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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11장 1절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4-본받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여러분들이 가장 닮고 싶었던 사람 한 사람을 꼽아보라고한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말을 바꾸어서 여러분들은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여러분들을 본받으려고 애를 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의 차이는 배우는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배웁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만 배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은 무시합니다. 전에 목회자 모임에서 어떤 한 목사님이 여러 목사님들 앞에서 “하나님이 아이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지!”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진실로 그렇게 하시는 지는 알수 없지만 때때로 하나님은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이들까지 나와서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면서 찬송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당신은 저 소리를 들으시면서도 그들을 제재하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이 노래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하시면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에 능통했던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능통했던 종교지도자들도 알아보지 못했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바다로 나갔는데 바다에서 고래를 보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너무나 놀라서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말합니다. “나 바다에 놀러갔다가 고래를 보았어요” 그러자 부모들이 말합니다. “야! 거짓말하지마. 서해바다에 고래가 어딨어!” 그래도 아이는 보았다고 큰 소리로 우깁니다. 그래도 부모가 안믿어 주니까 아이는 울면서 말합니다. “진짜로 보았다니까 왜 내 말을 안믿어” 이것이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아이들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알아보는 것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 능통하냐 능통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시느냐 못깨닫게 하시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집사님은 사마리아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기도하고 있는 빌립집사님에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빌립집사님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을 찾아볼 수도 없는 광야로 갑니다.
가보니 때마침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던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마차에 타고 있는 데 그 앞뒤에는 많은 군사들이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가만히 들어보니 이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은 종에 대한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고난받은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읽는 소리를 들은 빌립이 묻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읽으면서도 궁금했던 내시가 말합니다. “가르쳐주시는 이가 없으니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느냐?” 이 말을 들은 빌립이 “내가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하니 마차에 오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차는 계속가는 가운데 빌립이 그 말씀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가다가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를 보자 빌립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겠느냐?”하고 말하자 그가 그러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침례를 줍니다. 그리고는 둘 모두가 헤어져서 각자가 갈 길로 갔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이 광야에서만 성경을 읽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빌립집사님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본다고 해서 다 이해하거나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깨우쳐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에게는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에 박식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알아보는 것은 나이순이 아니며 지식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러 가지 방편으로 깨닫게 해주실 때에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겸손히 주님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며 그 전에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지만 직접 말씀하시는 방식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마음을 겸손히 하고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들처럼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며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교회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전하다가 이렇게 권고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 다같이 고린도전서 11장 1절인 그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것은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서도 이미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신앙이 너무 어렸지만 은사 활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서로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하니 영적인 혼란이 옵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미워하며 다투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내용은 일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까 너희는 이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고만 하지 다른 사람들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할 때는 청종하여 들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고집만 부릴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작정 “내 말대로 해”하지 않고 “나도 지금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어 그러니 너희도 그런 나를 본받아봐”하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본받아야할 대상에 대하여 두 가지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궁극적으로 본받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면서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앞에 서있는 영적인 인도자들입니다. 그것은 목사일수도 있고 장로나 권사일수도 있고, 또 집사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선적으로 그들을 보고 배우면서 예수님께로 나아가 예수님께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여러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중매를 하고 있는 중매장이와 비슷합니다. 결혼은 둘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외로웠기 때문에 하와를 만들어 그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담에게는 하와가 필요하고, 하와에게는 아담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누가 필요합니까? 육신적으로 남편이나 아내나 혹은 누군가 의지하고 함께 나눌 대상이 필요하듯이 영적으로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증거하는 목회자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들과의 사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올바르고 능력있게 세우고자 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과 목회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거듭난 여러분들은 날마다 조금씩 성장하여 능력있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모델이 있습니까? 가끔은 세미나를 인도하시는 목사님들이나 함께 만나 교제를 나누는 목사님들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묻거나 아니면 대중적으로 묻습니다. “목사님은 목사 목회에 영향력을 끼친 멘토가 있어요?” 나를 감동시키고 목회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런 목회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목회자를 만나보지는 못한 것같습니다. 여러 목회자들의 장점은 본받으려고 하지만 저를 사랑해서 저에게 자신의 목회상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했던 것들을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책을 통해서 신실한 목회자들을 만나게 하심으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는지를 배웠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본받고 계십니까?여러분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친 목회자나 성도는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이 믿고 따를 목회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목회자를 만나 온전히 배우고 순종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보를 얻을 뿐 만 아니라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도 역시 가르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배우고자 한다면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배우려는 자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서 가르치시든지, 또 누구를 통해서 가르치시든지 간에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다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이상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르치지만 그런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에 욕심이 있거나 아니면 마음이 한군데로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영적인 갈망이 매우 강한 사람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갈망은 강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자기 만족과 사람들에 대한 과시욕구를 가지고 영적인 은사들을 구하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주 교묘합니다. 하와를 속일 때도 하나님께서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하셨는데도 사탄은 “아니야 절대로 죽지 않아. 오히려 하나님이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까봐 속이고 계시는 거야”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 혹한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같이 망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같이 망하자고 사람들을 자꾸만 자기들의 집단에 끌어들이지 않습니까?
