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청지기의 자리를 벗어나서 자신이 주인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맡기셨을 때, 에덴의 관리자인 청지기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처럼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 아담은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입니다. 어쩌면 절대 권력자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떄문일 것입니다.
아람과의 전쟁 전에 하나님꼐서 한 선지자를 보내 아합에게 승전을 약속하십니다. 또한 아합이 묻는 질문에 답하시며 전투 전략을 알리십니다. 아합은 말씀에 따라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앞세워 먼저 아람을 공격하게 합니다. 아람 왕과 동맹국의 왕들은 술에 취해 있다가 불시의 공격을 받고 도망합니다. 아합은 출정하여 아람을 크게 격파합니다. 승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이 또 증명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첫 번째 전쟁(II)(13-21)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에서 나옵니다.
13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14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15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16○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17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18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19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20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21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13-21)
성도는 자신의 소유와 능력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과의 타협에는 적정선이 없슨비다.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하면 신앙에 있어서 계속적인 후퇴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려믄 헛된 노력을 정산하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1)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13-14)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의 승전을 약속하십니다. 벤하닷은 아합이 ‘전쟁이나 끝나고 자랑하라’고 훈수를 둔자, 이에 분개하여 사마리아를 향해 공격 준비를 명했습니다(11-12). 그런데 이때 사마리아 궁에서는 한 선지자가 아합 앞에 나아왔습니다. 13절 원문에는 ‘보라!’라는 감탄사가 문장 맨 앞에 나와, 선지자의 등장이 뜻밖의 일임을 알립니다.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들이 이세벨에게 죽임 당했고(18:4,13), 엘리야는 혼자만 남았다고 외로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19:10,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나 이 선지자 외에도 그의 주권적 계획 하에 또 다른 선지자(35), 미가야 선지자(22:8), 오바댜가 굴에 숨겨둔 100명의 선지자들(18:4) 등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를아합에게 전합니다. 이때 사마리아를 향해 진영을 갖춘 아람 군대는 “큰 무리(또는 군대)”였습니다(13). 본문에 아람 군의 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듬해에 아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보병이 10만 명에 달한 점을 참고하면(29) 이번 아람의 병력 또한 10만 명 내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큰 군대를 아합의 손에 넘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승전 예고에 어리둥절하여 대체 누구를 통해 승리를 주실지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주축을 이룰 것이라 답하십니다. 이에 아합은 누가 싸움을 시작할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와 같이 오늘 하나님께서 아합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일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언약적 사랑과 긍휼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전의 기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가뭄이나 갈멜 산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가 여호와인 것을 아합과 이스라엘이 깨닫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13; 18:36). 그들이 하나님께 되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의 청중과 현대 독자에게도 그와 같은 사랑과 긍휼이 유효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자가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2) 이스라엘의 승리(15-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은 수를 이용하여 큰 무리의 아람을 이기게 하실 예정이었습니다. 아합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14) 각 지방의 고관 청년들을 소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232명으로 적은 수였습니다. 이들 외에 소집된 이스라엘 백성은 7천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15)으로 지칭되었으나, 이는 백성 중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용사의 모든 수가 아니라 이번 전투에 대표로 소집된 용사의 수를 나타냅니다. 이 숫자는 문자적으로 7천 명 또는 상징적인 수로 볼 수도 있습니다.
