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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서울시 시우회에서 발간한 [시우문학]제7호에 게재된 여행기를 광진문우들께 전달하오니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韓 吉 洙
江陵地方의 歷史와 文化
-광진구 시우회 운영위원들 역사탐방-
서울시와 그 산하기관 그리고 각 구청에서 시민의 생활안정과 복리증진을 위한 행정을 펼치다가 퇴임한 직원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서울시 시우회 산하 광진구회 운영위원들이 2015년도 상반기 행사로 양평군에 있는 사회복지시설인 <창인원>을 들러 원생들을 격려한 뒤에 강릉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탐방하는 행사를 가진 바 있다. 2015, 5, 26 08시 옛 방지거 병원 앞을 출발한 버스에 20여명의 회원이 승차하였다. 위원들에게 불초 내가 지은 낙수첩 제5집 [가슴에 흐르는 강]을 1권씩 나누어 주고 책의 내용을 간추려 설명하였다. 우리는 양평시내 초입에 있는 쇠 양을 듬뿍 넣어주는 푸짐한 음식점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도착한곳은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1만여 평의 부지에 자리 잡은 사회복지법인 <昌仁院>이었다. 1991년에 설립된 이곳에는 394명의 원생을 209명의 직원이 보살피고 있었다. 이곳은 대표이사에 이경학 씨, 상임이사는 이용근 교육학박사가 맡아서 <사랑의 실천>이라는 이념으로 요양원, 재활원, 창인 홈, 직업재활원, 주간 보호시설, 단기 보호시설 외에 학교(유치, 초등, 중등, 고등부)까지 운영하고 있는 종합 복지시설이었다. 지난 4월 이곳 잔디광장에서 연예인들의 재능기부로 이루어진 “봄날은 간다”라는 음악회의 장면을 촬영한 영상물을 보고난 뒤 상임이사 이용근 박사로 부터 시설에 대한 현황 설명을 들었다. 그 뒤에 이동직 회장이 이용근 상임이사에게 우리가 준비 해 가지고 간 아이들이 선호하는 초코파이 상자와 학용품, 생활용품을 전달하는 절차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뒤에 내가 준비한 [가슴에 흐르는 강]을 원생들의 교재로 활용하라며 전달했다. 이곳을 출발하여 한참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이인호 사무국장에게 전화가 왔다. 일행 중에 2사람이 신발을 놓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 아 내 신발”을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들은 시설 내 전 공간을 실내화로 다녔는데 마지막에 신발을 바꿔 신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냥 슬리퍼를 신은 채 나온 해프닝이 있었으니 이는 나이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이 심심할 까봐서 점하나를 찍은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양덕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주변에 모내기하는 현장을 보면서 대관령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었다. 때는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그 중에서도 서열 맨 앞을 차지하는 5월의 신록! 갓난아이의 손바닥 같은 신록!, 한번 얼굴에 대보면 낭낭 18세 아리따운 소녀의 손길인 양 부드러운 감촉, 그 연두색 같은 신록이 길 양편을 장식하였으니 오늘은 눈이 호강하는 날이고 덤으로 마음까지 싱그러워지는 날이다. 속사를 지나자 평창 동계올림픽을 대비하는 철도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어 국토가 활력이 넘치는데 지금부터 2018년의 역동적인 환호성이 들리는 듯하다. 엣날부터 구절양장으로 쉬며 가며 넘던 아흔 아홉 고개 대관령, 이제는 터널을 뚫었기에 넘는 힘은 덜었으나 스릴이 없어져서 맛이 밋밋한데 申師任堂이 한양으로 가는 길에 대관령 정상에 이르러 가마를 쉬게 한 뒤에 가마에서 내려와 자신이 자란 강릉 옛 정겨운 보금자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효의 달>인 5월에 음미하는 것도 뜻이 있을 것 같아서 여기에 옮겨 본다. [대관령을 넘으면서] 鶴髮慈親在臨瀛 (학발자친재임영) 늙으신 어머님을 강릉에 두고身向獨去長安情 (신향독거장안정) 이 몸 혼자 서울로 떠나는 마음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돌아보니 고향은 아득도 한데白雲飛下暮山情 (백운비하모산정) 흰 구름만 날고 정든 산은 저무네. 師任堂 申氏 부모님을 고향에 두고 떠나오는 심정을 나타낸 간절한 名文章이다. 낭원대사가 머물렀다는 보현사를 비끼고 삼왕 묘를 지나니 마침내 강릉 땅이다. 강릉은 1041.6km2의 면적에 1읍 7면 13개 행정 동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인구는 2012년 기준 21만 9천 명이 사는 영동 제1의 도시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가 숨 쉬는 고장이다. 이곳은 토성 터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예로부터 濊(예)족이 살았던 곳으로 서기 30년에 한나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서 東濊라는 새로운 자치국이 있었다. 그 뒤로 하슬라라는 하나의 城邑國家 또는 邑落國家가 형성되었다. 하슬라 지역은 고구려에서는 남쪽으로 쳐내려오는 길목이요, 신라 입장에서는 북방으로 진격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는데 639년(선덕여왕 6)에 하소서경으로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명주라고 명명되었다. 명주는 진성여왕 때에 궁예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그의 지지기반이었으나 그 후 궁예가 축출되자 명주는 936년(태조 19) 東原京이 되었다가 통일된 940년(고려태조 23)에는 다시 명주로 환원되었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는 강릉부를 江陵大都護府로 승격하고 臨瀛(임영)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강릉대도호부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전국이 8개의 도로 나뉘면서 강릉과 원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강원도라 했는데 그 소속이 된 강릉이다. 1931년 강릉면이 읍으로 승격된 뒤 1955년 9월 1일 강릉읍과 경포면, 성덕면이 병합되어 강릉시로 승격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강릉시와 명주군이 합하여 통합 강릉시가 되었다. 강릉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예향이요, 문향이며 선비의 고장일 뿐 아니라 선대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꽃핀 지역이미지로 다가온다. 