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오래 아픈 친구 문병을 갔습니다.
전북 익산 요양병원에서 3년이 넘게 치료를 받다가 한 달 전에 인천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처음 그 친구가 요양병원에 갔다고 할 때, 친구들은 다 의아하게 생각을 했고 그 친구를 병원으로 보낸 사람들에게 원망의 말을 쏟았습니다. 전화도 안 되고 면회도 안 되는, 무슨 수용소 같은 곳일 거라는 막연한 얘기가 꼬리를 물었고,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번지면서 어느 요양병원도 면회가 안 되면서 3년이 훌쩍 갔고 이제 볼 수 있어 갔더니 자리에 누워 친구들 얼굴 보면서 눈물만 흘리고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당뇨 합병증과 경증치매 초기라고 하는데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70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이에 이런 저런 병으로 친구들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얘기가 들려옵니다.
아래 “자살”에 대한 얘기가 있는데 요즘 우리 주변에는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무척 많은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지 제가 알 수가 없지만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이 안 되는 삶이 과연 지탱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보다 ‘각자도생’의 삭막한 한국 사회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용어마저 서늘한 자살률은 높아도 너무 높다.
인구 10만 명당 고의적 자해에 의한 사망자 수는 2021년 기준, 26.3명에 달한다. 하루 36.5명이 스스로 고귀한 목숨을 끊었다. 초유의 감염병으로 암울했던 지난 3년, 코로나 사망자보다 자살자가 더 많은 국가가 되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 어쩌지 못하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맨 앞에 18년째 서 있다.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무기력하게 지켜보기엔 생명존중의 위기는 엄혹하다. 국가의 미래인 10대에서 30대에 이르기까지 사망 원인 1위, 국가 동력의 주축인 40대 사망 원인 2위라는 현실은 참담하고 황망하다. 여기에 더해 질병에 묻힐 뿐 노인의 자살률은 더더욱 심각하다. 어찌하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전환된 유일한 나라이다.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전무후무한 나라이기도 하다. 국민의 꿈이었던 선진국 진입은 달성하였지만, 자살 공화국의 오명도 부여받았다.
성장의 빛은 찬란했으나 그 이면에서는 자살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하고 용어만 순화된 채 애써 회피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극단적 선택’이라는 방관자적 용어 속에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었다.
가족과 지인의 애절한 슬픔으로 남는 자살은 ‘개인 목숨’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회 목숨’으로 그 비극은 확장된다. 그러하기에 자살은 공동체의 시급한 의제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극단적 비교이겠지만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증후군 PTSD에 시달리는 미군 자살률보다 높다. 무한 경쟁 속 한국 사회의 실존적 현실이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 심리학자 로리 오코너 교수의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는 한 개인이 자살로 향해가는 과정에 투영된 여러 요소를 제시한다. “생존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도움 되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서문은 자살이 슬픔으로 끝날 애도가 아닌 남겨진 자들의 성찰 대상임을 제시한다.
우리 사회는 가까운 이의 자살 이후 남겨진 사람을 뜻하는 ‘자살 생존자(Suicide Survivors)’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취약하다. 일상을 동행해온 사람이 자살로 세상을 떠난 뒤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를 겪는 ‘자살 생존자’에 대한 통계는 따로 없지만, 자살률이 증가하면 자살 생존자도 함께 늘어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최근 논문에 따르면 한 사람의 자살은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28명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자살 생존자’ 문제는 사회적 파급력을 갖지만 이에 대한 공론화는 취약하다. 한국처럼 인구 밀도가 높고 관계 지향적 사회에서는 자살 생존자의 범위는 더 넓을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처연한 이별을 사회적 관습과 제도의 수순으로 거쳐 가지만 남겨진 자들의 마음은 검게 그을린 나무 옹이처럼 남는다.
살가웠던, 소중했던 사람을 자살로 잃은 사람이 떠난 이의 선택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회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자살로 누군가를 잃고 힘들어하는 남겨진 자들에게 또 다른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적절한 국가적 지원과 위로가 무엇인지 공감의 과정을 확장해야 한다. 국민적 교육이 될 수도 있고 복지적 접근과 의료적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나치를 피해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와 언어를 바꾸며 끝내 살아남았던 독일 출신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 한 구절이다. 생존자의 슬픔이 눅진하게 배어 나온다.
타인과의 감정에 유독 공감 능력이 뛰어난 ‘우리성’ 강한 한국인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다. 언젠가 떠난 자와 남겨진 자의 연결된 감정은 느슨해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눌 길 없는 순간순간의 슬픔 속에 살아갈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이제는 존재하길 바란다. 역사학자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는 “죽음은 죽은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에게 더 날카로운 아픔을 남긴다”고 했다.>중앙일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출처 : 중앙일보.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저보다 한 살 아래인 친구가 피부암으로 시작된 암이 폐와 발목 뼈 등에 전이가 돼서 매우 걱정입니다. 이제는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문자를 남겨도 연락이 없습니다.
불과 3년 전에 그렇게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있어 너무나 마음이 아팠는데 이게 제가 제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얄팍한 신심도 없으면서 하느님께 친구가 암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자살한 사람의 남은 사람이 더 어렵겠지만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남은 사람도 오래 가슴에 남은 슬픔을 치유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