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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사라진 전통문화가 많이 있다.
그런가하면 방치된 채 겨우 맥을 유지하는 전통문화도 여럿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당(神堂)이다.
신당에는 사직당(社稷堂)과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국가에서 제를 지낸 사직당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성황당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미신’이라는 서양종교적 관점과 산업화·과학화의 틈바구니에서 흔적이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창원은 본래 해양을 끼고 발달한 해안도시다.
해양의 매립과 낙동강 둑을 쌓아 만들어진 땅으로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신당은 마을의 안녕과 바다로 나간 가족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우리 선조들의 구복문화(求福文化)로 자리 잡았다.
어디 바닷가 마을에만 신당이 성행했을까?
백두대간의 높다란 령(嶺)에서도, 마을과 마을을 넘나드는 작은 고개에서도 성황당(서낭당)은 어김없이 자리잡고 있다.
정통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기 전부터 이어져온 신당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로 보존돼야만 할 것이다.
우연히 ‘뉴스프리존’의 기획연재를 접하고 어설프게 창원시 해안가 마을에 흩어져 있는 신당을 찾아 나섰다.
개발로 인해 사라져버린 신당이 있는가하면, 아무도 찾지 않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도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신당은 산업화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어릴 때 뛰어놀던 우리 고향의 당산과 포구나무는 지금 그대로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1)좌하: 수도신당, 2)좌상: 제포진신당, 3)중앙: 와성신당, 4)우상: 영길신당.
진해제포성지 좌측에 자리잡은 제포진신당과 웅천왜성이 있는 남산의 북쪽 와성마을에 자리잡은 와성신당.
창원시 진해구 웅천 ‘와성(臥城)신당’은 남문동 542-2번지에 위치한다.
‘와성신당’은 와성마을의 번영과 주민의 안녕을 비는 할매신을 모신 신당이었으나 현재는 제례도 지내지 않고 폐당(廢堂)되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전국부락제당조사질문지(全國部落祭堂調査質問紙)’에는 웅천초등학교 설창수(薛昌洙, 당시 40세)선생이 조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 신당의 위치는 마을 서쪽 산중턱에 동향으로 있으며, 2평 정도의 함석지붕이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신당 앞 3m에 기목나무(느티나무)가 있다고 했으나 지금 느티나무는 없다.
당시 신목(神木)의 높이는 10m, 둘레 1m였으며, 할매신당이며, 제주(祭主)는 부정 없고 온순한 사람을 1개월 전에 선출하고 제주는 외출, 출타를 금하고 매일 목욕하며 정성을 드린다.
제삿날은 음력 정월 3일 오전 1시~2시까지로 하고 제주와 무당이 함께 제를 지낸다.
상차림은 술(酒), 흰떡(白餠), 쌀밥(白飯), 나물, 과실(果實), 명태(明太) 등이다.
그리고 출어(出漁) 때나 마을 행사 및 중학교 입시 때 당상(堂上) 할매에게 기도를 드리는 상례(常例)가 있다. -
와성을 고유명으로 ‘의실(義室)’이라 했다고 한다.
웅천만 일대에 왜구가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을 때 부녀자를 납치하는 일이 잦았고, 이때 한 부인이 끝내 그들에게 저항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이 부인의 의절(義絶)을 기려 지어졌다는 민간어원설이 전한다.
왜구가 이곳을 떠날 때 건물들은 모두 불살랐지만 배를 접안하는 부두는 파괴하지 않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살았고, ‘와성(臥城)’이란 지명은 왜성(倭城)의 형태가 우리와 달리 각도가 비스듬하기 때문일 것.
와성마을 입구 동천5교에서 마을 뒷쪽으로 난 포장임도를 200여m 따르다보면 노폭이 좀 너른 지점이 나타난다.
50여m 전방 은행나무 여러그루가 보이고, 그 옆에 농막과 울타리쳐진 밭이 있다.
신당은 이 울타리쳐진 밭으로 들어가야만 찾을 수 있다. 문사이의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넣어...
울타리를 따라 20여m 들어가면 울타리 바깥으로 넝쿨식물을 덮어쓴 신당(▽)이 숨어 있다.
시멘트 담장안의 신당은 환삼넝쿨과 칡넝쿨로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고, 함석문은 녹슬어 있었으며, 일본식 기와를 얹었다고하나 유령집으로 변해 있었다.
제단 중앙엔 나무로 만든 검은 신위(神位)가 있고, 좌우에 촛대와 쓰다남은 초가 꽂혀 있었으며 단 아래에는 향로가 있었다.
검게 칠한 신위(神位)에는 아무런 글귀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맞춰 닫은 뒤 다시 끈으로 칭칭 동여맨 후 신당을 벗어났다.
