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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촉을 3사화합이라 하여 6내입처와 6외입처 그리고 6식의 결합을 3사화합이라 하는 것인데..
이때 나타나는 6식과 12연기법의 세 번째 있는 식과 다른 것입니까? ]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는 내용 입니다.
다만 12연기에 대한 저의 생각을 올려 봅니다.
12연기(緣起: pa)]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명(無明:잘 모름 )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行)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識)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六入)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觸)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受)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도,
갈애(愛)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取)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함께 생겨난다. (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2], 25-33 전재성 역주)
각각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늙음---
일체의 삶의 유형(종류와 모양)에 따라 각각의 삶이 늙고, 노쇠하고, 쇠약해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 지고, 목숨이 줄어들고, 노화되는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죽음—
일체의 삶들이 그 각각의 유형에 따라,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이 파괴되고, 유해가 내던져지는 이것을 말한다.
태어남—
일체의 삶들이 각각의 유형에 따라 출생(불완전한 태어남)하고, 탄생(완전한 태어남)하고, 강생(알이나, 태에서 나는 것)하고, 전생(轉生: 습기로 나거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오는 것 즉 化生)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들이 나타나고, 감각의 영역(여섯 감각능력(六根)과 여섯 감각의 대상(六境)이 활동하는 場)을 얻은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존재—
세 가지(三有) 존재 –
감각적 쾌락의 존재(欲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과 하늘에 사는 존재-
형상의 존재(色有): 욕심이 없는 그러나 형상은 갖춘 천상의 존재 -
무형상의 존재(無色有): 육체를 갖고 있지 않은 순수한 정신적 존재로 고위천상의 존재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존재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은 불교의 일반적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렇게 비상식적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해석하고 지혜를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즉 존재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욕망을 근거로 하는 존재와 모양만 있는 그러나 욕망이 없는 물질의 존재, 개념적으로만 있는 그런 존재(형이상학적 존재 포함)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해석은 많은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즉 불교의 삼십삼천을 무시하는 견해라던 지물질이 어떻게 여섯 감각의 영역을 얻는 태어남을 이룰 수 있으며, 취착의 결과로 물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지 등의 논변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풀어갈 부처님의 글 속에서 그 근거가 되는 이치를 차차 설명할 것이다.
존재의 의미가 유정지물만이라고 보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며, 또 죽은 후의 세계의 존재를 말하는 것도 우리가 진리를 알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
종교적 의미에서는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니 보통 불가의 학자들이 해석하는 대로 색계천과 무색계천의 존재로 해석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는 자세에서는 그러한 종교적 해석은 일단 접어두고 사실적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색계, 무색계는 부처님 이전에 이미 있던 인도의 설화체계이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법을 설하는 부처님의 방편을 생각한다면 고대의 상황을 십분 감안하고 글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취착—
네 가지 취착(四趣)이 있으니,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취착(欲取), 견해에 대한 취착(見取), 미신적 관습에 대한 취착(戒禁取), 자아(有身見에 대한 집착)에 대한 취착이다.
집착하여 취하는 것을 취착이라 한다.
미신적 관습에 대한 취착은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개나 소 따위가 죽어 천상에 태어난다고 믿어서 개나 소처럼 똥을 먹고 풀을 먹으면서 천상에 태어나겠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또 자아에 대한 취착은 나와 ‘나의 것’을 고집하는 견해에 대한 집착이다.
갈애-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六愛身), 즉 형상에 대한 갈애(色愛), 소리에 대한 갈애(聲愛), 냄새에 대한 갈애(香愛), 맛에 대한 갈애(味愛), 감촉에 대한 갈애(觸愛), 뜻에 대한 갈애(法愛) 이다.
감수-
여섯 가지 감수(六受身)의 무리,
즉 시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수(眼觸所生愛),
청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수(耳觸所生愛),
후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수(鼻觸所生愛),
미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수(舌觸所生愛),
촉각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수(身觸所生愛),
정신의 접촉에서 생기는 감수(意觸所生愛) 이다.
감촉-
여섯 가지 접촉(六觸身)의 무리,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접촉 이다.
감역-
여섯 감역(六入: 여기서 入의 원어는 領域이나 場을 말한다.)의 무리,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감역 이다.
즉 여섯 감각 능력(六根)과 여섯 감각의 대상(六境)이 활동하는 장을 말한다.
명색-
그것에는 감수(受), 지각(想), 사유(思), 접촉(觸), 숙고(作意)가 있으니 이것을 名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물질요소, 또는 네 가지 물질요소로 이루어진 형태를 色이라고 부른다.
