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통/박구경
비 오는데
알전구 하나만이 흔들린다
그러니까
그 우산 아래가
나의 밤이며 침잠이다
그래서 나는 또
고구려같이 먼 곳에 가서
우거진 빗속의 밥 연기이고 싶다
고기 굽는 연기이고 싶다
싸움터에서 돌아온 진창 속의
<시 읽기> 장마통/박구경
후줄근한 비에 젖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걱실걱실한 고구려 장정들. 빗속에 밥 짓는 연기, 고기 굽는 연기, 진창 속에서 억세고 큰 목소리로 짐승들처럼 득시글득시글 웃고 떠들었겠지. 땀내, 살 비린내, 짐승 비린내, 연기에 섞여 함께 물큰거렸을…… ‘장마통’
이 시는 과묵하고 어눌한 듯, 실은 매우 정밀하게 말을 앉히고 있다. 활자로 돋을새겨진 말만이 아니라 말들 곁의 어둑한 그늘과 침묵이며 묵묵히 눈만 끔벅거리던 밤 같은 것들까지 다 몫몫의 말로 모셔서, 정성을 다해 조심스레 앉히고 있다. 그 공덕으로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또” 같은 허사虛辭들만의 구절도 섬세히 내면의 기척을 담는 별행別行으로서 설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시인은 말에 대한 염치를 아는 사람이다. 어디까지 말을 내고 어디쯤부터는 쉬어야 하는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어디쯤부터는 말을 쉴 수밖에 없는지)의 분별은, 모호한 듯하나 실은 대명천지만큼이나 뚜렷한 것이다. 한데 우리의 어떤 습성과 욕심이 안 해도 좋을 말을, 안 하는 게 나을 말을, 중언부언하게 한다. 말을 마구 쓰게 한다.
아마도 말들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 저를 세심하게, 중하게 대하는 이런 시인을 좋아할 것 같다. 제 할 말이 바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말들이 지닌 표정과 빛깔과 한숨 같은 것을 우선 보고 듣고자 애쓰는, 그런 이를 말들은 더 따르지 않을까. 그런 시인들은 소박해 보이지만 예민하고 적확해서, 무엇에도 양보할 리 없는 언어에 대한 확신과 긍지로 차 있는 경우가 많다.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도서출판b,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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