강릉에는 우선 문인으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있고 허난설헌과 허균 등이 떠오르며 오죽헌과 초당, 경포대, 강릉 객사와 단오놀이가 생각나는 고장이다.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내에 보관되어 있는 석불여래입상과 옥천동 석탑재료는 각각 문화재자료 제3호와 제4호로 지정되었고 성산면 보광리 명주군왕릉은 지방기념물 제12호, 굴산사 터는 사적 제448호, 굴산사 터 당간지주는 보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 서원으로는 五峰書院(오봉서원)과 松潭書院(송담서원)이 있다. 우리가 맨 먼저 도착한곳은 오죽헌이다. 보물 제65호인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 관련된 강릉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이 곳 夢龍室에서 율곡 李珥선생이 태어났다.경내에는 오죽헌 외에 율곡의 영정을 모신 文成祠와 사랑채, 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하였던 벼루(용연)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 소장각이다. 한편 율곡기념관은 율곡의 저서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롯하여 매창· 옥산 이우 등 율곡 일가의 유품을 전시한 곳이다. 한편 오죽헌 주변 일대에는 검은 대인 오죽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명물대밭이 있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선교장이다. 이곳은 강원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다리로 건너다녔다고 해서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선교장은 조선 영조 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번창하여 지금까지 생활을 하면서 보존하고 있다. 만석꾼의 부호였던 선교장은 선대로부터 손님접대에 후하여 아낌이 없었고 특히 금강산이나 관동8경을 유람하는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아니했는데도 문을 열어놓고 접대하는 큰 공덕을 쌓은 가문이다. 총건평 1,051.24㎡(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 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 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活來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 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품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선교장의 사랑채를 열화당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이곳에는 1700년 이전에 지은 안채와 종손이 전용하는 사랑채인 열화당이 있고 안채와 연결된 별당 건물인 동 별당과 活來亭이 있다.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의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시 한수를 짓고 읊고 명필을 휘두르기도 한 곳이다.이 외에 서 별당이 있고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곡식 저장창고이었으나 개화기 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東進學校가 있었다는 곳이다. 선교장에서 3.1운동 기념탑과 김시습기념관을 지나면 경포대가 자리하고 있다.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강원도의 한 관리였던 박숙정이 당시 방해정 뒷산 인월사 옛터에 세웠던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에 강릉부사 한 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그 후에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앞면 5칸· 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모두 4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다. 누 이름인 경포대라는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그런데 [第一江山] 이라는 현판의 第一과 江山이라는 글씨는 필자가 다르다고 한다. 경포대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 시'와 율곡 이이가 10세에 지었다는 '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조하망의 상량문 등 수많은 명사와 시인묵객의 글이 게시돼 있다. 누각 주위에는 현란한 벚꽃과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 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경포대와 주변호수는 1981년 강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나도 있소” 하고 경포호가 명험을 내민다. 경포호의 면적은 1.064㎢, 호수둘레 5.21㎞, 평균 수심은 약 0.96m인데 호수 내에는 紅粧巖(홍장암)과 鳥巖(조암)이 있다. 경포호는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紅粧古事(홍장고사)를 헌사 타 하리로다” 하고 읊을 정도로, 바다와 호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호수인데 기생 홍장과의 로맨스를 안고 있는 호수이다. 수면이 거울처럼 맑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鏡浦湖는 빼어난 경치 못지않게 풍류나 전설도 풍성하다. 장자 못 전설도 그중 하나인데, 그 증거로 해변 식당가에서 찌개거리로 쓰이는 ‘때 복이’라는 민물조개는 수몰되기 전 부잣집 곳간에 쌓아 둔 곡식이 변한 것이라는 설화가 있다.멀리 대관령이 보이는 경포호는 바다와 호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명승지이다 보니 강릉의 名妓에 얽힌 스캔들도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달 밝은 밤이면 이 호수 주변에 네 개의 달이 뜬다는 속설도 있다. 그 것은 하늘에 뜬 달, 바다에 뜬 달, 호수에 뜬 달, 그리고 술잔에 뜬 달이라 한다. 연인의 눈에 뜨는 달을 합하면 다섯 개의 달이 되니 달 천지다. 그러고 보니 月世界인가. 경포호에 넋을 빼앗기다 보니 14시가 지났다. 앞에는 동해바다요, 뒤에는 경포호수가 밀어주는 솔밭가의 식당에서 사무국장 이인호 며느리가 시아버지께 드리려고 일본에서 사온 사께와 김광수 위원의 벌떡 주에 오디술까지 다양한 술이 있는데 우리들도 운치 있게 마셔야겠다. 