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용의 출현> 김한민 감독, 전쟁, 한국, 130분, 2022년
<명량>에 이어 드디어 이순신 사무작의 두번째 작품이 개봉됐다.
한산은 돌직구다. 약간의 상투성은 있을지언정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오직 한산대첩의 대전투를 위해 세밀한 디테일과 인과를 쌓아가고 그것을 대전투장면으로 구현하는데 초점이 있다. 한산의 서스펜스는 거기에 있다. 감정의 낭비가 매우 적다. 인물에 몰입할 틈이 없다. 이순신 개인의 탁월함도 있었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나대용, 준사, 영담 등의 다양한 사람들의 헌신을 보여줘 한산대첩이라는 필연을 구축한 영화다.
이순신을 연기한 박해일의 연기는 포커페이스처럼 표정이 없다. 그는 고함도 없고 웃음도 없다. 이순신의 고뇌는 악몽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신화화된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상상이 이미 차고 넘치므로, 오히려 박해일식의 절제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는 준사에게 이순신은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말하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준사는 번민했고 그것에 동의해 귀순하여 이번에는 조선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조선의 의병들이 들고 있던 의(義)의 깃발을 들고 싸운다. 옳음에 대한 확신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묻고 물어 나의 존재에 대해 옳음을 확신을 가진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것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혹은 가지고 싶어 한다. 자기 존재의 확실성. 하지만 옳음은 또한 위험한다. 옳지 않음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정의와 불의의 기준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묻고 성찰하지 않는 자는 곧 불의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순신 같이 독특한 사람도 없다. 그는 일기에서조차 자신의 생각을 절제해 다 써놓지 못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 내적 억압이 늘 존재했다. 일본도 미웠지만 선조와 자신을 모함하는 신료들도 미웠을 것이다. 극한 모순과 딜레마 안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외부의 적이 물어나면 내부의 적이 자신을 덮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극강의 스트레스 상태니 몸이 성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설사 그것이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어도 살리기 위해.
이순신의 번민 상황을 생각해보면 바가바드기타가 생각난다. 사촌들과의 전쟁에서 번민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는 금강경에서도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과 같은 말을 한다. 즉 무엇에도 집착하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고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간디로 이 구절을 평생 자신의 행동원리로 삼았다. 크리슈나의 조언을 듣고 아르주나는 용기를 내서 다시 전투에 임해 승리한다.
고통조차 감내하며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하지만, 집착하지 말아야 할 승리라는 것.
= 시놉시스 =
1592년 4월,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단 15일 만에 왜군에 한양을 빼앗기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조선을 단숨에 점령한 왜군은 명나라로 향하는 야망을 꿈꾸며 대규모 병역을 부산포로 집결시킨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연이은 전쟁의 패배와 선조마저 의주로 파천하며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조선을 구하기 위해 전술을 고민하며 출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앞선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거북선의 출정이 어려워지고,
거북선의 도면마저 왜군의 첩보에 의해 도난당하게 되는데…
왜군은 연승에 힘입어 그 우세로 한산도 앞바다로 향하고,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운명을 가를 전투를 위해 필사의 전략을 준비한다.
1592년 여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한 조선의 운명을 건 지상 최고의 해전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