7천이라는 수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바알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들’(19:18)의 수와 일치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준비하신 자들임을 암시합니다. 적군의 수에 비해 턱없이 작은 이스라엘 군의 규모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병사의 수나 말과 병거의 수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함축합니다. 이는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락에게 시스라 군대에 맞설 용사로 두 지파에서 1만 명을 소집하라고 지시한 데에서도 나타납니다(삿 4:6). 이번 아람과의 전투에서 선두에 설 232명의 청년의 수효 또한 사사 시대에 미디안에 대항한 기드온의 용사 300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당시 세 지파에서 소집된 32,000명 중 1만명 만이 참전하기 위해 남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많다고 하셨고, 결과적으로 기드온과 300명만으로 미디안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삿 7장).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람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스라엘은 정오에 232명의 고관 청년들을 먼저 출정시켰습니다. 그때 벤하닷은 동맹국 왕들과 함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대적들이 허술한 틈을 공략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술에 취한 벤하닷의 모습은 오므리 장군을 전장에 보내고 디르사에 남아 술에 취해 있었던 엘라 왕을 떠오르게 합니다(16:9). 이런 연결성은 엘라가 방심해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병거 지휘관 시므리에게 암살당했던 것처럼(16:10), 아람 왕도 죽든지 아니면 적어도 큰 해를 입게 될 것을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만듭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보고 받고, 군사들을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성에서 사람들이 나와 아람 진영을 향해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이 본 자들은 선두에서 진격하는 232명의 청년 무리였을 것입니다(17).
벤하닷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해(“화친하러”) 나오더라도 사로잡고, 전쟁을 위해 나오더라도 사로잡으라고 명합니다(18). “화친”을 언급한 것을 보면 벤하닷이 청년 무리를 항복을 전하러 오는 아합의 사절단으로 오인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판단력이 흐려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적군을 사로잡으라는 벤하닷의 두 명령 원문에 ‘산 채로’라는 말이 각각 나와 강조되었습니다(18). 벤하닷이 그들을 왜 생포하려 했는지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람의 병력 규모가 이스라엘과 비할 수 없이 컸으므로, 이스라엘과 혈전을 벌이지 않아도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생포하라는 명령은 그의 방심과 과시욕에서 나온 언사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이 선두에 섰고, 나머지 7천 명의 병사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청년들과 나머지 이스라엘 용사는 일대일로 적군을 맞닥뜨려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아람 병사들은 전세가 기우는 것을 인지하고 도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이때 벤하닷도 말을 타고 마병들과 함께 피했습니다. 이들은 패전에 대비해 왕의 탈주를 돕는 수행원들로 이해됩니다. 또한 그가 술에 취했기에 도움 없이 혼자 도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초토화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의 신들에게 어떤 벌이라도 받겠다고 떠벌렸지만(10), 그의 위풍은 결국 허풍이 돼버렸습니다.
1절에서 “아람 왕”으로 불리며 등장한 벤하닷은 20절에서도 “아람 왕”으로 불리며 퇴장하나, 그의 모습은 1절과 전혀 다른 형국입니다. 등장 때의 벤하닷은 32명의 동맹 왕의 대표로서 큰 군대를 거느리며 사마리아를 공격하러 온 용맹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퇴장 때는 전장에서 술에 취해 자제력과 판단력을 잃은 왕, 오판으로 아람의 많은 병사를 죽게 했으며, 패배 속에 수욕을 견디며 도망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 왕 아합은 힘없고 굴욕을 참아야 하는 왕으로 등장했으나, 마지막은 출정하여 용맹스러운 활약을 펼치고 승리하는 왕으로 나옵니다. 아합은 벤하닷 군대의 말과 병거를 치고, 아람 사람을 큰 격파로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승리를 약속하고 예고하신 여호와의 말씀(13)이 성취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사마리아 전투 전체(1-21)의 구조상으로도 단락 중간 즈음에 나와 벤하닷과 아합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스라엘에게 허락한 승전은 이스라엘 군대보다 열 배 이상 많은 군대를 상대하여 얻은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인간의 계산으로는 불가한 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의 전능함을 이스라엘과 열방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승전 약속의 성취를 통해 아합과 이스라엘이 그를 “스스로 있는 자”(출 3:14),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임을 깨닫기 바라셨습니다(13). 앞서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을 지켜봤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불의 응답에 놀라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18:39). 그러나 오늘 전쟁의 승리를 경험한 아합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로 고백하는 내용이 기록되지 않아 긴장감을 줍니다.
힘의 노리가 지배하는 세상 질서 속에서 더 강함되기를 추구하기보다 약자의 어려움을 돌봐주며 강함되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의지하는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을 헛된 자만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