멀리 신사임당이 부모를 생각하여 눈물 흘리며 시를 썼다는 대관령을 바라보며 1배, 뒤로 돌아서 동쪽의 망망대해를 건너 일본 놈들을 응징하며 1배, 다시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 경포호수에 감춰진 선인들의 멋있는 情話를 생각하며 1배, 이번에는 다시 동쪽으로 돌려 선남선녀들의 로맨스가 꽃피웠던 백사장을 바라보며 1배, 그 다음에는 사시사철 변치 않는 우리의 기상, 청청한 소나무를 위하여 1배, 이렇게 다섯 잔을 마시니 얼얼하게 기별이 오기 시작한다. 우리 광진구 시우들의 건강을 위해서 한잔 더 들까보다. 이렇게 우리도 부어라 마셔라 시를 짓던 한량들의 운치를 떠 올리며 뜻있는 점심식사를 마쳤다. 이곳 강릉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기가 흐르는 문향이요, 예향인데 갈지(之)자로 걸어가는 우리 입에서도 저절로 시 한 수가 읊어지는 山水와 소나무와 바다 등 분위기가 잘 갖춰진 곳이다. 다음에 도착 한곳은 초당동에 있는 연화부수형의 명당에 자리한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가이다. 강릉 바닷가 사천과 이어진 교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교산 허균과 난설헌 초희는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지닌 오누이 문인이다. 매천 황현은 이 두 사람과 허봉을 가리켜 “초당 가문에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제일의 신선제주는 경변에 속하였네”라고 讚國朝諸家詩(찬 국조제가시)에서 칭송하였다는데 특히 그중 난설헌의 글재주가 가장 돋보여 신선제주를 닮았다고 하였다. 난설헌은 아버지 許曄허엽)과 큰 오라버니 許筬(허성), 許葑(허봉), 許筠(허균)과 함께 허씨 5문장가를 이루어 글 잘 짓고 학문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가문에서 자라며 아름다운 동해와 경포호등 주변경관을 탐승하면서 시를 읊고 문장을 다듬으며 살았다. 조선시대 예조참판을 지낸 허엽의 장인 김광철은 자신의 손자를 보려고 벼르던 애월당에서 외손자 허균이 태어났는데 애월당의 뒷산이 이무기형국의 산(蛟山)인지라 그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하면서 좋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허균의 호가 교산이다. 1563년인 명종18년에 태어난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 ~ 1589년)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겸 화가이다. 본명은 楚姬(초희)로, 호는 蘭雪軒이며 본관은 서울 陽川이다. 서얼 출신의 한학자 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부인에게 주눅이 들었는지 질투와 시기로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난설헌은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허난설헌은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남편은 물론 시댁과도 불화 중에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 많은 한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때의 심정을 읊은 시가 있어 옮겨본다. 지난해 귀여운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강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 비치네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 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멘다. 난설헌의 시는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許筠이 명나라에서 문집을 출간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貞夫人으로 추증되었는데 27세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여 묘소는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가는 길가 왼쪽에 있다. 누님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朱之蕃에게 전하여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됨으로서 널리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류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가 지은 시에 대한 작품성과 예술성만은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났으나 시집과의 불화, 남편과의 갈등, 아이를 둘이나 앞세우고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유산 하는 등 연속되는 불행 속에 짧은 생을 마감한 난설헌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 한 수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짐은 비단 필자 혼자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시의 앞 구절 생략)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단 배 매어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만 부럽게 보았다오. 다음은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 도착했다. 임영관 官衙는 강원도 강릉 읍성 내에 있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1994년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 임영관은 1993~1994년 발굴조사 결과 客舍인 임영관의 유구가 확인되어 사적지로 지정한 뒤에 주변의 관아 터를 추가 지정하였고 2006년 객사 건물이 복원되면서 2011년에는 江陵 臨瀛館(강릉 임영관)이라 불렀다. 현재 구역 내에는 객사를 비롯하여 지방관의 집무처인 東軒과 아문 그리고 의운루 등이 복원되었고 조선조에서 호구, 부과, 농사, 송사, 군정 등을 취급하던 관서 건물로 순조 24년(1824년)에 개조한 16간의 옛 관청 건물인 칠사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운 83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허물어지고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배흘림기둥이 있는 건물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으려고 사전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은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리인지라 잘 보존하고 있다. 강릉시 내곡동 소재 신복사 터에는 보물 제87호로 높이 4.55M인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안정감과 중후한 멋을 느끼게 하며 그 앞에 탑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석불좌상은 세련되고 풍만한 조각으로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유물이다. 