즉 정신적인 요소는 명이고 물질적인 요소는 색이라고 한다. 네 가지 물질요소는
땅의 요소, 불의 요소, 물의 요소, 바람의 요소이고 이 것이 이차적 물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의식-
여섯 가지 의식(六識身), 즉
시각의식,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촉각의식,
정신의식 이다.
여기서 의식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즉 어떤 존재를 알아차림이니 눈이 파란 물체를 볼 때 보는 능력 그 자체로서 아직은 파랗다고 인식하기 전 단계이다. 즉 밖의 물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경계(眼境)이고 우리의 눈은 물체를 볼 수 있는 카메라와 같은 능력을 지닌 어떤 물체(眼根)이며, 카메라에 상이 맺혀 지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인지 능력이 그 상을 취하는 능력까지를 眼識이라고 한다. 이제 그 인식 된 것을 보고 파랗다. 모양이 어떠하다고 인식하는 단계는 아닌 것이다. 즉 이 세 가지 근과 경과 식이 합해져서 비로소 하나의 앎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의 화합상이라고 부른다.
즉 어떠한 앎은 내가(識) 없어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물체(境)가 없어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눈(根)이 없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 같지만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뜻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의 진리 탐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이 여섯 가지와 세상의 여섯 가지가 서로 화합하여 일체를 보고 알며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행을 이루어 결과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 지는 것도 이 여섯 가지를 있는 그대로 잘 아는가 모르는가의 문제이며, 이 세상의 모든 철학도 이 여섯 가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아다 유아다 하는 것도 이 여섯이며, 부처님의 말씀 거의 다가 이 여섯(각각의 境, 根, 識)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 여섯 가지를 잘 알고 깨달으면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니 일체의 법을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무명(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여섯을 착각하고 그로 인해서 존재를 착각하는 것이다.
이 여섯을 잘 알면 이곳에서 무명이 벗겨지는 것이요. 이 여섯에 대한 무명이 벗겨지면 안심입명하고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형성-
세 가지 형성(行),
즉 신체의 형성(身行),
언어의 형성(言行),
뜻의 형성(意行) 이다.
형성은 sankhara로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정신적 측면에서 형성되는 것의 의미 이고, 또 하나는 형성된 것이란 의미로 모든 존재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부분의 해설은 윤회를 전제하여 하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즉,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업력(業力)으로 이해하여 이것이 윤회하며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조건을 만나면 다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무명(어리석음)으로 身口意의 업을 짖고 형성된 그 업이 유전자에 정보가 담기듯이 담겨 있다가 새운 몸을 받으면 그대로 나타나 식이 되고 이어서 십이연기의 과정을 밟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 중에 윤회를 결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인도의 사상은 부처님이 있기 전부터 윤회에 대한 생각이 일반화된 사회였다. 부처는 윤회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으며, 또 역으로 [윤회란 없다.]고 결정적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대개 불가에서는 이 윤회를 불가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말하고 있고 이러한 면은 중국의 유가나 도가에 의해서 비판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한 불교가 종교적 색체를 띠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불멸 후 학자들도 야뢰야식이니 업식연기이니 하며 그 윤회 사상을 학문적으로 강화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인도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후에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는 그 바탕 위에서 종교로서 성립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윤회가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원시경전을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해 나가다 보면 윤회에 대한 것은 꼭 그와 같이 이해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수 천 년 동안 불교의 교리로써 뿌리를 내렸으니 어쩔 수는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부처의 뜻이 분명히 해석됨으로써 모두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모든 깨달음의 결정체는 중도 사상이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중도사상은 용수가 제시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보다 다양하고 풍요롭다.
첫째는 유무중도(有無中道),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존재인 유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둘째 자타중도(自他中道)이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이와 같이 자기원인설(self-causation)과 타자원인설(external-causation)은 인과관계의 선형성(lineality)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단상중도(斷常中道)의 연기가 언급되고 있다.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나의 의견: 윤회도 포함)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 생성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넷째 일이중도(一異中道)의 연기가 언급된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다른 것입니까?”
“모든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도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바라문이여, 이들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는 현상계의 동일성과 차별성이 모두 부정된다.
다섯째 그밖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의 쌍쓰끄리뜨 복원본 가운데 거래를 부정한 거래중도(去來中道)의 연기가 나타나 있다.
“수행승들이여, 눈(안)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 여기서 분명히 인과관계가 궁극적으로 거래(去來)라고 하는 근접성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요즈음 발달된 과학철학의 이론에서도 드러난다.