차를 댄 곳에서 남문지구 아파트.
뒤돌아보면 우로 휘어지는 곡각지점에 은행나무가 보이고, 좌측 와성만에는 '남해제3고속지선'이 지나는 게 보인다.
그 뒤론 흰돌메공원에서 밤갓산 능선.
임도에서 내려서면 '동천5교' 다리.
동천5교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 웅천왜성(남산)입구(↖)와 주차장이 있다.
조금 들어가 웅천왜성(남산,제덕산) 올라가는 길을 확인한 뒤...
세스페데스 공원도 지난다.'세스페데스'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로 임란 때 왜군 종군신부로 조선에 입국하여 웅천성에서 활동하였다.
세스페데스 공원.
제포진신당은 제포성지 맞은 편에 있어...
맞은 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보았으나 찾을 수 없어 되내려왔다.차를 타고 반대편으로 돌아...
삼거리(서진테크 뒤편)에 차를 멈췄다.
삼거리에서 뒤돌아보자 전봇대 뒤 산으로 난 계단길이 보인다.
그 길로 오르자 금새 야트막한 정상부위에...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지키고 섰고...
새로 단장을 한 신당이 눈에 들어온다.
500년간 수군만호가 국태민안을 빌던 제포진신당(薺浦鎭神堂)이다.
제포진신당이 위치한 곳은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 548번지'로 마을 북편 제포진성의 정상부에 있는 북문지 옹성이 자리하는 곳이다.
1872 지방지도의 제포진지도(薺浦鎭地圖)에는 제포신당은 제포진의 부속건물로 나타난다.
안골진지도에도 역시 부속건물로 신당(神堂)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제포진과 안골진의 신당은 진성(鎭城)의 수장인 만호(萬戶)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던 신당일 것으로 추정된다.
제포진신당은 1907년 8월 조선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만호가 제례를 올리며 유지했던 곳이다.
조선수군이 떠나자 자연스레 주민들이 신당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했고, 음력 섣달그믐에 제례를 올리며 명맥을 유지해 왔다.
신당의 뒤쪽에는 200년 넘은 신목 한 그루(푸조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신당의 주위로 150년 정도 되는 곰솔이 신당을 호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60년 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신당 앞이 허함을 알고 앞쪽에 느티나무 여러 그루를 심어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했다.
마을 주민들이 신당에 제례를 올리다 보니 자연 조상신인(祖山神)인 안씨 할머니를 봉안했고, 제단(祭壇)인 국수당은 할아버지를 봉안했다.
지금은 마을 제례는 지내지 않고 있다.
'제포진신위(薺浦鎭神位)'. 제포진신당은 아주 잘 관리되고 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제당조사질문지(祭堂調査質問紙)'에는 웅천초등학교에서 근무한 이만수(李萬洙 당시 30세)씨가 조사한 내용이 담겨있다.
- 제덕신당(薺德神堂)은 마을 북쪽 뒤산의 정상부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3평 정도의 작은 함석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길이 1m정도의 목조판만 있고 제단祭壇은 없다.
신은 ‘당산할매’라 부르고 제관은 당산주(堂山主)라 하여 마을의 50대 이상의 부부 중에서 부정 없는 사람을 선출한다.
당산주는 강물에 3일간 목욕하고 선출된 부부는 별거 생활을 하며 부정한 것은 보지도 않고 접근도 하지 않는다.
마을의 임산부는 가출을 금한다.
제례 후에는 정월에 농악놀이를 한다.
제례일은 음력 8월 15일, 1월 1일 새벽 1시~2시 사이에 행한다.
제물로는 술酒, 흰떡白餠, 과실, 과자 등이고 밥은 현지에서 지어서 쓴다.
비용은 임산부 집과 상가집을 뺀 나머지 각 집에서 현금으로 할당한다. -
제포진신당의 담벼락에 붙은 제포진당 안내판과...
주의사항.
신당을 벗어나 올라온 길로 되내려간다.
100여m도 안되는 지점에 삼거리.
삼거리로 내려와 올려다보는 계단.
내킨 김에 '창원시 진해구 수도동 산82'에 있는 웅천 수도(水島)마을의 신당이 있는 당산(堂山)으로 간다.
이제 수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다.
길가에 차들이 줄지어 섰고, 텐트가 보여 둑 위로 올라와 보았다. 웅천만 깊숙이 괴정마을에 닿아있고...
바닷쪽으론 진해 해양공원 옆에 있는 우도와 웅도. 소쿠리섬은 우도에 가렸다.
