가족 시대가 열였다. 이제 한집의 식구는 보통 4명 정도이며 적으면 3명에서 2명까지도 줄어든다. 하지만 이 핵가족 시대도 점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송길영 교수가 낸 ‘핵개인의 시대’는 핵가족의 시대가 끝나고 핵개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소개한다. 핵심이 개인이 되어 개인을 위한, 개인의 의한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점점 모든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할 수 있게 되고 기계의 발전으로 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정보력의 발전으로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컨텐츠가 다양해 진다. 동시에 개인이 최고라는 사상이 곧 진리로 받아 드려지니 가족을 이룰 필요도 없고, 타인 위해 자신을 희생할 필요도 없다.
가족은 구시대적인 구조를 띄우고 있다고 많은 사상가들이 비판한바 있다. 마르크스 레닌 주의가 그러하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러하다. 가족은 그토록 중요한 개인의 어떠한 자유도 없이 생겨난다. 부모도 자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자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족에게 기독교의 사상은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싸우지 말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미 이런 구조의 회의를 느꼈다. 자녀를 낳을지 말지 최소한의 선택지가 있는 부모 쪽에서 피임에 관한 수많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낙태라는 최후의 선택지도 마련해 놓는다. 또한 1980년 미국에서는 딩크족이라 하여 결혼은 하지만 아이를 두지 않고 서로 맞벌이를 하는 무자녀 기혼이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만들어 냈다.
아마 요즘 사람들이 유교 사상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한 이유도 불필요한 가족에 대한 공자의 효의 강조 때문도 있을 것이다. 공자는 어째서 개인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관계에 대한 덕을 강조했을까? 특히 정치에 대해는 효를 실천하는 것이 곧 정치하는 것이라 할 만큼(2.21) 연관을 지었을까? 당시 학문을 닦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정치로 이어졌다. 정치는 수많은 사람 앞에 설 수 있는 자리였고,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였다. 즉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는 꼭 필요한 수단이자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개인적인 꿈을 이루는 것을 어찌 효도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었을까?
위정 4장에서 좀 뜬금없게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설명한다. 15세에는 배움의 뜻을 두고 30세가 되어서는 자립했고, 40세에는 미혹되지 않았으며, 50에는 천명의 뜻을 알았고 60세에는 귀가 순해지고, 70세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가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정치과 군자를 말하는 장에서 갑자기 자기 개인의 일생을 설명한다. 이 일생에는 효를 실천했다는 말도 없고, 정치를 했다는 말도 없다. 공자는 자신의 삶이 군자의 삶이라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여기서 좀 다른 것이 보인다. 삶이 쌓여간다는 사실이다. 천하의 공자도 15세부터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삶이 쌓아지면서 몰랐던 것을 알고,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만약 공자가 80세, 90세까지 삶을 살았더라면 그는 더욱 많을 것을 알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90살까지 살아도 별다른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30살에 대부분의 것을 터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변화한다는 사실은 똑같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식물인간도 늙어가고 우리집에 와서 공부하는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도 더하기를 하다 벌써 곱셈을 풀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던 것을 잊기도 하고 할 수 있던 것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며 또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알게 된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많이 변화되는 것은 개인의 대한 생각 곧 덕일 것이다. 사람이 평생 하나의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다 하여도 정말 1초도 쉬지 않고 그 학문과 같이 생활하며 학문을 탐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은 항상 붙어있다. 1초도 쉬지 않고 붙어있기에 항상 탐구할 수 있고 저절로 탐구하게 된다. 그렇게 개인에 대해 생각하고 이따금씩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개인은 그 어떤 것보다 많이 변하게 되고 쌓아져 간다.