한편으로 성공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성공과 연관된 것만 배우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성공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리라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있어서 비싼 돈을 주고라도 성굥으로 가는 길을 배우려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책을 사보기도 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많은 프랜차이즈 지점을 차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돈은 가지고 있는데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아서 더 많이 벌고 싶은데 알고 있는 것이 없다가 텔레비진이나 여러 광고에 신종직업이나 요식업같은 것들이 생기면 그쪽에 투자를 하고 싶어 합니다. 성공적인 프랜차이즈가 있다고 하면 그쪽으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열심히 배웁니다. 반드시 성공할 것같은 마음에 눈이 빛이 납니다. 마음이 흥분됩니다. 그들은 마치 물고기들이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이 물고기 밥을 던져주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것처럼 성공할 수 있는 음식점이라고 하는 광고에 현혹되어 달려듭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장사가 되는 것 같지만 몇 개월 못가서 점점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어지면서 적자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서 수많은 빚을 내고 문을 닫습니다. 그들은 성공의 길을 배우지만 실패의 길을 간 것입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겸손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지에 대한 지혜와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교회는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풍성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사랑으로 질서있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힘쓰시길 축복합니다.
둘째로는 배우되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 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온전히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에게서 배워야 하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에 따라 바른길을 가기도 하고 치우치는 길을 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바른길을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바른길을 가라고 주신 그 바른길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살았던 사도 바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너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을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삶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실까요? 지난번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거듭나야 가능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땅이 아닌 하늘을 의식하고 삽니다. 자신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을 멀리하고 선을 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이시는 선한 일을 행하시면서 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모든 일에 순종하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이셨고 행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아들은 그것을 보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새벽 미명에 나가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찾아와서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마을들로 가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서 왔노라”하고는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만일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면서 더 많은 위세를 과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생의 자랑은 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세상 것은 때가 되면 모두 사라질 것들입니다. 세상 것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많은 것들을 자랑할 지라도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맨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옵니다. 물론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맨손으로 떠나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도, 세상으로부터 얻는 것도 꽉잡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6절을 보면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자랑하면 안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으로 자랑을 합니다. 로마서 15장 17-19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산 사도 바울이 무엇을 자랑스러워했는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일하셨습니까? 그것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고 힘써서 일할 때 나타난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자신 안에 계셔서 자신을 통해 일하신 그리스도의 말과 행위와 표적과 기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된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것도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날마다 하니님의 은혜로 사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로 인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전도하는 것도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의 자랑거리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진정한 할례파는 바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와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랑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을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하면서 자신의 자랑의 면류관이 바로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엣 갖는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나 예수님을 본받는 사도들에게서나,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도 역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자신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의 어떤 삶을 본받았을까요? 첫째는 그리스도의 버리는 삶을 본받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다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육신의 가족과 영의 가족인 교회 중에 어떤 가족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은 모든사람들은 다 하나님이 새롭게 가족이 되게 하신 교회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육신의 가족보다 영의 가족들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가족들이 아닌 자신 앞에 있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이들이 진정한 나의 가족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진짜 내 가족은 교회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기도하는 모습을 본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기도에 힘쓰셨다는 것을 알고 기도를 생활화하였습니다. 특히 교회를 향한 기도가 매우 깊었습니다. 로마서 1장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항상 로마교회를 위해 기도했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이런 기도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의 앞부분에 항상 나옵니다.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한다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에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동행할 수 있게 됩니다.
세번째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0절을 보면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하고 말씀하시는 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셨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 아버지는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을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번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죽도록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지 않습니다. 충성은 마음속 깊은 데서 나오는 사랑과 복종의 결합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충성도는 아버지에 대한 극진하신 사랑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인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자기가 잘되는 것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며 예배와 헌금도 드립니다. 다 자기를 위한 투자심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이나 수많은 믿음의 위인들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 그토록 충성했기에 너희도 나를 본받아 그리스도께 충성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는 자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워서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은 측령할 수조차 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이 보이신 일을 행할 수가 있었으며 말씀하신 일에 순종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로 기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기쁨을 삼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기쁨은 어떻습니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가르쳐주시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기신 수많은 사람들을 극진한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엄청난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피곤하셔도 자신에게 나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섬기셨습니다. 병자들은 고쳐주셨고, 귀신들은 내쫓아 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를 먹이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하늘 나라의 지혜룰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면서 여러분들을 자신의 형상을 닮아 자라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도 역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사람들이 누군지를 예수님께 물으시고 예수님께서 섬기라고 보내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보이셨고 가르치신 삶을 살아야 하는 데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시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셔서 함께 힘을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또 그리스도를 본받는 목회자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돕도록 세우신 사람을 본받으시며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날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정의가 조금씩 예수님을 배우고 순종하며 충성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인 여러분들과 온세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구원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하시고 헌신하시며 사랑으로 섬기면서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이웃과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우리 제석교회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리도전서 11장 1절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