나는 수도 좌측으로 돌아 끄트머리에서 산자락으로 올라 붙었더니 묵밭의 풀숲이 나를 괴롭힌다.
진드기에 물린 후 풀숲에 트라우마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산으로 붙으며 건너다 보니 남산과 제덕산이 지척. 왁자한 잔디밭은 골프장인 듯하여...
당겨보니 맞넹.
수도의 제일 높은 봉우리가 해발 100m가 안되고, 이곳은 50m도 안되는 봉우리.
송전탑이 높다랗게 세워진 산정에서...
산하를 내려다 본다.
동남쪽으로 좌측에 송도(松島), 우측에는 연도(椽島). 연도에도 신당이 있다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밭이 있던 정상부위는 묵은 지 오래되었고...
나는 조심스레 반대편 방향으로 내려서다 파란 지붕을 발견하였다.
수도신당이다. 걸어놓은 출입문을 들어가보았자...
잡목이 길을 막는다.
수도신당(水島神堂)은 문이 잠겨 있었고, 제례를 할 때만 문을 연다고 한다.
제례는 그믐날에 지내며, 마을 우물을 청소하고 신당 가는 길을 정비한 뒤 집기 등을 물로 씻고 전반적인 청소를 한다.
그런 뒤 그믐날까지 신당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전등으로 불을 밝히고 할매신이 노할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제례에 사용하는 제물은 흰쌀밥, 팥시루떡, 탕국, 마른명태, 과일, 나물 등으로 일반 제사상 차림과 거의 같으나 전, 티김 등은 사용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신당 주위로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 신당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젠 신당 주위의 나무들을 모두 베버리고 신당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으며 외관상 말끔이 수리도 되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전국부락제당조사질문지(全國部落祭堂調査質問紙)'에는 수도국민학교 김순철(金順哲, 당시 34세)씨가 조사한 내용이 담겨있다.
당(堂) 이름은 상당(上堂)이고, 남동쪽 100m 지점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신패(神牌)가 있으며 제기들이 있다.
신단(神壇)은 없고 신령(神鈴)의 옷, 고무신 등은 동사(洞舍)에 보관한다.
당신은 할머니로 여기고 제주(祭主)는 1명으로 30대 이상의 부정 없는 결혼한 남녀 후보 중 동회(洞會)에서 결정한다.
제주는 1주일간 목욕하고 부정한 것은 보지도 않고 접근도 하지 않는다.
음력 12월 말일 밤에 년 1회하고 제주에게는 마을 부역(賦役)을 면해 줬다.
상차림은 쌀밥(白飯) 과실(果實) 등이라 했다.”
마을로 통하는 출입로는 계단 등으로 잘 정비되었으나 풀숲이 길을 덮어버였다.
마을 골목으로 내려서면 우물이 있는 삼거리..
다리가 있는 마을 입구에는 정자쉼터와 커다란 주차장이 있다.
수도는 고려사 「원종4(1262)년 2월」 조항(條項)에는 ‘왜구가 물도(勿島)에 침범하였다.’고 해서 ‘물섬’의 표기를 ‘勿島’로 하고 있다.
이는 ‘물섬’이 ‘勿島’로 차자 표기되었다가 경상도속찬지리지부터 한자 이름으로 ‘수도(水島)’라 표기했다.
웅천 앞 바다의 작은 섬에 수질이 좋은 물이 많이 나서 ‘물섬’으로 불렀던 것이 섬 이름으로 되었던 것.
임진왜란 때는 조선 수군이 이 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고 전한다.
추석날, 집에서 창으로 내다본 보름달.
다음날 집에서 가까운 영길신당을 찾는다.
'진해구 남양동 368' 영길교 앞에 차를 댔다.
바닷가 야트막한 산은 독메(독뫼), 또는 동메, 당메로 불리는 동산.
영길교위에 서있는 이정표는 남파랑길로 6코스가 지난다.
영길교에서 바라보는 영길신당이 있는 독메.
산으로 오르는 길은 잘 정비되었고,
산 위에는 체육공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반대편으로 비켜 되돌아 보니 정상부위에 시멘트로 지은 신당이 보인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엔 채마밭.
'영길신당(永吉神堂)'은 창원시 웅천(熊川)의 영길만(永吉灣)을 지키는 '남양동 208-1번지' 독메 정상부다.
월남천(月南川)이 휘돌아 영길만으로 흘러가는 곳에 바다를 만나 영길마을을 지키는 독메는 당메(堂山)라 하고 정상에는 '영길신당'과 신목(神木)이 있다.
원래 신목은 두 그루의 상수리나무였지만 지금은 신당 옆에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신당은 3평 가량의 시멘트블록 담장 안에 1.5평 크기의 시멘트블록 집이고 기와는 일본식 시멘트기와를 입혔다.