여섯째 다른 초기경전 [[우다나(優多那)]]에서도 생멸중도가 괴로움의 종식인 열반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수행승이여, 나는 이것을 온다고도 간다고도 머문다고도 소멸한다고도 생기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의처(依處)가 없고 전기(轉起)가 없고 대상이 없으므로 이것이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나는 설한다.”
일곱 번째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는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원리가 팔정도와 관련해 잘 나타나있다.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 감각적 쾌락에 탐착하는 것을 일삼은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둘째]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은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 승지(勝智), 등각(等覺), 열반(涅槃)으로 이끈다.” (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2], 16-19 전재성 역주)
사실 부처님의 모든 사상은 중도이다. 이렇게 학문적으로 [무슨 중도, 무슨 중도]하며 지식을 쌓아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모두가 그런 것이다. 그러하니 윤회만 극단으로 해석함은 편의주의적 발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미 경 가운데 윤회에 대하여 정확히 말씀하고 계시나 다만 우리가 못 알아 들을 뿐이다.
그러므로 형성을 유전자의 유전정보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면 무명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몸이 아닌 것을 몸으로 인식하고, 언어가 아닌 것을 언어로 인식하고 뜻이 아닌 것을 뜻으로 고집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명의 결과로 나의 말이 옳으니 나를 따르라 하고, 너의 뜻이 틀리니 버리라 하고, 이것은 나의 몸이니 돈 들여 치장하고자 온갖 못된 짓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괴로움이 쌓이니 영원히 중생을 못 벗는 것이다.
무명—
괴로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즉 사성제(四聖)에 대해 모르는 것을 말한다. 넓게 보면 북전아함(北傳阿含)에서처럼 일체의 다양한 이치를 모름으로 보아도 된다.
이제 십이 연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12연기를 알아보고 의식의 구별을 따져보자
우리가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 생김, 괴로움의 소멸법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여 (무명),
내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나(ego)라는 자아의식(세 가지 다발)이 생기게 된다.
우선 몸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몸의 행이 생기고(몸을 기준으로 안 밖을 구별함),
언어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언어의 행이 생기며(말로 인해 이것 저것이 생김),
뜻(정신)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정신(뜻)의 행(이것과 저것의 다름을 앎)이 생기는데,
이 세 가지에 있는 그대로의 이치를 모르므로 한 다발(모임)이 형성되어(형성: 行),
이러한 세 다발을 주체로 삼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의식(무엇을 알아 차림: 識)이 있게 된다(의식),
또 이 의식을 있는 그대로의 이치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은 알아차림에 의지하여 물질적인 몸(색)과, 감수(受), 지각(想), 의도(思), 접촉(觸), 숙고(作意)등(명)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
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감각의 장(감역: 감각의 영역)이 자신이 아는 대로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감각의 작용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므로 여섯 곳에서 일어나는 접촉을 나름대로 이해하고(촉),
또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 지 못하므로 그 느낌의 받아 들임도 자신이 아는 대로 이해한다. (수),
받아들여서는 [이것은 좋은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이것은 추한 것이다.]하며 있는 그대로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는, 그러한 각각의 느낌에 집착하는 마음이 (갈애) 생긴다.
이렇게 이어지는 모든 곳곳에서 어리석어서 존재란 무엇인지 있는바 사실을 모르므로 [이것은 진짜 쾌락이며 존재 한다.], [저것은 내가 사랑하는 신이며 존재한다.]하며 (존재)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존재는 분명히 자신이 아는 대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여러 類로 나누어 보고 그러한 것이 나타나면 [무엇이 생겼다], [무엇이 태어났다](태어남)고 안다. 이러한 존재를 실다운 것으로 고집하므로 늙음(노)과 죽음(사) 등이 있다고 본다.