여러 사람들, 특히 젊은 이들은 단편적인 것을 보고 사람 판단하기를 좋아한다(나도 그러하다). 나는 가끔 어떤 노인이 자신이 보기에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통화한다면 조용히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하고 있는 자신보다 그 노인을 낮게 본다. 또한 공자가 거기에 대고 공경하고 효하라고 한다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모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들린다면 큰소리 치며 싸우거나 그대로 무시한다. 내가 한 생각이 있는데 그것을 부모님에게 무시당한다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을 입으로, 속으로 욕한다. 공자가 여기에 대고 공경하고 효도하라고 한다면 이 또한 잔소리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웃어른과 부모님의 인생은 나보다 훨씬 많이 쌓여있다. 공자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배움에 뜻을 두고 있는데 부모님은 슬슬 하고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을 만큼의 인생을 쌓았다. 그렇게 오랬 동안 쌓인 인생을 인정하기는 커녕 단편적인 사건으로 판단한다. 60년 동안 인생을 쌓은 사람의 이야기는 120년 들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30살은 한번 살지면 그 30살의 날들은 평생에 걸려 복기하며 후회하고, 참고한다. 그렇게 나보다 인생을 쌓은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복된 일이고,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서 공경하고 모시는 것은 귀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헌데 공자는 그중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장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위정 23장에서 공자는 나라에서 나라로 예를 이어받기에 백 왕조 후의 일도 알 수 있다 하였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분명 부모의 예, 부모가 쌓은 그 인생은 자녀에게 이어진다.
나는 꽤나 자유롭게 살고 있다 생각하였다. 부모님이 정해준 길도 없고, 부모님이 간 길에서도 많이 멀다고 느꼈다. 하지만 가끔씩 교회에서 아버지를 아는 분들을 만나면 곧바로 나를 아들로 알아본다. 가끔씩 교회에 책과 카메라를 들고 가고, 학생회장을 하는 모습이 닮았다 하시더라.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던 것이다. 또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에 뒤에 짐을 옮기지 못해 곤란해하는 분을 보고 도와드려야 하나 생각하며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저기서 어떤 분이 짐을 들어 옮겨주니 어머니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것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처음 눈을 떠 보는 세상을 만든다. 아버지는 우주를 좋아하셔서 이따금씩 천문대를 데려가 밤하늘을 보여주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시선을 둘 곳이 없을 때는 하늘을 본다. 집에 책도 많이 쌓아져 있어서 곰팡이 책 곰팡이 냄새도 쉬지 않고 맡았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세상을 처음으로는 부모의 세상으로 본다. 그런 것은 전부 개인의 삶의 영향을 끼친다. 나는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집에 글이 많아 글을 보고, 음악이 들려 음악에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믿음이 있기에 교회를 다니고, 돈이 없어 반지하에서 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긍정적이만 한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간증한 청소년 중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항상 몸에는 멍이 있었고 문제 해결은 폭력으로 보였으며 또 그렇게 증오했던 아버지의 폭력 성향이 자신에게서 들어 나는 것을 보고 극도의 혐오감을 느낀 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쌓은 인생의 덕은 곧바로 자녀에게 이어진다. 이런 부모님을 곁에 두고 모시는 효도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를 닮은 부모님이 쌓아 온 길은 내가 앞으로 쌓아갈 길과 닮아 있을 것이다. 스승이 되기 위한 첫번째 단계도 효도라고 공자는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옛것을 익히고…).
그렇다고 부모의 모든 것을 배울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부모는 둘로 나뉘니 육의 부모와 영의 부모이다. 육의 부모는 분명 한계가 있고 배우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유전 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 노력으로 이겨야 할 것이 분명 있다. 한 청소년의 간증처럼 육의 부모는 인간이기에 완벽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를 효도로만 대할 수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이다. 이런 부분에서 사람들은 유교사상을 꽉 막힌 사상이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의 부모는 완전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기독교 사상도 꽉 막힌 사상이라 불린다. 너무 완전하고 완벽하기에, 애초에 육체도 없는 우리와 너무 동떨어진 것이기에. 그렇기에 영의 부모는 육의 부모가 되기 위해 내려오셨으니 이는 신의 은혜의 의인화라 해도 문제없다. 육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영의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했으니 이 짦은 인생에서 육의 부모를 공경하는 시선을 익히고, 효도하는 법을 연습하고 그후 닮아야 할 점 밖에 없는 영의 부모에게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구나. 연습의 허들이 이처럼 높은데 실천은 어찌 해야 할지. 이 글을 부모님이 읽을까 두려운 이 마음도 효도와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못 먹어도 고! 공자의 말씀처럼 먼저 실천하고 나서 이 글을 다시 읽을 날이 오기를(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