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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의 능은 대군 묘로 조성되어 매우 간소하다.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 형식을 갖추고 있다.
여인 천하의 주역이라고 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 간 인수대비가 왕실로 들어온 이유는 당대의 정치 역학 때문이었다. 인수대비의 큰고모는 명에 공녀로 갔다가 성조의 후궁이 된 여비다. 1424년 성조가 죽자 순절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처형과 다름없는 자살로 알려진다.
놀라운 것은 성조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선종 또한 한확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한확은 청렴결백하고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 전해지지만 명에 2명의 누이를 공녀로 보낸 이유는 남다른 권력욕 때문이었다는 평판도 있다.
속마음이 어떻든 한확은 젊은 시절 누이의 후광을 업고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명 황실과 인척이므로 명과 조선의 민감한 사안은 도맡아 처리했고, 태종 17년(1417) 진헌부사로 명에 갔을 때는 황제에게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받기도 했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조선 사신으로 명에 가서 황제의 사령장을 받아오기도 했다.
한확의 위상을 볼 때 왕실에서 한확과 사돈 관계를 맺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과 혼인했고, 여섯째 딸(인수대비)은 수양대군의 아들인 도원군(덕종)과 혼인했다. 당대의 야망가인 수양대군이 훗날 정치적 입지를 고려해 명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지닌 한확과 사돈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인수대비는 아들 성종을 둘러싼 분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지식인으로도 한몫했다. 인수대비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범자와 한자, 한글 등 3자체로 손수 쓴 불경이 전해질 정도다. 『불정심다라니경언해』(보물 제1108호), 『오대진언집』(충북 유형 문화재 제253호), 『육조대사법보단경언해』(경북 유형 문화재 제354호)는 그녀가 편찬을 주도한 것이다.
『불정심다라니경언해』
『오대진언집』
『내훈』
인수대비가 남다른 대우를 받는 이유는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내훈』을 39세에 썼기 때문이다. 『내훈』은 『소학』, 『열녀전』, 『명심보감』 등에서 훈계가 될 만한 것을 모아 한글로 풀어 쓴 책이다. 부인들의 모범적인 사례를 들어 이해를 높이고 부부의 도리, 형제와 친척 간의 화목 등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실어 유교적 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인수대비는 나라나 집안의 치란과 흥망은 일차적으로 남자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부인의 덕성 또한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에 여자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고 『내훈』의 서문에서 밝혔다. 천하의 큰 성인 요순도 자식 교육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단주와 상균 같은 불초한 아들을 두었음을 상기하며, 한낱 과모인 자신의 자식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발로가 『내훈』이라는 설명이다.
아내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공경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 책은 이후 조선 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지론은 간단하다. 며느리가 잘못하면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처럼 강한 생각을 한 이유는 그녀의 특이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다. 인수대비의 집안은 조선 왕실에서도 의지할 정도로 위상이 있는 가문이었지만 막상 그녀는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올랐으므로 아쉬움이 있었다. 자신의 며느리이자 왕비라면 완벽한 여성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비는 『내훈』의 법도와는 다소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인수대비가 주장하는 여성의 교양은 남성을 우위에 둔 여성의 부덕이었다. 또한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은 비록 왕비라 해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이 자신이 강조하는 내용에 저촉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윤비의 초창기는 매우 좋았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어린 나이에 후사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 씨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 여자는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배경과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인수대비는 친정집이 명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뒤에 업고 있었지만 윤비는 그렇지 못했다. 윤비는 가난한 대간 집안 출신의 딸로 친정의 지원이 없었다. 또한 인수대비가 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 윤비는 자유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했다.
성종이 엄 귀인과 정 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저주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수대비와 성종은 그녀가 성종과 후궁을 죽이려 했다고 믿었다. 윤비는 이 사건으로 빈으로 강등될 뻔한 수모를 겪었지만 잘 무마되었다. 하지만 1479년에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퀴어 왕과 인수대비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세자인 연산군이 장성함에 따라 윤 씨의 처우 문제가 쟁점화되면서 여론은 동정론으로 기울어갔다. 대신들은 원자의 친모인 윤비의 폐비와 사사는 궁극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윤 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의 불씨가 될 수 있다며 그녀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를 제거하면 왕실 내에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윤비가 사사되자마자 정희왕후가 사망했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연산군을 낳은 윤 씨의 사사가 그의 사후에 커다란 불씨가 될 것으로 생각한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이 사건을 공론화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역사는 성종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왕이 된 연산군은 결국 윤 씨가 사사된 진상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 왕실에 전례 없는 회오리바람을 몰아온다.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 숙의와 정 숙의를 살해했고, 병상에 누워 있던 인수대비가 꾸짖자 그녀를 머리로 들이받아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결국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유별난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 결국 중종반정으로 왕위를 빼앗겼다. 그의 무덤 역시 왕릉이 아닌 묘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하는 불운을 맛본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봉분의 지름이 가장 크지만 봉분에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 망주석, 석수, 무인석이 없어 매우 간소하다. 귀면이 조각되지 않은 고석이 받친 석상과 팔각 장명등이 보이고 시립한 문인석이 양쪽에 있다. 이는 당초에 경릉이 대군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며 이후 추존 왕릉으로 조성되는 능의 표본이 된다.
문인석은 머리 부분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크고, 신장이 매우 커서 당당해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전면의 관대에는 무늬가 없고, 뒷면 관대도 사각 외형만 5개 있다. 요대 역시 무늬 없이 좌에서 우로 사선형을 이룬다. 덕종 능침의 팔각 장명등은 조선 초기 형태로 규모가 크고, 장명등 옥개석 아래의 처마 밑 처리는 한옥의 다포 양식으로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소혜왕후는 여인 천하의 주역이라고 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 간 여성이었다.
반면 소혜왕후의 능은 추존 왕 덕종과는 달리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릉 형식을 갖추고 있다. 열두 칸의 난간석을 비롯해 모든 석물이 있다. 석양과 석호 등의 석상도 각각 두 쌍 있으며, 문인석과 무인석도 있다.
단, 문인석과 무인석은 마모가 심하다. 무인석은 체구에 비해 손이 크고 우람하며, 갑옷 무늬도 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거칠어 장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연산군이 서둘러 조영하도록 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경릉은 동원이강의 능제를 따르고 있지만 일반적인 배치 예와 다르다. 능을 전면에서 바라볼 때 좌상우하의 원칙에 따라 좌측에 왕, 우측에 왕비의 능이 배치되는데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왕보다 높은 좌상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는 인수대비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
참고문헌
염상균, 「[王을 만나다·16] 서오릉-경릉(추존 덕종·소혜왕후)」, 『경인일보』, 2010년 1월 14일.
정성화, 「인수대비」, 네이버캐스트, 2011년 11월 19일.
이창환, 「왕실 피바람 지켜본 인수대비 우비 좌왕의 특이한 형태」, 『주간동아』, 2010년 5월 24일.
-이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