남양동(南陽洞)이란 지명은 1914년 일제에 의해 명명된 이름인데, 월남리(月南里)의 ‘南’과 사라진 마을 산양리(山陽里)의 ‘陽’을 따서 남양동이 된 것.
산양리는 마천공단(馬川工團)을 만들면서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비지정문화재 '창원 진해 영길당산'이라지만 편의상 '영길신당'이라 부른다.
장석이 떨어진 신당의 출입문.
문을 열자 팔월 대보름을 맞아 관리인이 켜놓은 듯한 촛불이 바람에 끄질 듯 펄럭였고...
벽면에는 한복이 걸려 있었다.
정면의 휘장 중앙에 「남무봉사당산하강지위(南無捧師堂山下降至位)」와 좌우에는 「우화선우장군(右化仙右將軍)」이라 썼다.
굳이 뜻풀이를 하자면 “봉사당(捧師堂) 당산 아래에 지극히 임하신 우화선우장군에게 귀의하겠습니다."
문을 반듯이 걸쳐 놓은 뒤 돌아나오며 가지를 뻗친 신목에 눈길을 준다.
골목을 빠져나와 반대편에서 신당이 있는 당메를 바라본다.
차를 회수한 뒤...
청안로 해안로를 따라 안골진신당을 찾아가다 웅동만을 내려다보며 차에서 내렸다.
웅동만 남양포구 영길마을 옆에 영길신당이 있는 당메가 보인다.
안골포 건너 잘록한 곳 좌측에 안골왜성이 있고, 우측이 욕망산.
당겨보면 잘록한 곳(안골고개) 우측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인 욕망산이 보인다.
안골동 회차지점(버스종점)에 차를 댔다.
맞은 편 안골어촌계 골목으로 진입하여 안골마을 뒷쪽 안골고개로 오른다.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692번지는 『1872년지방지도(규10512)-안골진지도』에 나타나는 안골진성(安骨鎭城)의 신당(神堂)이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해발 67m로 <위도 35°05'19"N 경도 128°47'45"E>.
마을을 벗어나면 고개. 그 고개에서 우측으로 진행.
포장 농로를 따랐다.
바다가 매립되며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용원.
반대편으론 안골왜성 방향.
농로가 끝나면서 철망 울타리를 우로 돌아...
대나무 숲길로 들어갔다. 나는 오래된 지도만 보며 이 능선으로 '안골진신당'을 찾아가려 했던 것.
신항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엔 고층아파트.
고개를 내밀자 욕망산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안골진성(安骨鎭城)은 1490년(성종 21)에 세워진 조선수군의 진성으로 임진난 때 왜구에 의해 성돌의 많은 부분이 안골왜성의 축조에 사용되었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안골진(安骨鎭)의 건물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신당(神堂)도 건물의 일부임을 지도에 뚜렷이 기록했다.
주소와 자료사진을 감안하면 욕망산 중턱에 '안골진신당'이 있어야 하는 것.그래서 자료사진을 빌려왔다.
올해 초 만해도 신당 앞에 두 그루의 신목(神木)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고하나 지금은 모두 잘려버렸다.
지금 이곳에는 신목은 물론 신당도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등네미' 님의 사진엔 신목 두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였다.
신목은 푸조나무(둘레 255cm)와 팽나무(360cm)로, 모두 수령 150~200년의 노거수(老巨樹).
나의 산친구 '등네미' 님의 사진에 성황각(城隍閣) 현판이 뚜렷하다.
무자십이월사일(戊子十二月四日). 무자년이면 1888, 1948, 2008년으로 쥐띠해.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하였으나 길다랗게 휀스가 쳐져 접근불가.
고개에는 안골왜성 안내판이 있고, 고개마루로 올라가...
폐허가 된 '안골진신당'이 있었음직한 곳을 바라본다.
주소만 들고 찾아나선 안골신당은 마을 뒤로 난 고개에서 안골왜성 반대방향의 욕망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신항공사 배후지 공사로 인해 파혜쳐져 신당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진성(鎭城)이 건설된지 530년이 지났고, 군사적 역할을 하지 못한 지 1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안골진 신당이 전해온 것은 민족혼이 다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려오면서 밭에서 만난 할머니께 신당에 관해 물었더니 “어디 좋은 데로 옮긴다고 하였으나 어디로 옮긴 지는 모른다”고 하면서
“없애면 안되는데”라는 뒷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할마이들한테는 암말도 하지 않았제”한다.
욕망산을 벗어나며 욕망(欲望)을 내려놓자 뇌성벽력과 함께 굵은 소나기가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