12연기의 12단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명]을 넣어서 해석해야 한다. 처음의 단계에서만 [무명]있고 그것을 원인으로 그 후의 단계가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면 그 후의 단계는 사실이(야뢰야식이 중생의 입장에서는 있는 것이다 하는 등의 생각) 되고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생긴 착각이 아니라고 이해되어 부처님의 모든 말씀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신만이 아는 대로 윤회를 이해하게 되고, [태어남은 태어남이다.] [늙음은 늙음이다], [촉은 촉이다]. [받아들임은 받아들임이다.]라는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각 단계마다 모두 무명으로 인하여 그러한 착각이 생긴 것이라고 볼 때 부처님 경전 속에 모든 말씀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이란 표현은 우리의 몸이 없다거나 부모로부터 태어남이 없다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사상을 중도라고 하는 이유는 이러한 단견적(극단적) 앎들이 모두 무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이 중도라는 말은 공자님의 중용과 비슷한 것이다.( 다만 중용은 중도보다 실천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
여하튼 중도라는 말은 전체를 보고 내린 학문적 정의일 뿐이다. 결국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토대로 우리가 자세히 스스로 공부하기 까지는 그 어떠한 생각도 중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떤 한 두 가지의 견해로 중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무영을 벗은 것은 아니다. 일체법에서 중도를 잘 알고, 질 말하고, 잘 실천할 수 있을 때야만 비로소 중도를 안다고 할 수 있고 무명을 벗었다고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을 얻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승이여 명색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명색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기 위해서 요가(여기서는 인도의 요가가 아니다.)를 실천해야 한다. 명색의 원인(소멸)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명색의 원인(소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기 위해서 요가를 실천해야 한다……(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2], 377-381 전재성 역주)
위 글에 12연기의 각 단계를 대입하면 된다. 이러한 경전의 글로 보아 우리가 무명이 없어지면 따라서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어리석음이 없으면 모든 단계의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는 것인데 나라는 존재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그런 환상과는 다르다는 것이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며, 의식 감각, 존재 , 태어남 등 모든 이 세상의 이치가 모두 어리석음으로 사실대로 보지 못할 뿐이지, 바로 안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바로 알면 혼란과 동요가 쉬는 것이다.
수행승이여,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됨으로써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모든 혼란과 곡해와 왜곡과 동요, 즉 ‘취착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취착은 누구의 것인가’ 또는 ‘취착이 다르고 취착 하는 자가 다르다.’ 또는 ‘영혼과 육체가 서로 같다’ 또는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는 이 모든 혼란 등이 중지되고 뿌리채 뽑히고 잘려진 종려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는다. (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2], 193-202)
이러한 십이연기법을 잘못 이해하여 무명으로 인해 그 다음의 모든 것이 생긴다고 해석하고
형성의 세 가지를 신구의 三業으로 이해하며 이론을 전개하자니 이러한 여러 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견해로는 모두 엉터리 해석에서 나온 오해의 형이상학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야뢰야식이니 마나스식이니 육식이니 하는 구별을 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삼업이 유전자의 정보처럼 있다가 어머니의 태 속에서 身口意를 형성하고 차례로 몸의 여러 감각 기관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누가 태어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가 답하신 [그렇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묻지 말고 올바로 물어라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견이다.
또 이 12연기설에서 부처님 법이 다른 일반 철학과의 뚜렸한 차이가 있으니 명색의 이전 단계에 대한 설명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철학은 이 부분을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처리하여 태극이니, 무극이니, 이데아니, 신이니 현이니, 무니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근본의 원인을 무명(어리석음)이라 말한다. 즉 무엇이 시작된다거나, 어떤 것이 최초라 하거나, 무엇은 끝이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은 관찰자 또는 생각하는 주체의 어리석음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무명을 벗고 보면 이 세계의 일체법은 그러한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물리학의 미립자를 보자. 이 미립자는 물질인 입자의 성질과, 물질이 아닌 파동(에너지)의 성질을 같고 있다.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그 최소 단위가 존재인 물질의 모습(입자)과 비존재인 비물질의 모습(파동)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그 자체가 그야말로 입자인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갖는가? 아니다. 관찰자의 입장이 꼭 반영이 되는 것이다. 즉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입자로 보이고, 또 그 관찰자의 입장의 변화와 함께 파동으로 시현되는 것이다. 즉 관계 속에서 유이기도 하고 관계 속에서 무이기도 한 성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일체법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될 때 형이상학적 입장을 떠나는 것이다.
누군가 [입자라고 하면] 부처님은 입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파동이라고 하면] 부처님은 파동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고 하면], 부처님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라고 하면], 부처님은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장 사실적으로 설명하신다. [입자가 아니며, 파동도 아니다,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 것이 아니며,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니 무엇이다]라고 형이상학적 개념을 만들지 않는다.
이 이상 더 환상이 생기지 않게 사실을 사실대로 설명할 법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답도 '법'답다."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의 학문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신도 모르겠는 것을 이름 하여 無다. 虛다. 神이다. 등등의 조어를 만들고 그 조어는 인간들에게 많은 허상을 만들어 누구나 할 수 있는 삶의 철학을 몇몇 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전유물로 만들어 놓고 아주 복잡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본인도 모르고 말하고 듣는 상대도 모르고 들으면서 서로 마주 앉자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첫댓글 청 치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늘,. 행복 하세요~!! ^^*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