높이 1.65M로 보물 84호인 보살은 원통형의 관을 쓰고 그 위에 다시 팔각 지붕돌을 이고 있는 독특한 형상이다.이곳의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강릉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탑과 석불좌상이 어우러진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월정사와 한송사 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신복사는 문성왕 12년(850)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후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범일국사는 고향인 강릉 지방에 신복사와 굴산사를 창건하여 강릉 땅과는 인연이 매우 깊은 인물로 보현사의 낭원대사도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한다. 범일국사에 대한 이야기는 굴산사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강릉시 구정면에 있는 崛山寺址(굴산사지)는 통일신라 말기에 통효대사 범일이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 중 9개 파가 두드러졌는데 이곳이 9산선문중의 하나인 사굴산문 굴산사파의 본산이다. 범일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굴산사에서 40년을 오로지 불법을 공부하고 전파시키는데 만 힘썼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절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절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다만 절터 주변에 널려있는 유적과 유물을 살펴볼 때 그 범위가 매우 크고 넓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옛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幢竿支柱와 범일국사의 사리탑이라 전해지는 부도, 돌부처 상 3구 및 많은 기와 조각들이 널려 있다. 석천이라는 우물은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범일국사를 잉태하게 한 우물로 전한다. 옛날 이 마을에 양가집 처녀가 살았는데, 하루는 물을 길러가서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가 바가지에 담기는 것이었다. 물을 쏟아내고 다시 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이상하게 바가지에 해가 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처녀는 배가 불러오고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범일국사라고 하는데 그 일화가 삼국유사의 조당집과 <임영지> 등 강릉지역 향토지에 전하고 있다 학 바위는 강릉단오제에 주신으로 받드는 범일(810∼889)이 아비 없는 아이라고 버려졌던 곳이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머리를 들 수 없는 수치로 여긴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엄마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학 바위에 버렸다. 며칠 후 궁금하여 어미가 학 바위를 찾았더니 백학이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주고 새벽이 되자 아이 입에다 붉은 열매 같은 것을 넣어 주는 것을 목격했다.. 이를 본 엄마는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여기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기르게 되었다. 그 후 그 아이는 자라서 출가하여 승가 최고의 위치인 국사라는 칭호를 받았고 학산에 돌아와 굴산사를 열었다고 한다. 부도 탑이라고 하는 승탑은 승려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이다. 이곳의 승탑은 8각원당형의 기본 양식을 갖춘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사자를 돋을새김 한 8각의 지대석 위에 접시모양의 받침돌을 놓고 기단 부 아래에도 받침돌을 놓았는데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그런데 이 승탑은 굴산사를 창건한 통효대사 범일의 사리탑이라고 전한다. 당간지주는 당을 거는 깃대인 돌기둥이다. 사찰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거나 부처나 보살의 공덕을 기릴 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는데 그 일대가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는 표시 역할도 하였다. 이 당간지주는 굴산사 터에서 조금 떨어진 남쪽 언덕 들판에 세워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굴산사 터가 얼마나 넓은 공간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 5.4m이며, 서로 1m사이를 두고 마주 서 있다. 현재 밑 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 받침이나 기단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 당간지주는 거대한 석재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에 속한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와 우뚝 선 생동감으로 신라말기를 거쳐 고려 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힘찬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굴산사 절터에는 3구의 석불이 있는데 완전한 2구는 근처에 새로 지은 작은 암자인 굴산사에 모셔져 있고, 우물가에서 발견된 머리 부분이 없어진 1구도 이곳에 모셨다. 석물 3구는 모두 한손이 다른 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이는 비로자나불 삼존불을 모신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 하건데 강릉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으니 예향이요, 문향이며 선비의 고장이라는 것은 두말을 요치 않는다. 우리나라에 유통하는 화폐 중 제1단위가 큰 5만원 권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있고, 5천원권화폐의 전면에는 사임당의 아드님인 율곡 이이의 초상화가 있으며 뒷면에는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그려있으니 이것도 강릉의 명성에 하나의 보탬이 될 것이다.
2016년 서울시우문학 제7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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