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할 선(善)자는 양 양(羊)자에 입 구(口)자를 했습니다. 양 양(羊)자는 희생 양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짐승이 동서양(東西洋)이 주로 양(羊)이었습니다. 양을 제사에 제물로 바친 것은 구하기가 쉽고, 크기도 그리 크지 않으며, 짐승이 순해서 제물로 바치기에도 좋았을 것입니다.
착할 선(善)자에 입 구(口)를 한 것은 생명의 표시를 한 것입니다. 입을 통해서 생명 유지가 되고, 입을 통해서 삶이 영위됩니다. 입은 살아 있는 표시입니다. 착할 선(善)자는 희생 제물을 표시하면서 입 구(口)자를 더해서 생명을 강조한 것은 생명이 가장 귀한 것이기에 그 귀한 것을 제물로 바친다는 막중한 뜻이 있습니다.
善
악할 악(惡)자는 성부(聲符)로 버금 아(亞)자 아래에 의부(義符)로 마음 심(心)자를 했습니다. 백토 악(堊), 살무사 악(蝁)자는 버금 아(亞)자가 들어 있어서 ‘악’으로 읽습니다. 버금 아(亞)자는 무덤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글자입니다. 사람이 첫째이고, 죽음이 둘째라는 말이지요.
惡
악할 악(惡)자에 의부(義符)로 마음 심(心)자를 했습니다. 마음이 악(惡)하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모든 악행(惡行)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움켜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생명입니다. 모두 살려고 하는 일입니다. 생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은 이미 태어난 것을 어쩌지 못하고 굳세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다른 생명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모순입니다.
악(惡)은 생명의 모순입니다. 그러니 악(惡)을 이해해야 합니다. 악(惡)을 이해하는 데에서 자비(慈悲)와 용서(容恕) 사랑이 나옵니다.
동양에는 성악설(性惡說)과 성선설(性善說)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악(惡)하다고 하는 데에서 논리의 바탕을 두고 인생을 엮어나가는 사람들과,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는 데에 바탕을 두고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가지 주장은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의 나무입니다. 성선설(性善說)이나 성악설(性惡說)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두고 펴는 논리입니다. 생명 유지와 마음이 추구하고자하는 바가 일치하지 못하는 생명의 모순이 이 두 학설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살자고 하니 다른 생명을 해치는 성악설(性惡說)이 이해가 되고, 더욱 착하게 살자고 하니 생명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나, 생명의 모순을 이해하고 긍정하면서 그래도 더 착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국 선(善)이란 저기를 희생(犧牲)하고 자기를 버리고 양(羊)처럼 남을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 던지는 것이 아닐까요.
양(羊)은 이렇게 우리 인간들에게 착한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